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글: 고문겸(高文謙)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
2023. 5. 18.
김용(金庸)의 부친이 총살당한 경위는...?
글: 창산잡담(蒼山雜談) 1. "당송이래거족(唐宋以來巨族), 강남유수인가(江南有數人家)" 2000년초, 김용은 자신의 자전체 산문 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산동에서 내려온 군대가 의관(宜官)의 고향으로 쳐들어왔고, 의관의 부친은 지주로 판정되어 농민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의관은 홍콩에서 삼일밤낮을 통곡했고, 반년동안 상심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부친을 죽인 군대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전중국에서 처형당한 지주는 수천수만에 이르고, 이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대변화였디 때문이다." "의관"은 김용의 아명이고, 그의 부친 사수훈(査樹勛, 일설에는 사추경(査樞卿), 사하상(査荷祥), 사무충(査懋忠)이라 함)이 붙여준 것이다. 김용은 성이 김(金)이 아니고, 사(査)이며, 본명은 사량..
2023.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