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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19

광서제(光緖帝)는 왜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사진은 그 사람의 일생을 남기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1843년 사진기가 발명된 이래, 서양의 상류층인사들은 자주 이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사진기가 청나라에 전래된 후, 서태후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지금도 우리는 서태후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서제의 경우는 몰래 찍은 사진 한장만 남아 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광서제는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제이다. 그의 일생은 전설적이면서도 비참하다. 1874년,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 서태후는 조정대신들과 긴급회의를 열었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아들 재첨(載湉)이 황위에 오르도록 결정한다. 그 말을 듣자 혁현은 땅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 2023. 1. 5.
광서제의 죽음(3): 광서제와 서태후의 은원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대청의 첫손가락 꼽히는 권력자로서 국가관리층면이나, 개인은원이나 살인동기나 실행능력을 볼 때, 서태후가 최종집행자일 것이다. 그녀로서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광서제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실패할 위험도 없다. 첫째, 국가관리층면을 보자. 광서제가 이끄는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그는 일찌감치 폐인이 되었다. 심지어 상징적인 대우마저도 크게 줄어든다. 백일유신시기에 그는 조조를 핍박하는 한헌제와 같았다. 힘이 없는 황제는 되지 않겠다고 물러나겠다고까지 밀어부쳤다. 서태후는 그러나 네가 황제로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열강이 막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황위를 바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을 때 부의를 황제로 결정했다. 국가관리층면에서 광서제가 할 일은 없었다. 살아남겨두어도.. 2021. 9. 16.
광서제의 죽음(2): 광서제는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까?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 각종 광서제의 사망에 대한 전설중에서, 주류는 3가지이다. 이연영살해설, 원세개살해설, 서태후살해설. 어쨌든 그의 죽음은 너무나 기이하고 수수께끼였었다. ​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전설중 신뢰도가 가장 낮은 이연영살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 전문적으로 소개할 필요도 없이, 청나라궁중드라마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이연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청나라의 스타태감이다. 그는 서태후 곁에서 잘나갔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오른팔 왼팔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서태후를 미워했던 광서제는 죽기 전에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행세하는 주구나 방흉이 더욱 미운 법이다. 그래서 자신의 흉험한 처지를 알게 된 이연영이 그 정보를 서태후에게 알리고, .. 2021. 9. 16.
광서제의 죽음(1): 서태후에 유폐당한 광서제는 어떻게 죽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담사동(譚嗣同), 강유위(康有爲)와 무술변법의 '삼위일체'의 주장으로서,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할 운명이 되었다. 과연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담사동은 죽임을 당하고, 강유위는 망명했으며, 홀로 남아서 죽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된 운나쁜 광서제는 변법실패의 책임을 혼자서 지게 돈다. 사갈처럼 악독한 친이모(서태후)에게 영대(瀛臺)에 유폐되어 힘들게 10년을 살았다. 원래는 서태후가 죽으면서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결국 미스테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다. 가경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두 외인들은 알 수 없는 사인불명이었다. 활실에 태어나면 자유란 없는 것이다. 원래 청나라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그는 대청을 회생시킬.. 2021. 9. 16.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 2020. 1. 16.
광서제를 독살한 흉수: 서태후, 이연영, 원세개가 아니라 융유이다 글: 산천사(山川社)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돌연 북경 중남해에서 '붕어'한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겨우 38세이다. 11월 15일, 서태후가 북경고궁에서 사망한다. 향년 73세이다. 황제와 태후가 연이어 사망했는데, 시간간격이 20시간되 되지 않았다. 특히 광서제의 죽음언 여러 추측을 불러.. 2019. 1. 13.
영대수도(瀛臺囚徒): 개혁황제 광서제의 비극 글: 장효파(張曉波) 1908년, 무신년(戊申年), 청광서34년. 불안했던 청나라 역사에서 1908년은 아주 두드러진 해이다. 8년전에는 전체 화북을 뒤흔들었던 의화단의 난과 8국연합군의 중국침략이 있었고, 3년후에는 천번지복할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반드시 언급해야할 일은 이 해의 11월 13일.. 2014. 11. 20.
광서제의 연금생활은 어떠했는가? 글: 낙방거사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유지를 반포하여, 광서제는 질병으로 조정업무를 처리할 수 없어, 서태후가 다시 "훈정"을 한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이번 "훈정"은 이전의 "수렴청정"과는 달랐다. 직접 황제와 나란히 앉아서 신하들을 마주하고 업무를 듣.. 2013. 6. 10.
광서제: 황제의 무릎 글: 장명(張鳴) 어떤 중국인은 말한다. 사람에게 무릎이 있는 것은 꿇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루쉰(魯迅) 선생이 아주 미워했던 말이다. 일찌기 크게 조롱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에 사람이 세상에 살면 자주 무릎을 땅바닥에 꿇어야 했다. 부모에게 꿇고, 어른에게 꿇고, 스승에게.. 2012. 9. 20.
광서제(光緖帝)의 죽음: 누가 원흉인가? 글: 하약청(何躍靑) 서태후는 영록(榮祿)의 딸 과르자씨(瓜爾佳氏) 유란(幼蘭)을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과 결혼시키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순친왕부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다: 하나는 원세개(袁世凱)이고 다른 하나는 영록(榮祿)이다. 왜냐하면 원세개의 뒷배.. 2012.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