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35

"장가왕조(蔣家王朝)"는 왜 2대로 끝났을까?

글: 노황설사(老黃說史)​장개석(蔣介石)이 장경국(蔣經國)을 위해 길을 깔아준 것과 마찬가지로, 장경국도 아들이 순조롭게 자리를 넘겨받게 하기 위하여 고심을 해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의외의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되어, "장가왕조" 제3대후계자의 "등극의 길"을 끊어지게 된다. 바로 "강남명안(江南命案)"이다.​​장경국에게는 4남1녀가 있다. 그중 장효문(蔣孝文)과 장효무(蔣孝武)이 장방량(蔣方良)의 소생이다. 다만 장효문은 신체가 허약하여 중임을 맡기 힘들었기 때문에, 장효무가 중점배양대상이 된다.​장효무의 인생이 부친의 안배하에 궤도에 들어가고 있을 때, "강남명안"이 발발하여, 이 유력했던 "이태자(二太子)"는 쓸쓸히 무대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장효무가 물러나면서, 결국 장씨가족은 정식으로 정..

요야성(姚冶誠): 장개석(蔣介石)의 두번째 부인

: 노황설사(老黃說史)​장개석이 전후로 4명의 부인을 취했다는 것은 이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두번째 부인 요야성(姚冶誠)의 평생행적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소주(蘇州) 부근에 야장경(冶長涇)이라는 하천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장경 부근은 미녀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일찌기 이런 말이 유행했다: "고소(姑蘇, 소주를 가리킴)에 미녀가 많다는 것은 허명이다. 진정한 미녀는 야장경에서 나온다."​당시 권세있는 고관들은 앞다투어 야장경 일대의 여자를 처첩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장개석의 두번째 부인 요야성, 두월생(杜月笙)의 첩 장아매(張阿妹), 왕정위의 3방면군사령관 공국량(龔國良)의 처 왕매매(王妹妹)등이 모두 야장경사람이다.​요야성의 원래 이름은 요이금(..

"중경담판(重慶談判)": 제2의 '홍문연(鴻門宴)', 장개석은 왜 모택동을 풀어주었을까?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초한상(楚漢相爭)에서 항우(項羽)는 원래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유방(劉邦)을 죽여버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문제를 두고 항우는 무척 망설인다. 초나라 귀족출신인 그는 내심으로 이 건달을 멸시하고 있었다. 그는 유방이 지금 거둔 성취는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홍문연에서 항우는 유방을 풀어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천하를 잃고, 패왕별희(覇王別姬)하고, 오강에서 자결하게 된다. 항우의 실수로 대한(大漢)강산은 4백년간 지속되고, 세계최대의 민족인 한민족(漢民族)을 형성하게 된다. 홍문연때, 항우는 꿈에도 이런 점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2천년이 지난 후, 대일항전이 끝나고, 국공(國共)간에는 '홍문연'과 유사한 중경담판이 벌어진다. 장개석은 원래 모택동..

장개석이 손자 3명을 후계자로 양성하려던 계획은 어떻게 실패하였는가?

글: 우인연화(愚人煙火) 장경국(蔣經國)의 부인 장방량(蔣方良)은 모두 4명의 자식을 낳았다. 각각 장효문(蔣孝文, 장남), 장효장(蔣孝章, 장녀), 장효무(蔣孝武, 차남), 장효용(蔣孝勇, 막내아들)로 3남1녀이다. 이 세 아들에 대하여 장경국은 일기에서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효문은 멍청..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칠 때 데려간 3명

글: 소담야사(笑談夜史) 장개석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국민정부의 최고총사령관일 뿐아니라, 항일투쟁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지도자이다. 우리는 모두 회해전역(淮海戰役)이 끝난 후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망쳤고, 그가 대만으로 옮겨갈 때 그가 좋아했던 골동품, 서화등 문화재를 ..

장개석의 사무실에는 왜 책이 한권도 놓여 있지 않았을가?

글: 진관임(陳冠任) 지도자로서 장개석의 사무실은 세계각국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책 한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책을 한권도 놓아둔 적이 없다. 3,4십년대 중경(重慶)에 있을 때, 장개석은 두 개의 사무실이 있었다. 하나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다른 하..

장개석은 어떻게 성도(成都)에서 대만(臺灣)으로 도망갔는가?

ㅠ상,글: 왕풍(王豊) 장개석이 처음 사천에 온 것은 1935년 3월 2일이다. 그가 사천에 간 목적은 첫째가 독군(督軍)이다. "공비토벌" 전선을 시찰하기 위함이다. 장개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사천성정부가 사천을 건설하는 것을 돕고, 사천동포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겠다고, ..

장개석의 "마지막 하루"

글: 구양박문(歐陽博文) 대만 의 보도에 따르면,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는 31명의 장개석의 신변에서 일했던 시종인원들을 인터뷰하여, 근 60만자에 이르는 구술역사를 완성했다. 대만당국의 '유엔퇴출'시 장개석이 분노하여 압설모를 집어던지고 화가나서 눈물을 흘린 일도 기록했고, 장개석의 마지막 하루도 기록했다. 장개석의 시위관, 내무조 부주임등의 직위를 지낸 응순인(應舜仁)의 회고에 따르면, 1971년 10월 26일 장개석을 모시고 대계빈관(大溪賓館)으로 갔다. 그날 무관이 장개석에게 '유엔퇴출' 소식을 보고한다. 장개석은 '압설모를 집어 바닥에 던졌다' 응순인은 장개석을 오랫동안 모셨지만 처음으로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도했다고 말한다. 대만당국이 전 외교부장 전복(錢復)은 당시 장개석의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