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32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 티벳(西藏)으로 귀양간 고려왕

글: 자귤(紫橘)​고대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오호난화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발생한다. 그후 중원왕조는 거의 조선반도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원(元)나라는 예외이다. 조선반도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정권이었지만, 원나라의 번속국으로 쌍방은 생구(甥舅, 조카와 외삼촌)관계를 건립한다. 다만, 원나라는 언제든지 조선반도의 일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원영종(元英宗)이 고려(高麗)의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을 티벳(西藏)으로 유배보냈던 일이다. 원영종이 왜 일국의 왕을 유배보냈을까?​최초의 몽골-고려혼혈왕​고려의 충선왕 왕장의 부친은 충렬왕(忠烈王) 왕거(王昛)이다. 모친은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 원성공주(元成公主) 쿠틀룩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이다. 왕장은 1274년에 태어났으..

방국진(方國珍): "원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방국진이다(亡元者, 國珍也)"

글: 서북낭(西北狼)​청나라때의 명사연구자인 부몽린(傅夢麟)은 원나라말기 농민반란을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원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바로 방국진이다(亡元者, 國珍也)"​그렇다. 부몽린이 보기에, 원나라에 가장 크게 해를 끼친 자는 진우량(陳友諒)도 아니고, 장사성(張士誠)도 아니며, 더더구나 주원장(朱元璋)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나라말기 난세에 존재감이 별로 없는 소군벌 방국진이었던 것이다.​더욱 이해되지 않는 점이라면, 반원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었던 방국진은 원말의 난세를 무사히 넘기고, "명태조 주원장의 통치하에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면서, 자손을 보호하고, 부귀복록을 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남백만병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주원장이 왜 유독 자신과 천하..

명나라의 영왕(寧王), 원나라의 아릭부케: 후손의 백년후 복수...

글: 자귤(紫橘)​명나라때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는 영왕(寧王) 주권(朱權)에게 나중에 천하를 나누어갖자고 유혹하여 반란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주체는 반란에 성공한 후, 영왕계를 탄압한다. 그리하여 영왕계통은 모두 복수를 꿈꾸었다. 다만 진정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명무종(明武宗)때의 주신호(朱宸濠)인데, 그는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손쉽게 진압당했다. 그런 일이 이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원나라때도 실의한 왕족 아릭부케(阿里不哥)가 있었다. 당시 아릭부케는 쿠빌라이(忽必烈)와 황위를 다투었고, 실패한 후 그 가족은 탄압을 받고 서북으로 흘러들어간다. 나중에 원나라가 망하고 북으로 도망쳤을 때, 아릭부케의 자손은 마침내 기회를 잡았고, 포어아해(捕魚兒海)의 전투이후 아릭부캐의 자손인 이수데르(也速迭兒..

유흑마(劉黑馬): 원나라때 가장 성공한 한인(漢人), 몽골인은 왜 그를 신임했을까?

글: 자귤(紫橘)​TV드라마 에 나오는 유로(劉路)가 매국노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일본국적을 취득한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대화민족(大和民族)이 아니다보니, 일본인들은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원(元)나라때의 한족 세후(世侯)집단도 독특한 존재였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한족이지만, 그들은 내심이나 정신적으로 몽골인이었다. 정치적인 대우에서, 몽골인들은 그들에게 한 지방의 군정대권을 쥘 수 있도록 해주고, 대대로 세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 세후(世侯)중 우두머리는 유흑마이다. 그의 가족은 가장 먼저 몽골에 귀순한 한족이고, 계속하여 몽골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단(李璮)의 난은 양자간의 친밀한 관계를 가..

동문병(董文炳): 쿠빌라이가 형님으로 부른 한족...

글: 자귤(紫橘)​고등학교 교과서에 따르면 원나라는 4등인제도(四等人制度)를 실행했다. 그러나 실제상 이 4등인이 각족의 고위층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고, 이는 일반인에 대한 제한이었다. 그리고 이 사등인제가 정식의 제도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의문이 있다. 1등인인 몽골인의 하층은 모두 착취를 당했고, 그들도 원나라에 원한을 가졌다. 그래서 명나라초기의 삼천영(三千营), 대내()의 등양사위(腾骧四卫)는 모두 몽골인이었고, 매번 초원을 토벌할 때 그들이 가장 앞장섰다. 마찬가지로 3등인 한인의 고위층도 호화사치스럽게 살았고, 원나라황제의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쿠빌라이가 '동대가(董大哥, 대가는 큰형님이라는 의미임)'로 부른 동문병이다.​농민에서 관료로​동문병의 동씨집안..

징기스칸은 중국인인가?

