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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107

대초황제(大楚皇帝) 장방창(張邦昌) 작자: 미상 정강2년(1127년), 금나라군대가 개봉성을 점령하면서, 북송왕조가 멸망했다. 금나라군대는 장방창을 괴뢰황제로 세우고, 국호를 "대초(大楚)"라 한다. 금나라사람들은 왜 장방창을 괴뢰황제로 세웠을까? 장방창은 어떤 인물인가? 사서 기록에 따르면, 장방창(1083-1127)은 자가 자능(子能)이고, 북송말기 영정군(永靜軍) 동광(東光, 지금의 하북성에 속함) 사람이다. 진사출신이며 관직은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훈도에서 실수를 저질러, 제거숭복궁(提擧崇福宮)으로 좌천되고, 광주(光州), 여주(汝州) 두 개주의 지주(知州)를 지낸다. 정화말년, 홍주지주(洪州知州)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된다. 선화원년(1119년),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고 다시 좌승(左丞)이 된다. 그후에 중서시랑(中書侍.. 2023. 5. 11.
송인종(宋仁宗)의 3대 번민: 인모(認母), 폐후(廢后), 입저(立儲) 글: 원희(元曦) 이런 말이 있다. 청관난단가무사(淸官難斷家務事). 청렴한 관리도 집안 일은 판단하기 어렵다. 천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도 골치아픈 집안 일이 있다. 송인종은 일생동안 세 가지 일로 골치가 아팠다. 무슨 세 가지 일인가? 인모(認母), 폐후(廢后), 입저(立儲)이다. 쉽게 말하면, 누가 엄마이고, 누가 마누라이며, 누가 아들이냐는 세 가지 일인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집안 일은 그 자신의 프라이버시이다. 주변 사람들이 간여하기 힘들다. 그러나, 천자는 다르다. 왜 다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천자는 권력이 크므로,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실제는 정반대이다. 천자에게는 프라이버시가 없다. 그의 집안일도 모두 나랏일이 되어 버린다. 대신들도 말을 하고, 언관.. 2023. 3. 8.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는 왜 황위를 선위(禪位)하고 태상황이 되었을까? 작자: 미상 5천년의 역사문화 속에서 모두 83개의 왕조, 559명의 제왕(162명의 '왕'과 397명의 '제')을 탄생시켰다. 그중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는 56년간 재위했고, 청고종(淸高宗) 건륭제(乾隆帝) 애신각라 홍력(弘曆)은 60년간 재위했고, 청성조(淸聖祖) 강희제(康熙帝) 애신각라 현엽(玄燁)은 61년간 재위했다. 제왕의 자리는 자고이래로 지고무상의 자리이다. 어떤 사람은 불로장생을 추구하면서 황제의 자리를 '패점(覇占)'하고자 했고, 어떤 사람은 미루고 미루면서 '선양'을 하지 않았다.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도 않았고,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송고종은 마치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체가 건강한데도 일찌감치 퇴위했다. 그는 퇴위후에도 25년간 태상황으로.. 2021. 12. 29.
야율대석(耶律大石): 서요(西遼)의 개국황제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요나라는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주로 등 일련의 희극때문일 것이고, 이들 희극의 결론은 당연히 마지막에는 항상 중화왕조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실제상 요태후(遼太后) 소연연(蕭燕燕)을 우두머리로 하는 요나라는 송나라를 마구 두들겨 팼다. 송태종 조광의가 엉덩이에 화살을 맞고서 나귀수레를 훔쳐타고 낭패해서 도망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양가장중의 주인공인 양노령공을 생포한다. "전연지맹(澶淵之盟)"이후 송나라는 매년 요나라에 공물을 바쳤고, 그제서야 쌍방은 전쟁을 멈춘다. 이때가 요나라의 전성기이고, 영토는 '폭원말리(幅員萬里)"라 칭했다. 아쉽게도 그 이후의 요나라황제는 계속 그 전보다 못하게 되어 요흥종(遼興宗)이 즉위한 후 요나라의 국세는 날이갈수록.. 2021. 12. 27.
송철종맹황후(宋哲宗孟皇后): 송황실에서 버려졌으나, 송황실을 153년간 잇게 만들어주다. 글: 진순천(秦順天) 현숙(賢淑)함으로 황후로 뽑히다. 맹씨는 하북성 한단(邯鄲) 영년(永年) 사람이다. 1073년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16살때, 그녀는 백여명의 관료 여식들과 함께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자태가 아름답고, 단정하여 고태후(高太后)의 사랑을 받는다. 그녀는 모든 일에 예를 다하며, 대국을 고려하여, 고태후는 그녀가 후궁으로서의 기준에 가장 부합한다고 여긴다. 고태후가 적극 힘을 써서, 20살의 맹씨는 당시 16살의 송철종과 혼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된다. "원우황후(元祐皇后)"로 불린다. 고태후는 송철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황제로서 현모양처를 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아껴주어라!" 당시 고태후는 혼잣말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그녀는 현숙한 여자이.. 2021. 12. 14.
