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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金庸)의 부친이 총살당한 경위는...?

by 중은우시 2023. 2. 4.

글: 창산잡담(蒼山雜談)

1. "당송이래거족(唐宋以來巨族), 강남유수인가(江南有數人家)"

 

2000년초, 김용은 자신의 자전체 산문 <월운(月雲)>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산동에서 내려온 군대가 의관(宜官)의 고향으로 쳐들어왔고, 의관의 부친은 지주로 판정되어 농민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의관은 홍콩에서 삼일밤낮을 통곡했고, 반년동안 상심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부친을 죽인 군대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전중국에서 처형당한 지주는 수천수만에 이르고, 이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대변화였디 때문이다."

 

"의관"은 김용의 아명이고, 그의 부친 사수훈(査樹勛, 일설에는 사추경(査樞卿), 사하상(査荷祥), 사무충(査懋忠)이라 함)이 붙여준 것이다. 김용은 성이 김(金)이 아니고, 사(査)이며, 본명은 사량용(査良鏞)이다. 김용은 그의 필명으로, "용(鏞)"자를 둘로 나눈 것이다.

 

1924년 2월 김용은 절강성 해녕현(海寧縣) 원화진(袁花鎭)에서 태어난다. 해녕의 사씨집안은 현지에서 첫째, 둘째가는 명문집안이다.

 

사씨의 사당에는 공손하게 한쌍이 대련(對聯)이 걸려 있다: "당송이래거족(唐宋以來巨族), 강남유수인가(江南有數人家)" 이건 강희제(康熙帝)가 친필로 사씨집안을 위해 써준 대련이다. 강희의 어서(御書) 옆에는 사씨집안의 공명방(功名榜)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수십명의 각조대의 사씨집안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관직이 한림(翰林)에 이른 사람도 드물지 않다. 강희제때만 두 명이다. 한명은 강희제의 시종대신 사승(査昇)이고, 다른 한명은 한림원편수이며 저명한 시인은 사신행(査愼行)이다. 옹정제때는 예부시랑 사사정(査嗣庭, 사신행의 동생)이 있다. 당시 사씨집안은 "일문칠진사(一門七進士), 숙질오한림(叔侄五翰林)"이라고 불렸다.

 

김용의 조부 사문청(査文淸)은 1886년 진사에 합격하고, 강소성 단양지현(丹陽知縣)을 지내고, 나중에 정치적실적이 좋아 동지(同知)직함이 추가된다. 그는 해녕사가의 마지막 진사이다. 그의 슬하에는 사수훈 외에 두 명의 아들, 두 명의 딸을 더 두었다. 아주 큰 집안이었다. 사수훈은 1897년에 태어났고 집안의 셋째아들이다. 큰형은 청나라때의 수재(秀才)이고, 둘째형은 북경대학 국문과를 나온 인재였다.

 

사문청은 단양교안(丹陽敎案)으로 면직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한가하게 지낸다. 변고를 거친 후 사씨집안은 부친대에 이르러 이미 쇠락했다. 그러나 말라죽은 낙타도 말보다 큰 법이다. 사문청이 죽은 후, 어느 정도 가산과 전답을 남긴다. 김용이 출생하던 해에 사씨집안은 여전히 3,600무(畝, 1무는 666.7평방미터 즉 200평임)의 토지와 100여호의 전농(佃農, 소작인)이 있었다. 사수훈은 중국의 삼대교회대학중 하나인 진단대학(震旦大學)을 졸업했다. 그는 서양식교육을 받아 비교적 개명한 인물로 과도기에 '중서혼합'형의 인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윗대처럼 공부를 하는 전통을 이어가지 않고 상업에 종사한다.

 

22살에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해녕에 대래전장(大來錢莊)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항전기간, 대래전장은 포화에 잿더미로 변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때 실망한 후 더 이상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다시 일어나, 사씨집안의 전장 의장(義莊)을 경영한다.

 

2. 사수훈은 친척들을 도와주고, 교육사업을 한다.

