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79

"신삼계(新三屆)": 중국특색의 77-79학번 대학입학생 글: 사성우(謝盛友) "신삼계(신싼제)"는 문혁이 끝나고 대학입시가 회복된 이후의 77,78,79학번 대학생을 가리킨다. 문혁기간의 노삼계(老三屆)와 구분하기 위하여 대학입시회복후의 3년간 학번의 대학생을 "신삼계"라고 부른다. 신삼계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1979년의 고중졸업생으로 1963년생이다. 이 3년간의 입학생의 연령은 1947년생부터 1963년생까지 16년에 걸쳐 있다.(일부 대학교에 입학한 대학생들 중에는 보기 드물게 1946년생도 포함되어 있다) 신삼계내에서도 차이가 적지 않다. 77학번은 거의 당년 고중졸업생이 없었고, 78학번중에는 당년고중졸업생이 약간 있었으며, 79학번에는 당년 고중졸업생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량이 당년 고중졸업생이 들어왔기 때문에, 79학번은 77.. 2022. 11. 2.
왕자오궈(王兆國)와 후진타오(胡錦濤): 일마당선(一馬當先)과 후래거상(後來居上) 글: 고벌림(高伐林) 한 친구가 지난 기의 을 본 후에 댓글을 남겼다. 기억하기로 중공12대에서 중점배양하기로 선발된 사람은 왕자오궈이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모두 그의 밑에서 일했었다고. 그 사람의 말이 맞다. 2002년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후계자로 올랐지만, 근 30년전에 왕자오궈는 중공중앙판공청 주임 겸 공청단중앙제1서기였으며, 원자바오는 중앙판공청 부주임이었고, 후진타오는 공청단중앙 상무서기였다. 이들 둘은 모두 왕자오궈의 부하였다. 이는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왕자오궈는 후진타오보다 공청단중앙에 3개월가량 먼저 왔다. 1982년 한영(韓英)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등소평이 1980년 7월, 후베이 스얜시(十堰市)의 제2자동차제조공장(二汽)을 시찰할 때 발견했다. 당시 얼치.. 2022. 9. 13.
"문혁(文革)"의 진상을 가장 먼저 통찰한 사람들.... 글: 부국용(傅國涌) 56년전인 1966년, 중남해에서 일어난 태풍이 밀려올 때, 일시에 파도가 하늘에 닿고, 음습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많은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중공고관들이나 전공이 혁혁한 대장, 원훈(元勳)들, 그리고 한 지방을 다스리는 봉강대리(封疆大吏)들까지도 이때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고, 그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운명의 처분을 기다렸다. 유소기(劉少奇) 마저도 단지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라는 한 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문혁발생초기, 많은 권력무대에서 부침을 거듭한 고관들은 거의 모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앞장서서 이 전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동란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공개적으로 .. 2022. 9. 7.
리커창(李克强): 나는 북경대학에서 근 10년간 공부했다. 잊을 수 없는 북경대학 스승들... 글: 리커창(李克强) (1955년 7월생, 안후이 딩위안(定遠)사람. 1974년 3월 참가공작, 1976년 5월 가입중국공산당, 북경대학 법률학과와 경제학원의 경제학전공졸업. 법학학사, 경제학박사. 현임 중공19기 중앙정치국상위, 국무원총리, 당조서기) 20년전, 바로 이 계절에, 당시 중국시골의 한 척박한 토지에서 나는 대학입시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북경대학과 인연을 맺게 된다. 대학입시지원서를 쓰기전에, 나는 예전에 만나서 알고 있는 학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일찌기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북경대학에 지식의 금자탑이 있다고 깊이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편지에서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 십년만에 한번 올 수 있는 기회를 귀하게 여겨, 북경대학을 유일한 선택지로 삼으라고. 당시의 나는 많은.. 2022.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