문언박(文彦博): 북송 4명의 황제 아래에서 50년간 재상을 지내다. 글: 주효휘(周曉輝) 고대 왕조에서 제후나 재상에 오르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모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불가의 인과응보설에 따르면, 모두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북송때 이런 명신이 있다. 일생동안 송인종, 송영종, 송신종, 송철종의 네 황제를 모시는 동안 전후로 여러번 재상을 맡았고, 재상을 맡은 기간이 50년에 이르며, 평생 불법을 독실하게 믿어, 일찌기 10만명을 모아 함께 염불한 바 있다. 그 외에, 아주 장수하여 91세에 좌화한다. 병없이 편안히 죽는다. 그의 이름은 바로 문언박이다. 문언박(1006-1097), 자는 관부(寬夫), 산서 분주(汾州) 개휴(介休) 사람. 그의 조상은 성이 경(敬)이다. 나중에 후진의 고조 석경당(石敬瑭)의 이름을 피휘하여 '경'에서 문(文)으로 성을 고친다. 후진이.. 2021. 9. 17.
송인종(宋仁宗) 조정(趙楨): 천고제일인군(千古第一仁君) 글: 진동만(陳東晩) 서언 중화역사 상하 5천년동안 감히 '인군(仁君)' '명군(明君)'이라 칭할 수 있는 황제는 몇 되지 않는다. 진시황은 육국을 통일하였으나 '폭군'으로 불린다. 한고조 유방은 대한의 기업을 건립하였으나 시종 '비조진양궁장(飛鳥盡良弓藏)'으로 공신들을 참살한 오점이 있다. 대당성세 '정관지치'를 실현한 당태종도 안타깝게도 현무문사변의 악과를 벗어날 수 없고, 송태조 조광윤의 '진교병변' '황포가신' '배주석병권'은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했고, 앙문억무(仰文抑武)로 대송을 약국으로 만들었다. 진정 명군, 인군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송나라의 제4대황제 송인종 조정이다. 비극적인 출생 중국의 희곡중에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라는 것이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송인종 조정이다. .. 2021. 4. 17.
송진종(宋眞宗) 조항(趙恒): 송태종의 셋째아들인 그는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는가? 글: 노황설사(老黃說史) 송태종 조광의(趙光義)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왜 황장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고, 황삼자에게 넘겨주었을까? 황삼자 조항은 조광의의 장자도 아니고, 황후소생도 아닌데 어떻게 하여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을까? 송태조 개보9년(976년) 십월 십구일 밤,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그의 동생 조광의를 불러 술을 마시고, 함께 궁안에서 잠든다. 다음 날 새벽(양력 11월 14일), 조광윤은 만세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50세이다. 송태조가 붕어할 때, 효장황후는 급히 환관 왕계은(王繼恩)으로 하여금 황자 조덕방(趙德芳)을 입궁시켜 후사를 처리하게 한다. 그러나 왕계은은 곧바로 남부로 가서 조광의에게 알리고, 조광의가 급히 입궁하여 등극하니, 그가 송태종이다. 조광윤의 죽음과 조.. 2021. 4. 13.
송나라때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받은 인물은? 글: 용가독사(勇哥讀史) 이런 말이 있다: "생진태부(生晋太傅), 사시문정(死諡文正)"(살아서 태부에 오르고, 죽어서 문정의 시호를 받는다). 고대의 무수한 문인들에게 있어서, 사후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는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송나라는 문인을 존중한 시기였다. "만반개하품(萬般皆下品) 유유독서고(惟有獨書高)"(모든 것은 하품이고, 오로지 문관이 높다)을 부르짖던 왕조에서 몇명의 대신이 '문정'의 시호를 받았을까? 답안은 9명이다. 평균 34년에 한명씩 배출되었다. "문정"의 시호를 받은 9명의 대신은 사망한 시간을 기준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이방(李昉), 왕단(王旦), 왕증(王曾), 범중엄(范仲淹), 사마광(司馬光), 황중용(黃中庸), 채변(蔡卞), 정거중(鄭居中), 채심(蔡沈) 이.. 2020. 12. 18.
조옥반(趙玉盤): 송휘종 장녀의 비참한 일생 글: 왕덕항(王德恒) 송휘종의 장녀로서 그녀도 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일생은 너무나 비참했다. 북송원부3년(1100) 정월, 송철종 조후(趙煦)가 붕어한다.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 향태후(向太后)의 극력지지로 당시의 단왕(端王), 사공(司空), 소덕창덕군절도사(昭德彰德軍節度使)이었던 송휘종이 즉위한다. 송휘종이 등극한 후, 향태후가 군국대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던 궁녀인 정씨(鄭氏)를 송휘종에게 보낸다. 정씨는 송휘종이 즉위하기 전에도 자주 향태후의 명을 받아 그를 모신 바 있다. 지금은 정식으로 송휘종의 완의(婉儀)가 되었다. 그 해애 딸 조옥반을 낳는다. 그녀는 송휘종의 장녀이다. 북송 건중정국원년(1101) 정월, 향태후가 사망한다. 송휘종이 친정을 시작한다. 조옥반은 덕경공주.. 2020.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