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109

남창기의(南昌起義)의 총지휘관을 비당원인 하룡(賀龍)이 맡은 이유는?

글: 옥미수(玉米穗)​1927년 8월 1일 발발한 남창기의는 중공당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 의미가 크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무력으로 대항한 첫번쨰 사건이며, 그후 20여년간 지속된 국공전쟁의 서막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남창기의 당시에는 국민당좌파의 기치를 내걸었고, 기의후에 건립된 혁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송경령(宋慶齡), 등연달(鄧演達), 장발규(張發奎), 하향응(何香凝)등 국민당원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그건 그저 내건 것에 불과했고, 진정 기의를 기획, 조직, 발동한 사람은 모조리 공산당원이다. 국민당좌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혁명위원회 위원중 한명인 장발규는 기의발발후 위대를 이끌고 기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기의를 막으려고 시..

진백달(陳伯達) vs 섭영진(聶榮臻): 누가 부평(阜平)에서 모택동(毛澤東)을 구했을까?

글: 옥미수(玉米穗)​진백달이 만년에 회고록을 썼다. 그의 아들 진효농(陳曉農)이 기술편찬하여 이라는 책으로 냈다. 이 책의 한 장면은 진백달이 모택동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진백달은 이렇게 회고한다: 1948년 모택동이 하북성 부평현에 있을 때, 하루는 국민당 비행기가 부평의 상공으로 날아왔다. 진백달은 비행기엔진소리를 들은 후,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급히 모택동의 거처로 달려가 모택동에게 말했다: "비행기가 머리 위에 있습니다. 빨리 떠나야 합니다!" 모택동은 원래 어떡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진백달이 그렇게 말하자, 바로 경위원과 건물을 나갔다. 모택동이 건물을 나간 후, 진백달은 비행기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고의로 마당에 서서 떠나지 않았다. 모택동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소..

장춘참안(長春慘案): 수십만명이 굶어죽은 죽음의 도시

글: 가람(歌藍)2016년 8월 23일​도쿄의 일본학자 엔도 호마레(遠藤譽)가 작년 저서를 통해 전중공지도자 모택동(毛澤東)이 항전기간 일본과 결탁한 역사기록을 폭로한 후, 1984년 그녀가 일본에서 출판한 에서 그녀가 중국 장춘에서 겪은 도시포위의 고난을 회고한 책이 다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의 영문판은 으로 8월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미국의 싱크탱크 2049연구소의 초청으로 워싱턴으로 가서 강연하기도 했다.​는 1941년 중국 장춘에서 태어난 도쿄복지대학 국제교류센터 주임 엔도 호마레 교수가 그녀가 중국에서 겪은 일본의 중국침략,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탄생등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회고한 것이다. 특히 1948년 공산군이 장춘을 포위하면서, 국공내전의 총탄, 도시포위봉쇄의 기근, 시체더..

2차대전시기 진실한 중국: 저항파가 많았을까, 협력파가 많았을까?(2)

글: 허검홍(許劍虹)​항전역사를 되돌아보면, 국군의 저항은 확실히 용맹했고, 중국군민의 희생은 확실히 참중했다. 다만 진정한 저항자는 엄격히 말해서 소수중의 소수이다. 국군사망총수는 320만이다. 당시 전국인구 4억을 놓고 보면, 실제 희생자는 1/100도 되지 않는다. 만일 다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본침략에 희생된 민중의 수량을 더해보면, 1,500만 내지 3,500만이다. 역시 1/10이 되지 않는다.​대후방은 제외하고 계산한다면, 즉 중경국민정부통치지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협력자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필자가 인터뷰한 항일공군전의 영웅이자 중앙항공학교 제5기졸업생인 장광명(張光明)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의 공항주변에는 자주 일반백성이 쏘는 신호탄이 일본폭격기에 목표를 알려주곤 했다는 ..

2차대전시기 진실한 중국: 저항파가 많았을까, 협력파가 많았을까?(1)

글: 허검홍(許劍虹)​ 올해 필자는 Hoover Institution 근대중국대만컬렉션의 큐레이터인 린샤오팅(林孝庭, Hsiao-ting Lin)의 초청을 받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중국대만컬렉션에서 활동했다.​후버연구소는 중국국민당의 "해외당사관(海外黨史館)"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찌기 장개석, 장경국의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으며, 작년에 장씨집안과 차이잉원정부(蔡英文政府)간에 합의를 체결해서, 장개석과 장경국의 일기를 대만으로 돌려받은 바 있다. 당연히 선결조건은 후버연구소에 장개석 및 장경국일기의 영인본을 남겨두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양안정권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정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장개석, 장경국은 중화민국의 국가원수로, 그들의 일기가 대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