 

사씨의장은 1825년에 건립된다. 구휼사업과 종친들을 도와주고, 교육사업을 했다. 사씨는 1,000무의 논을 일족의 의전(義田)으로 삼았으며, 사씨자손들은 그것을 조산(祖産)으로 여겨, 지방관청에 지방에 등기했다. 이들 의전은 상등의 좋은 땅이었고,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어도 수확이 잘 되었다. 매년 세금등 비용을 공제하고도 곡물 3,500석을 수확할 수 있었으며, 이것을 팔아서 현금으로 만든 다음 다시 관리인원이 쌀을 사서 매월 친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매번 추수때가 되면, 사수훈은 농사가 잘되었는지 여부를 따져서 전농들에게 소작료를 깍아주거나 면제해주었다. 그는 의장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어 용두각소학(龍頭閣小學)을 세워, 용산학당(龍山學堂)의 분교로 삼았다. 아이들은 무상으로 입학해서 공부했다. 같은 진(鎭) 김축장(金竺莊)의 가난한 선비의 아들 양덕거(楊德擧)가 진단대학에 입학한다. 그의 부친은 너무 흥분하여 심장병이 발작하여 죽고 만다. 사수훈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관가를 데리고 가서 좋은 관을 사서 사씨의 땅에 묘지를 쓰도록 나눠주고, 날짜를 잡아 안장하도록 해주고 비용은 모두 사씨의장에서 부담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양덕거에게 학비로 쓰도록 돈을 보내준다.

 

1914년, 사수훈은 19살의 서록(徐祿)을 처로 맞이한다. 서록은 유명한 시인 서지마(徐志摩)의 당고모이다. 즉 서록은 서지마의 부친 서갑여(徐甲如)의 당매(堂妹)이다. 서록은 사숙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 글을 알았을 뿐아니라, 시도 지었다. 그리고 사상이 개명하여 민주적이었다. 한가할 때면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독서는 그녀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사수훈과 서록은 애정이 깊었다. 전후로 5남2녀를 낳는다(즉 양갱(良鏗), 양용, 양호(良浩), 양동(良棟), 양옥(良鈺)의 다섯 아들과 양수(良繡), 양선(良璇)의 두 딸이다)

 

1937년, 일본군이 강남을 침입한다. 그의 고향도 폭격을 맞는다. 사수훈 부부는 일가족을 데리고 피난가는데, 서록은 급성이질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당시 13살의 김용은 아직 가흥(嘉興)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김용의 계모는 고수영(顧秀英)이다. 11살때, 고수영은 사씨집안에 시녀로 들어와서 처음에는 김용의 조모를 모셨다. 서록이 병사하고나서 만3년이 지난 1940년, 사수훈은 재혼을 하는데, 그보다 17살 어린 고수영이 그의 새 부인이 된다. 그녀는 전후로 양성(良誠), 양남(良楠), 양빈(良斌), 양근(良根)의 네 아들과 양기(良琪), 양민(良珉)의 두 딸을 낳는다.

 

고수영은 현모양처였고, 남편의 말을 잘 따르며 항상 겸손했다. 전부인과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차이없이 기르며 동등한 모친의 사랑을 준다. 해방초에 사수훈은 처형당한다.

 

1958년, 먹을 양식도 땔감도 없었던 시절에, 그녀는 거처하고 있던 2칸의 집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지주마누라가 반격을 하기 위해 재산을 팔았다"는 죄명으로 무고를 당하여 3일 밤낮을 두들겨 맞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자녀들에게 말했다: "무슨 고통이든 나는 참을 수 있다. 그저 너희를 어른으로 기르고 공부를 시켜서 돌아가신 너희 부친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고수영은 1989년에 사망하니, 향년 77세였다.

 

사수훈은 김용을 아주 사랑했고, 동시에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어느 한 해의 성탄절날, 그는 어린 김용에게 찰스 디킨스의 저작 <크리스마스캐롤>을 성탄선물로 준다. 이 책의 이야기는 냉혹한 수전노의 이야기였다. 한 성탄절날 밤에 수전노 스크루지는 이전에 그와 함께 일했던 죽은 사람의 귀신을 만난다. 귀신은 그에게 3명의 성탄요정이 그를 데리고 다닐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그가 3명의 성탄요정과 다닌 이야기를 기술한다. 이 이야기는 어린 김용에게 큰 영향을 준다. 성년이 되어서도 그는 이 책을 곁에 두었고, 매번 성탄절이 되면 꺼내서 몇 페이지씩 읽곤 했다.

 

사수훈은 아들이 밤늦게까지 책을 보고, 운동이나 놀이는 좋아하지 않아서, 체질이 허약한 것을 보고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자주 그를 데리고 야외로 놀러나갔다. 그를 데리고 나가서 연을 날리고, 자전거를 타게 했다. 그러나 김용은 그런 것에 흥미가 크지 않았다. 그저 부친이 시키니까 하는 것뿐이었다. 별로 소용이 없자, 사수훈은 여동생 사옥방(査玉芳)을 떠올린다. 그녀는 검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김용을 그녀에게 보내어 가르침을 받도록 한다. 사옥방은 자주 여협들과 모임을 가졌고, 김용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또한 무협소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중에 쓴 여러 권의 무협소설중 여러 여협들이 보여주는 검식의 명칭은 대부분 고모인 사옥방이나 그녀의 협우들에게 들은 것들이었다.

