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55

베이징주변 댐들의 전략적 안전문제

글: 왕유락(王維洛)​트럼프는 중국이 대만을 침범하면 북경을 폭격하겠다고 말했다.​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미국대통령선거전의 모금활동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일 중국이 그의 임기내에 대만을 침범하면, 그는 북경을 폭격하는 것으로 대응하겠다고. 미국대통령 바이든은 타임지와의 인터뷰때 이런 말을 한다. 그는 미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보호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이는 바이든이 공개적으로 입장을 다섯번째 표시한 것이다. 북경이 무력을 사용하면 출병하여 대만을 보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선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미국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다. 만일 중공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이 군사개입할 것이다. 만일 트럼프가 금년에 승리하면, 북경을 폭격할 가능성도 미군이 고려하는 수단중 하나가 될 것이다.​사..

황궁의 위생상태는 어떠했을까?

글: 독사(读史)​1​TV드라마와 권력에 대한 환상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은 황궁이 거의 천국수준일 것으로 여긴다.설계도 정교하고, 관리제도도 잘 되어 있으며, 정원이나 전각에 먼지 한톨 없이 일년내내 금벽휘황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인터넷에는 심지어 고궁의 처마가 얼마나 정교했었는지, 새들이 앉을 수 없게 만들어 새똥조차 없었다는 전설까지 소개되어 있다.그러나, 실제로 새들은 날다가 변을 본다. 어디든 가고싶은 곳을 날아가기 때문에 황제의 머리 위에서라도 마찬가지로 변을 본다. 사람들은 권력이라는 환상에 눈이 가려졌을 뿐이다. 사람의 일을 다른 동물들에게까지 적용하려고 하지 말라.권력에 의해 왜곡된 상상력을 벗겨버리고나면, 고대황궁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아주 더러웠다.극작가 제여산(齐如山)은 청나..

원명원(圓明園) 이야기

글: 전심생(田沈生) ​ 얼마전 인터넷에서 유머 하나를 보았다: 소명(小明)이 역사수업때 잠이 들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보고 돌연 질문을 했다. 소명학생 원명원은 누가 불태우고 파괴시켰지? 잠에서 덜 깬 소명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급히 대답했다: 제가 불태우고 파괴한 게 아닙니다. 절말 제가 안했습니다. 선생은 화가나서, 수업이 끝난 후, 소명의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서, 당신 아들이 원명원을 그가 불태우고 파괴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명의 졸부 부친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다: 이 자식이 또 말썽을 부렸군요. 그 놈이 불을 질렀건 아니건간에 선생님이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를 배상해주면 됩니까. 우스개는 우스개인데, 이는 나의 원명원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환기시켰다. ​ 원명원..

"북경(北京)"은 왜 "북평(北平)"으로 불리웠는가?

글: 진신(陳新) 북경은 3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이다. 왕조가 교체됨에 따라, 전후로 60여개의 정식명칭과 별칭이 있었다. 세계의 도시역사상 명칭이 가장 많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중 북경과 북평 두 명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북경은 왜 역사상 북평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명나라의 창업자 주원장(朱元璋)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원나라말기, 몽골통치자에 반항하는 농민반란이 거세게 일어나 전국을 석권한다. 주원장은 농민군의 진우량(陳友諒), 장사성(張士誠)의 세력을 흡수한 후, 강남의 반벽강산을 차지한다. 그리고 원나라 지정27년(1367년) 대장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에게 군사를 주어 북벌에 나선다. 1368년, 주원장은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을 경사(京師)..

순친왕부(醇親王府):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한 청나라 최고의 왕부

글: 소태양(小太陽) 청나라의 순친왕부에서는 일찌기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했으니, 청말 수십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왕부라 할 수 있다. 그 기세와 씀씀이는 다른 왕부를 훨씬 넘어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친왕부의 씀씀이를 통해서 우리는 개략 청말제일왕부가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 순친왕부의 출현 만청입관(滿淸入關,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에 자리잡다)후, 더 이상 명나라의 제도와 같이 왕실을 전국각지에 분봉(分封)하지 않았지만, 황실내에 여러 왕야(王爺)를 분봉한다. 그들이 획정한 엄격한 등급제도를 보면, 여러 작위들 중에서 오직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의 부저(府邸, 집)만을 "왕부"라 부를 수 있었다. 그보다 아래 등급인 패륵(貝勒), 패자(貝子)..