글: 자미도인(紫薇道人) 이건 원래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천고의 난제로 만들어 버렸다. 징기스칸이 중국인인가 아닌가? 답은 원래 간단하다. 중국의 국가구조는 영국과 유사하다. 몽골인과 중국의 관계는 스코틀랜드인과 영국의 관계와 비슿하다. 스코틀랜드인은 영국인이기도 하면서 영국인이 아니기도 하다. 그건 어느 영국을 가리키는지를 봐야 한다. England인지 United Kingdon인지? 징기스칸이 중국인인가 아닌가? 중국인일 수도 있고, 중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 원래 중국은 해석권과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영토를 확장하고 싶을 때는 징기스칸을 중국인이라고 할 수 있고, 전략수축때는 징기스칸을 중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리한 조건을 공산당은 스스로 깨트려버린다. 공산당..

아난다(阿難答): 중국역사상 유일한 무슬림황제가 될 뻔한 인물.

글: 자귤(紫橘) 이슬람교는 중국의 중요종교중 하나이다. 회족은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이슬람교는 오늘날 서북지구에서 극히 번성하고 있지만, 원나라이전에 서북은 실제로 '천리불국(千里佛國)'으로 칭해질 정도로 불교가 전파되는 중요한 교량이었다. 왜 불교가 서북에서 쇠퇴하고, 왜 이슬람교가 서북에서 크게 흥성하게 되었을까? 관건적인 인물은 몽골의 귀족인 아난다(阿難答)이다. 역사상 중국황제는 한족황제이건 소수민족황제이건, 대다수가 불교 혹은 도교를 신봉했다. 특히 몽골인은 불교를 가장 독실하게 믿었다. 다만 아난다는 몽골귀족중의 특이한 사례이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었고, 서북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한 중요인물이다. 그리고 하마터면 중국역사상 유일한 무슬림황제가 될 뻔했었다. 1. 천리불국에서 이슬람교로. 지리..

명나라 초기의 십대맹장(十大猛將)

글: 주팔피(朱捌皮) 중국역사상 명나라의 명장은 당나라에 바로 다음 간다. 그리고, 명나라초기는 명장이 가장 많이 배출된 시기이다. 그중 10위내에 드는 명장들은 누구일지 살펴보기로 하자. 10위 경병문(耿炳文) 장흥후(長興侯). 주원장(朱元璋)의 호주이십사기(濠州二十四騎)중 한명. 수성(守城)의 제일명장. 혼자서 장흥을 십여년이나 지켜내면서, 장사성(張士誠)의 진격을 버텨내어, 주원장이 서쪽에서 진우량(陳友諒)과 천하를 놓고 싸우는데 배후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었다. 9위 탕화(湯和) 신국공(信國公). 주원장의 죽마고우로 반란의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한 인물임. 나중에 주원장을 따라 집경(集慶)을 점령하고, 진강(鎭江)을 공격한다. 전공으로 통군원수(統軍元帥)로 승진한다. 나중에 상주(常州),..

원세조 쿠빌라이: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한 원나라

글: 황보용(皇甫容) 원나라는 원세조 쿠빌라이가 창건했고,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강역이 유라시아에 걸쳤던 왕조이다. 쿠빌라이는 일찌기 몽케칸의 명을 받아, 막남(漠南)의 한지(漢地)를 관할했다. 그때 사건담당관리인 아로와적(牙魯瓦赤)과 부지아(不只兒)등은 밀린 세금을 납부하도록 추궁하다가 하루에 28명을 죽인 적이 있다. 쿠빌라이는 이들을 질책하며 이렇게 말한다: "무릇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반드시 상세하게 조사한 후에 비로소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 지금 하루에 28명이나 죽였으니 분명히 무고하게 죽은 자가 있을 것이다. 장형에 처해도 될 경우에 참살을 한다면 그게 무슨 형법인가?" 당시 부지아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1260년,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를 승계하고 형법을 개혁한..

원순제(元順帝)는 어떻게 중원에서 쫓겨났는가?

글: 문재봉(文裁縫) 토토(脫脫)가 축출되어 죽임을 당한 후, 원순제는 철저히 추락한다. 그는 하마(哈麻)에게 고혹되어 성색견마(聲色犬馬)에 빠진다. 궁중에 청녕전(淸寧殿)을 짓고, 청녕전의 주위에 백화궁(百花宮)을 지어, 매 5일마다 궁을 옮긴다. 조정은 황태자인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答臘)에게 맡겨버린다. 지정16년(1356), 하마는 원순제가 황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계획을 꾸민다. 그러나, 그의 매부인 투루테무르(禿魯帖木兒)가 원순제에게 밀고하여, 원순제가 대노하여, 하마를 쫓아낸다. 그후에 다시 박불화(朴不花), 삭사감(搠思監)이 조정을 교란시킨다. 역사서에는 "당시 천하에 사고가 많았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밖으로는 반란군이 일어나 강역이 날로 줄어들었고, 안으로는 국고가 텅비어, 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