 

3. 등소평은 김용을 회견하면서 김용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단결해서 앞으로 나갑시다!"

 

신중국 성립초기, '진반(鎭反)'운동이 전국에서 요란하게 전개되었다. "살(殺), 관(關), 관(管)" 세가지를 동시에 사용했다.  권력을 아래로 내려보내어 어떤 지방에서는 마구잡이로 붙잡아서 마구잡이로 죽이는 현상도 벌어진다. 사수훈은 아들이 홍콩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해외와 관계있다'는 문제와 불법지주라는 죄명이 엮여서 조사를 받게 된다.

 

얼마 후, 사수훈은 "관(管)"의 명단에 들어간다. 1951년 1월이후, 위로부터 아래까지 반혁명분자에 대한 체포, 살인의 진도가 가속화된다. 그는 "관(關)"의 대상으로 승격된다. 진압인원은 마을 사람들을 조직해서 그의 죄행을 고발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선행을 해왔고, 촌민들과 우호적이었으며, 매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죄행을 고발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에 인근 마을의 잔비(殘匪)가 그가 총기를 몰래 숨기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리하여, 그는 "살(殺)"의 명단에 들어가게 된다. 그에게 덧씌워진 죄명은 "양식을 내놓지 않고, 토비를 숨겨주고, 간부살해를 도모했다"는 등이었다.

 

기실, "양식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인민정부는 양식을 징수했는데, 양식은 소작농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소작농이 스스로 납부했다. 사수훈의 집안에서 납부한 양식은 아주 적었다. 그리고 "토비를 숨겨주었다"는 것은 고수영의 동생(절강남부 산간지역의 잔비)가 그의 집에 며칠 숨어 있었던 것을 말한다. "간부살해를 도모했다"는 것은 그 권총으로 인하여 덧씌워진 죄명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김용의 큰누나 사량수는 그 권총의 진상을 말했다: "계모인 고수영의 동생이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되기 전날, 권총 한자루를 몰래 누나집의 후원에 있는 양식창고안에 숨겼다. 이 일을 사수훈 부부는 몰랐고,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고수영의 동생은 이 일을 자신의 동료에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1951년 4월 26일, 사수훈은 감옥에서 끌려나와 성명, 사진을 대조한 후, 의복도 갈아입히지 않고, 술과 받도 주지 않고, 형틀에 묶는다. 그리고 원화진에서 사수훈이 만든 용두각소학교의 운동장으로 끌고 간다. 운동장에 도착한 후, 4인1조로 즉시 총살형이 집행된다. 김용의 계모는 나중에 그 소식을 들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면서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남편의 시신은 운동장주변의 밭둑에 놓여 있었고, 시신의 아래는 피가 흥건했다. 그녀는 아들들과 시신을 집으로 가져와서 밤에 조용히 묻는다. 감히 봉분도 만들지 못했다.

 

고수영은 남편이 무고하다고 믿었고, 남편이 죽은 후 30여년동안 여러 곳에 호소를 하면서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뛰어다닌다.

 

1981년 7월 18일, 등소평이 김용을 회견한다. 그때 김용에게 사과하면서 미소를 띄고 말했다: "단결해서 앞으로 나갑시다!" 김용도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며 말했다: "사람이 황천에 가면 다시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됐습니다!"

 

등소평이 김용을 만난 후, 절강성 해녕현위, 현정부와 가흥시위 통전부, 시교판은 연합으로 조사팀을 조직하여 김용의 부친 사수훈의 사건에 대하여 재조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잘못 처리된 사건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해녕현인민법원은 원판결을 취소하고, 사수훈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명예가 회복된다.

 

1985년 7월 23일 해녕현 인민법원이 사수훈사건에 대하여 내린 <형사판결서>에 따르면, "원판결이 사수훈이 해방후에 양식을 내놓기를 거부하고, 토비를 숨겨주고, 간부살해를 도모하였으며,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파괴행위등 죄행을 저질렀다고 인정한 것은 모두 사실의 근거가 없다. 총기를 숨긴 건은 내용에서 원판결의 인정과 크게 차이가 있다. 본법정은 원판결이 사수훈에게 불법지주죄를 인정한 것은 성립될 수 없고, 사수훈을 사형에 처한 것은 잘못 판결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본법원 심판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해녕현 인민법정 1951년 4월 26일 134호형사판결을 취소하고, 사수훈에게 무죄를 선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