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111

항전시기 중국공산당은 전쟁경비를 어떻게 마련했을까? 글: 초재사숭(招財史崇)​1935년 가을 섬북의 오기진(吳起鎭)​한 무리의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사람들이 피로한 발걸음으로 힘들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나고 있었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피난하는 피난민들처럼 보였고, 보무당당한 군대로 보이지는 않았다.​그러나, 이런 무리가 얼마 후 중국혁명의 대들보가 된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로 이곳에 왔는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들이 어떻게 하여 나중에 그렇게 굴기하게 되었을까이다.​이 이야기는 여러해가 지난 이후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1949년 북경​모택동은 천안문성루에 올라,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고 선포한다.​아래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2024. 12. 31.
정강산(井岡山)시기, 모택동과 주덕간의 갈등과 충돌이 있었던 이유는...? 글: 옥미수(玉米穗)​주덕(朱德)이 군대를 이끌고 처음 정강산(井岡山)에 올랐을 때, 모택동과의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다. 이는 많은 당사자료에서 모두 언급하거나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기술방법은 비교적 은회(隱晦, 주요부분을 가리고 명확하지 않게 하다)하고, 어떤 때는 간략하게 한두마디로 지나간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다만, 중공 초기의 고위장령인 공초(龔楚)가 쓴 에는 주덕과 모택동간의 충돌과 갈등의 구체적인 사건 및 그 원인을 비교적 상세하게 회고하고 기술해 놓았다. 공초는 또한 그 본인의 당시 주덕, 모택동 두 사람의 성격차이 및 능력등에 대한 생각도 적어놓았다. 공초에 다르면, 1928년 5월부터 10월까지, 주덕과 모택동간에 다음과 같이 몇 차례의 .. 2024. 12. 29.
남창기의(南昌起義)의 총지휘관을 비당원인 하룡(賀龍)이 맡은 이유는? 글: 옥미수(玉米穗)​1927년 8월 1일 발발한 남창기의는 중공당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 의미가 크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무력으로 대항한 첫번쨰 사건이며, 그후 20여년간 지속된 국공전쟁의 서막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남창기의 당시에는 국민당좌파의 기치를 내걸었고, 기의후에 건립된 혁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송경령(宋慶齡), 등연달(鄧演達), 장발규(張發奎), 하향응(何香凝)등 국민당원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그건 그저 내건 것에 불과했고, 진정 기의를 기획, 조직, 발동한 사람은 모조리 공산당원이다. 국민당좌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혁명위원회 위원중 한명인 장발규는 기의발발후 위대를 이끌고 기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기의를 막으려고 시.. 2024. 11. 10.
진백달(陳伯達) vs 섭영진(聶榮臻): 누가 부평(阜平)에서 모택동(毛澤東)을 구했을까? 글: 옥미수(玉米穗)​진백달이 만년에 회고록을 썼다. 그의 아들 진효농(陳曉農)이 기술편찬하여 이라는 책으로 냈다. 이 책의 한 장면은 진백달이 모택동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진백달은 이렇게 회고한다: 1948년 모택동이 하북성 부평현에 있을 때, 하루는 국민당 비행기가 부평의 상공으로 날아왔다. 진백달은 비행기엔진소리를 들은 후,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급히 모택동의 거처로 달려가 모택동에게 말했다: "비행기가 머리 위에 있습니다. 빨리 떠나야 합니다!" 모택동은 원래 어떡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진백달이 그렇게 말하자, 바로 경위원과 건물을 나갔다. 모택동이 건물을 나간 후, 진백달은 비행기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고의로 마당에 서서 떠나지 않았다. 모택동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소.. 2024. 11. 2.
장춘참안(長春慘案): 수십만명이 굶어죽은 죽음의 도시 글: 가람(歌藍)2016년 8월 23일​도쿄의 일본학자 엔도 호마레(遠藤譽)가 작년 저서를 통해 전중공지도자 모택동(毛澤東)이 항전기간 일본과 결탁한 역사기록을 폭로한 후, 1984년 그녀가 일본에서 출판한 에서 그녀가 중국 장춘에서 겪은 도시포위의 고난을 회고한 책이 다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의 영문판은 으로 8월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미국의 싱크탱크 2049연구소의 초청으로 워싱턴으로 가서 강연하기도 했다.​는 1941년 중국 장춘에서 태어난 도쿄복지대학 국제교류센터 주임 엔도 호마레 교수가 그녀가 중국에서 겪은 일본의 중국침략,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탄생등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회고한 것이다. 특히 1948년 공산군이 장춘을 포위하면서, 국공내전의 총탄, 도시포위봉쇄의 기근, 시체더.. 2024. 10. 25.
2차대전시기 진실한 중국: 저항파가 많았을까, 협력파가 많았을까?(2) 글: 허검홍(許劍虹)​항전역사를 되돌아보면, 국군의 저항은 확실히 용맹했고, 중국군민의 희생은 확실히 참중했다. 다만 진정한 저항자는 엄격히 말해서 소수중의 소수이다. 국군사망총수는 320만이다. 당시 전국인구 4억을 놓고 보면, 실제 희생자는 1/100도 되지 않는다. 만일 다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본침략에 희생된 민중의 수량을 더해보면, 1,500만 내지 3,500만이다. 역시 1/10이 되지 않는다.​대후방은 제외하고 계산한다면, 즉 중경국민정부통치지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협력자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필자가 인터뷰한 항일공군전의 영웅이자 중앙항공학교 제5기졸업생인 장광명(張光明)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의 공항주변에는 자주 일반백성이 쏘는 신호탄이 일본폭격기에 목표를 알려주곤 했다는 .. 2024.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