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90

왕치산(王岐山): 국민당장교의 아들인 그는 어떻게 태자당이 되었나?

글: 두정(杜政)​10월 12일, 대륙의 대외선(大外宣)기능을 지닌 홍콩화통사(和通社)는 전 국가부주석 왕치산이 체포되었고, 그의 애인인 판빙빙은 미국에 7천여억달러의 예금을 가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또한 왕치산의 처남으로 전 중공부총리, 정치국상이 야오이린(姚依林)의 아들 야오칭(姚慶)이 2년전에 체포되었고, 왕치산의 몰수된 자산이 수조위안에 달한다는 등등의 내용도 있었다.​인터넷을 검색해보면, 화통사는 유엔경제사회국(UNDESA) 글로벌포럼 대변인사무실의 대외관방매체로 나온다. 그리고 그 산하의 은 "홍콩화통사가 주관하는 아시아에서 영향력이 아주 큰 저명한 매체로 전국양회를 취재하는 정기간행물"이라고 되어 있다. ​이 웹사이트의 내용은 친중국으로 '시진핑경제사상'를 치켜세추고, 중공의 전국'양회'를 ..

친셩샹(秦生祥): 시진핑의 심복으로 볼 수 있는가?

글: 호해(胡亥)​해외여론은 중공정치사건과 인물에 대하여 토론할 때, 자주 역사배경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석하여, "관공전진경(關公戰秦瓊, 관우는 삼국시대인물이고, 진경은 당나라때 인물이어서 싸울 수가 없음)"같은 오판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최근 전 해군정위(海軍政委) 친셩샹(秦生祥)이 잡혀가서 조사받는다는 소문과 관련하여, 해외매체는 보편적으로 친셩샹이 시진핑이 발탁한 심복측근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인식이다. 사실상, 친셩샹은 시진핑의 적계(嫡係)가 아니로, 장쩌민(江澤民)의 심복인 자팅안(賈廷安)의 수하이다. ​친셩샹은 일찌기 북경군구 부정위 차오허칭(曹和慶)의 비서를 지냈고, 이어서 38군사정위(38軍師政委), 북경군구 정치부 조직부장등의 직을 맡는다. 그후 총정치..

후춘화(胡春華)의 재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 이정요(李淨瑤)​전 중공황태자이자 후진타오(胡錦濤)의 격대지정후계자인 후춘화가 최근 들어 자신만만하게 나타나서 내몽골을 시찰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분석한다: 후춘화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내가 돌아왔다"고 드러내는 것은 강력하게 복귀했다는 것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르게 분석한다. 후춘화가 재등장한 것은 분명 왕후닝(王滬寧)의 음모일 것이라고.​중국의 관영매체보도에 따르면,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전국정협 부주석 후춘화는 전국정협농업및농촌위원회 특별시찰단을 이끌고 내몽골을 시찰했다.​9월 9일, 내몽골자치구당위서기 쑨샤오핑(孫紹騁), 자치구당위부서기, 자치구인민정부주석 왕리샤(王莉霞), 자치구정협주석 장얜쿤(張延昆)이 후허하오터에서 후춘화를 맞이한다. ​해외의 시사평..

송빈빈(宋彬彬) 배후의 인물들....

글: 원릉(袁凌)​송빈빈, 그녀는 문화대혁명기간동안 송요무(宋要武)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의 원로 송임궁(宋任窮)의 딸이다. 문혁기간 저명한 홍위병으로 북경의 "홍팔월(紅八月)"기간동안 모택동에게 홍수장(紅袖章)을 채워주는 사진때문에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문혁기간 북경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의 홍위병 지도자였으며, 2024년 9월 16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송빈빈 배후의 사람을 알아야, 비로소 문혁배경하의 송빈빈의 죄와 벌을 알 수 있다.​1966년 8월 18일, 송빈빈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의 팔에 수장을 채워주었고, 모택동이 "빈빈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그 빈이냐"고 묻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무가 필요하다(要武嘛)"고 말하자 그녀는 그후 이름을 "송요무..

시중쉰(習仲勛)이 말년에 12년간 선전(深圳)에 거주한 내막은...?

글: 왕우군(王友群)​2023년 10월 15일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의 탄생110주년 기념일이다. 중국대륙에서는 여러 기념활동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시중쉰이 말년에 왜 12년간 선전에 거주했는지라는 이슈를 다뤄보기로 한다.​시중쉰은 중공의 제1대, 제2대 집단지도성원이다. 모택동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국무원부총리 겸 국무원 비서장이었다. 등소평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중공정치국위원, 전인대 부위원장이었다.​1988년 4월, 시중쉰은 제7대 전인대 부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퇴임'한다.​시중쉰이 선전으로 유배당하다.​전 전임대 법률공작위원회 연구실주임이었떤 가오카이(高鍇)의 회고에 따르면, 1990년 10월 30일, 시중쉰은 마지막으로 전인대 상무위원..

