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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호설암)6

호설암 파산의 진정한 원인 글: 장학근(張學勤) 호설암은 1883년 12월초에 파산했다. 원인에 대하여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즉, 호설암은 서양인과 잠사무역전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나라말기 진대경(陳代卿)이 쓴 <신절재문존(愼節齋文存)>에 따르면, "호설암은 매년 생사를 켜기전이 미리 사두.. 2013. 10. 13.
호설암(胡雪巖): 그저 황음한 졸부였다 글: 왕위(王偉) 호설암(1823-1885)의 이름은 광용(光鏞)이고 자가 설암이다. 안휘 적계(績溪)사람이며 호경여당(胡慶餘堂)의 창시자이다. 그는 빈한한 출신으로 장사에 재능이 있었고, 처세술에 능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일대의 거상으로 불리웠다. 서태후는 그에게 황마괘(黃馬褂)를 내리고 “포정사.. 2010. 12. 24.
호설암(胡雪巖)의 자손들 글: 장영구(張永久) 호설암은 생전에 처첩을 아주 많이 두었고, 구체적으로 몇명인지 구체적인 숫자를 말하기는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13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3남5녀의 자식을 두었다. 장남 호초삼(胡楚三)은 16세때 늠생(廩生)이 되었는데, 19세때 병으로 요절하고, 자손을 두지 못했다. 차남 호함.. 2009. 11. 27.
누가 호설암을 도태시켰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일홍취사(一紅就死)" 붉어지면 바로 죽는다.(붉어진다는 것은 인기를 얻는다는 뜻도 있음) 이것은 털게(螃蟹)법칙이다. 중국도대 상재(商才)의 도태법칙이기도 하다. 흑도와 백도를 아우러던 호설암(胡雪巖)은 중국상인의 우상이다. 후인들은 그가 권력과 돈을 한 손에 거머쥐고, .. 2009.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