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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75

"양주십일(揚州十日)": 청군은 정말 80만명을 도살했는가? 글: 초하간오락(初夏侃娛樂)​1645년 5월, 청군이 양주성(揚州城)을 함락하고, 대도살을 진행한다. 일본에 전해지는 에 따르면, "분시부(焚屍簿)에 기록된 사람을 조사하니 모두 팔십여만이다. 우물에 빠트리거나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문을 걸어닫고 목을 매고 불지른 사람은 포함하지 않았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도 포함하지 않았다." 그 뜻은 단순히 발견된 시체만 팔십여만이라는 것이다.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숫자는 청나라말기에 많은 반청인사들에 의하여 선전되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양주십일"은 확실히 있었다. 그러나 숫자는 믿을만한 것일까?​양주에 80만인구가 있었을까?​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양.. 2024. 10. 4.
"만주(滿洲)" (3): 민족혁명 배경하의 "배만(排滿)"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3​의 체결과 더불어, "중화민족은 가장 위험한 시기가 도래했다" 내우외환의 곤경에 혁명당인들은 보편적으로 폭력혁명만이 철저히 청나라 통치를 전복시키고,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그들은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칠 뿐아니라, 사상등 분야에서 일련의 "배만(排滿)" 작업을 하게 된다. ​첫째, "만주는 중국이 아니다"라는 점을 논증하다.​청나라 통치를 전복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혁명당인들은 '만주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끼친 악랄한 죄악을 상세하게 드러낼 뿐아니라,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예를 들면, 추용(鄒容)은 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으로.. 2024. 7. 22.
"만주(滿洲)" (2) : 17세기 서양인들이 본 '만주족'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2​17세기에 들어선 이후, "만주굴기"와 명청왕조교체를 위시한 일련의 동아시아사건은 유럽각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이런 배경하에서 중국에 와 있던 유럽선교사들은 자신의 견문을 종합하여, "만주굴기"와 관련돤 저작을 적지 않게 남겼고,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왔다.​서양인이 그린 아담샬과 순치​첫째, 만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17세기 이전까지 유럽선교사들의 글에 나오는 "타타르인(韃靼人)"은 주로 장성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수시로 명나라변경을 침범한 몽골인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백산흑수(장백산, 흑룡강)에 거주해오고 있던 여진인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예를 들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저술에는 거의.. 2024. 7. 22.
"만주(滿洲)"(1) : 만주의 유래와 뜻은?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미국학자 엘리엇(Mark C. Elliott)는 이라는 저서를 통해 만주족의 민족특성을 '만주의 길(The Manchus Way)'로 설명했다.소위 "만주의 길"은 만주 최초의 생활방식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이민족왕조의 방식과 비교하자면, 요, 금, 원과 다른 방식이다. 기본요소는 마술(馬術), 궁술(弓術), 만주문자와 소박한 풍속이다.​이는 모두 청나라조정이 강조한 것이고, 만주인의 만주화를 강화한 것이다. 어떤 때에는 다른 약간의 특징도 있다. 예를 들어, 조상을 공경하고, 황제에 충성하는 것을 '용감한 품성'이라고 보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명과 복식도 있다.​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무엇이 "만주"인가? 글자 자체로 볼 때 "만주"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내포.. 2024. 7. 22.
산채(山寨)에서 제국(帝國)까지: 청나라는 어떻게 여진통일을 완성했는가? 글: 기사석금(記史惜今) 여진족은 중국역사상 위대한 민족이다. 일찌기 두번이나 중원으로 들어와 정권을 잡고, 금(金), 청(淸) 두 왕조를 건립한다. 오랫동안, 여진족은 부락들이 난립하는 상태였다. 일단 여진부락이 통일되면, 아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1583년, 누르하치가 거병한 이후, 홍타이시(皇太極, 청태종)이 여진부락을 철저히 정복할 때까지, 후금은 반세기를 들여 마침내 통일을 완성한 것이다. 이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 건주여진(建州女眞) 각부의 통일 명나라후기 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海西女眞)과 야인여진(野人女眞)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건주여진부터 얘기해보자. 건주여진의 기원은 흑룡강 오국성(五國城)일대로 금(金)나라의 핵심지역이다. 명나라초기 도문.. 2023. 3. 2.
미얀마는 왜 망명한 남명(南明) 영력제(永歷帝)를 받아주었다가 2년후 청나라에 넘겨주었을까? 글: 자귤(紫橘) 남명의 영력제가 멸망한 가장 관건은 바로 미얀마의 배신이었다. 주수지난(咒水之難)을 일으켜 영력제를 수행하던 신하들이 모조리 피살당하고, 영력제도 생포된다. 곧이어 오삼계(吳三桂)에게 넘겨져서 죽임을 당한다. 이정국(李定國)은 그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같은 달에 병사하고 만다. 대명은 철저히 부흥의 기회를 잃었다. 그렇다면, 미얀마는 왜 영력제를 받아주었다가 다시 그를 팔아먹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청군이 미얀마로 다가오면서 영력제를 내놓으라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고 자부했던 건륭제마저도 미얀마를 공격하여 격패시키지 못했던 것을 보면 미얀마군은 환경적인 우세를 이용하면 청군을 이기지 못한다고 할 수 없었다. 영력제를 돌려보낸 것은 완전히 미얀.. 2022.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