리위안차오(李源潮)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글: 채신곤(蔡愼坤)​18대에 만일 쌍리(雙李, 리커창과 리위안차오)가 승계하였더라면,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경제시장화는 아마도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17대이전에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 시진핑(習近平)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다. 단지 최종적으로 장쩌민, 쩡칭홍이 시진핑을 선택했고, 리위안차오는 18대에 정치국상위에도 들어가지 모사고,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국가부주석을 1기 지내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다. 19대이전에, 당내에서는 리위안차오가 "기꺼이 은퇴방안을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았고, 19기 1중전회가 폐막하기 전에 중앙판공청은 그에게 이렇게 통지한다. 당중앙은 그가 은퇴이후 생활지로 난징 혹은 상하이를 선택하겠다는 청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리위안차오는 할 수없이 베이징에서 은퇴후 생..

조자양(赵紫阳, 자오쯔양)은 왜 권력투쟁에서 실패했는가?

글: 왕단(王丹)​올해는 "6.4" 35주년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면, 여하한 회고나 반성도 모두 별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6.4"사건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35년전에 발생했던 많은 일들은 우리가 오늘날의 중국정치를 정확하게 판단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중요하고 신선한 참고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조자양은 왜 권력투쟁에서 실패했을까.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이 문제에 대하여, 과거 35년간, "6.4"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 주로 다음의 두 가지이다:​첫째, 조자양은 학생운동초기의 중요한 시기에 베이징에 남아서 국면을 주재하지 않고, 오히려 원래의 일정에 따라 북한을 국사방문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차이치(蔡奇): 중추를 장악했지만, 이빨없는 호랑이이다.

글: 호해(胡亥)​해외매체에서는 차이치를 "창위독공(厂卫督公)"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동창(东厂)의 우두머리라는 것인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동창은 명나라때의 정보기구이고, 특무조직이며, 조정의 응견(鹰犬)이다. 차이치는 동창을 주관할 뿐아니라, 동시에 천하의 온갖 일을 관리감독하며, 중공의 일상사무도 처리한다. 그렇다면 '창공(厂公)'이 아니다. 오히려 사례병필태감(司礼监秉笔太监)에 가깝다. 황상을 도와 세상만물을 처리하며 재상의 권한을 대행하는 직위인.​저명한 중국문제전문가인 가오신(高新) 교수는 일찌기 아시아자유논단에 글을 올려, 시진핑이 왜 차이치를 신임하는지를 기술했다. 그는 푸젠(​福建)에서 저장(浙江) 그리고 다시 베이징(北京)까지 20여년에 걸친 "사적인 우정"외에 더욱 중요한..

장춘교(張春橋): 무장정변을 계획했었다.

글: 임휘(林輝) ​ 모택동 사후 1개월만에, 화국봉, 섭검영등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모주석을 위해 일하던 “사인방” 즉,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왕홍문을 체포했다. 이와 동시에 “사인방”의 추종자들에 대한 숙청도 전개했다. ​ 1980년, 중국 최고인민법원에 성립된 특별법정은 “사인방”에 대하여 보여주기식의 공개재판을 진행하여, 그들 모두를 “임표강청반혁명집단”의 구성원으로 규정하고, 문혁의 죄책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며, 상응하는 형벌을 내렸다. ​ 나중에 공개된 재판기록에 따르면, 북경군사정변이후에 상해에서 미수에 그친 정변이 한건 있었다. ​ 1980년 12월 12일, 왕홍문, 장춘교는 법정에 나와 심문을 받는다. 재판장 강화(江華), 부재판장 증한주(曾漢周)등 재판관은 합계15명이었고, 재판에..

천민얼(陳敏爾): 후계자의 비극적 운명

글: 채신곤(蔡愼坤) 천민얼이 주변으로 밀려난 것(텐진시위서기)으로부터 후계자의 암담한 최후를 살펴보기로 한다. 후계자가 필요없는 시대에 중국정권의 후계자들은 최후가 좋지 못했다. 모택동시대에, 유소기, 임표, 왕홍문이 모두 참혹하게 죽지 않았던가! 시진핑시대에는 반부패를 명목으로 쑨정차이(孫政才)를 정리했고, 59세의 후춘화(胡春華)는 정협이라는 양로원에 일찌감치 들어가 버렸다. '지강신군(之江新軍)의 강력한 간장(干將)이던 천민얼까지 주변으로 밀려나 버렸다. 2015년 천민얼이 구이저우(貴州)성위서기를 맡았을 때, 외부에서는 천민얼이 시진핑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보았다. 그때는 정국의 향방이 불명확했고, 왕치산(王岐山)이 주도하는 반부패가 전력을 다하여 장쩌민, 후진타오의 사람들을 처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