자금성(紫金城)의 배치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글: 배포여행하(背包旅行呀) 명나라의 세번째 황제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는 정난지역(靖難之役)을 통해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황위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남경은 건문제의 세력범위여서 주체가 국면을 장악하기 쉽지 않아서 도성을 남경성에서 북경성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북경에 자금성을 짓는다. 오늘날 고궁의 전신이다. 자금성은 명,청의 황제와 가족들의 거주공간과 업무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건축의 배치는 대체로 "좌조우사(左朝右社)" "전조후침(前朝後寢)"으로 이루어져 있다. '좌조'는 태묘(太廟)를 가리킨다. 즉, 오늘날의 노동인민문화궁이다. 그 안에는 청나라 각 황제의 패위(牌位)가 모셔져 있다; '우사'는 사직단(社稷壇)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중산공원이다. 그 안에는 오색토..

자금성(紫金城)의 신수(神獸)

작자: 미상 모든 동물이 자금성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궁건축의 서로 다른 위치에는 상서로운 신수들을 놓아두었는데, 진택화살(鎭宅化煞), 구사영샹(驅邪迎祥)을 표시한다. 그리고 수백년동안 같은 자세로 있으면서 집요하게 금구영구(金甌永固), 복수영년(福壽迎年)을 나타낸다. 태화전(太和殿) 앞의 동사(銅獅) 청동으로 만들었고, 아주 정교하다. 아름다운 하얀 대리석 위에 놓여 있다. 정전(正殿)을 지키는 의미를 가진다. 오른쪽의 숫사자는 수구(繡球)를 오른발아래 밟고 있는데, 이는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의 암사자는 왼발의 앞에 어린새끼를 데리고 놀고 있는데, 그 뜻은 자손이 창성하라는 것이다. 태화전 앞의 선학(仙鶴)과 동귀(銅龜) 단지(丹墀) 위에 운학(雲鶴)이 서 ..

혁흔(奕訢)의 후손들은 어떻게 공왕부(共王府)를 팔아버렸는가?

글: 유강화(劉江華) 모두 알고 있다시피, 십찰해(什刹海) 부근의 공왕부는 원래 청나라때 공친왕(共親王) 혁흔의 저택이다. 지금 그것은 가장 잘 보존돈 청나때의 왕부건축군(王府建築群)이다. 공왕부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좌공왕부(一座共王府), 반부청대사(半部淸代史)" 공왕부 한채는 반권의 청나라역사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청나라때, 공왕부는 건축이 정교하고 아름다울 뿐아니라, 그 안에는 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골동품과 진귀한 고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진당(晋唐)이래의 서화명작이 120종이상이다. 거기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와 왕헌지(王獻之)의 이었다. 그는 투명한 종이를 대고 그림을 배껴서 1달의 시간을 들여, 종이, 비단으로 각각 1본씩 임모한다. 계..

자금성과 천안문은 누가 건설하였는가?

글: 동몽지(董夢知) 금년은 자금성 탄생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금벽휘황한 궁전군은 당금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며, 보존이 가장 완벽한 궁전이다. 자금성의 앞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천안문이 있다. 이는 황성의 정문이고, 국가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자금성, 천안문은 누가 지었지?" 북경토박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명나라때의 괴상(蒯祥)이다!' 맞다 바로 괴상이다. 만일 괴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괴상이 자금성을 건축한 것에 관한 자료는 북경의 여러 사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지 내용이 많지 않고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자료들 중에서 적지 않은 것은 서로 모순되거나 잘못 기록된 것이 있어, 이해하는게..

북경 향산(香山) 영안릉(永安陵)의 수수께끼

글: 왕밀림(王密林) 전문사택아중승(傳聞舍宅阿中丞) 승사잔료설폐흥(勝事殘遼說廢興) 유갈난심응조석(遺碣難尋鷹爪石) 한무장몰영안릉(寒蕪長沒永安陵) 부증상(傅增湘)의 에서 언급된 영안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북경의 서산 지역에 두 개의 황제릉이 있었다. 하나는 명대종(明代宗) 주기옥(朱祁鈺)의 경태릉(景泰陵)이고, 다른 하나는 요선종(遼宣宗) 야율순(耶律淳)의 영안릉이다. 그런데, 경태릉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영안릉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두 명의 서산에 뼈를 묻은 황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국가의 위기때 옹립된 황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다'고 인정받는 주기옥과는 달리, 야율순은 '명부정(名不正), 언불순(言不順), 사불성자(事不成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