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개(袁世凱)의 연군(練軍): 대청멸망원인...
글: 최애역사(最愛歷史)1901년 11월 7일, 서태후는 "서수(西狩)"를 마치고 북경으로 회궁하는 도중에 이홍장(李鴻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같은 날, 그는 의지(懿旨)를 반포하여, 원세개를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한다. 자신의 권세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열강에 잘보이기 위하여, 그녀는 외교수완과 군사실력을 겸비한 인물에게 직예총독을 맡겨야했다.당시, 외국세력이 지지하는 개명한 독무(督撫, 총독/순무)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원세개와 장지동(張之洞). 장지동의 군대는 호북(湖北)에 있고, 만명이 되지 않았다; 원세개의 군대는 산동(山東)에 있으며 근 2만의 군대를 보유했다. 북경에도 가깝고, 장비도 우수하며, 건제도 완비되었다.그리하여, 대청제일강신(大淸第一..
2025. 1. 9.
원세개(袁世凱)의 장례식: 국장으로 서태후에 못지 않았다.
글: 성도일보(星島日報)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봉건황제제도를 무너뜨린 후,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 제2대 임시대총통을 지냈다. 그는 북양정부의 최고지도자였으며, 북양군의 창시자겸 영도자였다. 그의 장례식은 호화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규모도 엄청났고, 그 규격은 청나라황제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1915년말, 원세게는 황제에 오르고, 연호를 홍헌(洪憲)이라 한다. 그러나, 사회각계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항한다. 특히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계요(唐繼堯), 채악(蔡鍔), 이열균(李烈鈞)등 실력자들이 호국군(護國軍)을 조직하여 무력으로 원세개를 토벌하고자 한다. 금방 원세개의 황제꿈은 "토원(討袁)"의 소리에 사라지게 된다. 그때 그의 사람들은 거의 떠나갔으며,..
2024.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