최강의 "조가인(赵家人)": 조동(赵东), 조래(赵来), 조덕(赵德), 조회(赵怀)

글: 조대부(赵大夫)​"조가인"이라는 말은 이미 유행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권력귀족과 그 직계친족을 공격할 때 사용하고 있다. 우리들 백가성의 첫번째에 위치한 조씨집안의 후인들은 얼굴이 뜨거워지고, 미안해지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억울해 죽을 지경이다!​"조가인"이라는 말의 기원​"조가인"이라는 단어는 대륙인터넷의 유행어이다. 널리 체제내의 고위관료, 기관내의 고위층 및 그 가족들, 체제와 관계가 밀접한 기업가, 부호, 예술가 및 그 가족들을 가리킨다. 다만 평상시에는 홍색권력귀족계층을 주로 가리킨다.​알려진 바에 따르면, 2015년 12월, ​万科)바오능(宝能)분쟁: 문앞의 야만인, 문뒤의 조가인>이라는 글이 바로..

중화민국의 12개 직할시(直轄市)

글: 민초사운(民初思韻) "직할(直轄)"은 고대에 "직예(直隸)"라고 불렀다. '직예제'는 송(宋)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 북송은 "로(路)"를 성급(省級)행정단위로 삼았다. 23로(路)를 설치하는 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부(府)가 있었다. 예를 들면 북경의 수도인 개봉부(開封府)이다. 1946년, 국민정부는 '헌법'에서 여러번 '직할시'를 언급한다. 그러나, 제11장의 '지방제도'에는 단지 '성(省)', '현(縣)'만 있고, 직할시와 지방(서장)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후 공문서에서는 "원할시(院轄市)"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직할시는 직접 사용되지 않는다. 1921년 7월 북경정부가 반포한 에서 경도시(京都市)는 내무부가 직접 감독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직접 감독하는..

대일항전시기 3차례의 위기순간

글: 양천석(楊天石) 첫번째 위기순간은 송호(淞滬)전투에서 패배하고 남경(南京)이 함락된 때였다. 국민당 고위층의 대다수가 주화파(主和派)였다. 송호항전은 1937년 8월 13일부터 시작한다. 국민정부는 75만의 군대를 모아서 3개월간 전투를 벌인다. 국민정부로서는 당시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한 것이다. 전국각지에서 군대를 상해로 보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다. 그러나 결정이 성급하게 이루어졌고, 지휘가 체계적이지 못하여 결국 패전하고 만다. 일본군은 군사상식을 뛰어넘어 혈전을 벌인 후, 전혀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남경으로 진격한다. 12월 13일 남경을 점령하여, 국민정부는 수도가 함락된다. 12월 15일, 국민정부는 고급간부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에서는 주화파와 주전파가 격렬하게 논쟁을 ..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1)

글: 하월명(賀越明) 2012년 8월 23일은 당납 선생의 기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꼬박 2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납"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인방"이 타도되면서, 나라를 떠난지 오래되고 이름없이 살아가던 그가 다시 중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보통민중들이 화제로 올리는 인물이 되었다. 일찌기 "사랑때문에 목숨을 버리려 했다" 1970년대말부터 현재까지, 신문잡지에는 당납을 소개하는 글이 적지 않았다. 수가 많아서 일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이들 글 중에서 이전에 당납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몇몇 언론종사자들의 회고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포풍착영(捕風捉影)하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베낀 수준이었고, 적지 않은 글들은 ..

"중공특과(中共特科)": 비밀조직의 진실한 이야기

글: 원천(源泉) 오늘 이야기나눌 것은 역사상의 "중공특과"이다. 이 조직은 중국공산당사에도 애매모호하게 기록한 신비스러운 조직이다. 공산당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소련이 아직 설립되기 전에, 볼세비키당은 건립초기 심각한 생존위기를 맞이한다. 내부의견이 분열되고, 반대당은 강력했으며, 여러 방면에서 짜르체제를 옹호하는 전통역량이 있었다. 이때 레닌의 주도하에 볼셰비키당에는 "체카"라는 특무조직을 두어, 암살과 테러활동을 벌이는데, 극히 잔혹하고 극단적인 수단으로 반대파와 경쟁상대를 제거한다. 최종적으로 공산세력이 집권당이 된다. 그리고 소련공산당을 그대로 복제한 중국공산당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대륙의 저명한 다큐멘터리작가 왕판(王凡)이 최근 출판한 에서 여러 당사자들이 직접 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