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 257

승상(丞相)과 재상(宰相): 어떻게 다른가?

글: 두두역사미(兜兜歷史迷)​고대에 명칭이 아주 비슷한 관직이 있다. 하나는 승상(丞相)이고 다른 하나는 재상(宰相)이다.​사람들의 느낌으로 말하자면 이 두 개의 관직은 아주 유사하다. 이름이 비슷한 것뿐 아니라, 지위도 유사하고, 심지어 하는 일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승상과 재상은 하나의 직위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명칭인 것일까?​기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재상과 승상은 한 사람이 가질 수도 있다.​중국의 상기(象棋, 우리나라의 장기)에 있는 말중에 "상(相)"이 있다. 여기의 "상(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승상과 재상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그들중 누가 권력이 더 큰가?​오래전에 승상이라는 관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관직이 아..

역사연구와 정치선전: 항전사기록의 병폐 (3)

글: 강극실(姜克實) 6. 사상(死傷), 섬멸(殲滅), 소멸(消滅)의 의미 군사사(軍事史) 연구에서 "사상(死傷)"은 전과를 형량하는 기준이다. 그러나, 사망, 부상을 섞어서 얘기하면, 쉽게 허위전공을 이용하는 정치적 용어가 된다. 특히 양국이 대립하는 전쟁이 진항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에 국민을 고무시키거나 기만하는 선전전이 벌어진다. 이런 문필의 싸움과정에서 숫자를 과장하는 동시에 "사상" "폐상(斃傷)", "섬멸" "소멸"도 자주 보이는 용어이다. 예를 들어, 공산당의 공식 항일전쟁전과선전을 보면, 일본군을 전사시킨 명확한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 사용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사상" "폐상" "섬멸" "소멸" 혹은 "적인" "일위군"등 정의가 모호한 용어들이다. 목적은 아주 명확하다. 선전을 위해 전과를..

역사연구와 정치선전: 항전사기록의 병폐 (2)

글: 강극실(姜克實)군신 기쿠치 고헤이(木口小平)동상(하마다시 호국신사). 1918년 심상소학교 1학년 수신교과서. 3. "군신(軍神)"과 "영웅(英雄)"​​​정치선전이 전사기록(戰史記錄)면에서 나타나는 특징중 하나는 극단적인 영웅이미지를 창조하고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목적은 민족정신, 애국주의, 영웅사적교육을 통하여, 특정조직에 대한 충성, 헌신정신을 선전하고, 이를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쟁전의 일본은 국민으로 하여금 천황제국가의 침략전쟁에 헌신하도록 내몰기 위하여, 선전수법으로 대량의 군신(영웅)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때의 나팔수 기쿠지 고헤이(木口小平), 러일전쟁때 여순항구봉쇄전투의 히로세 다케오(廣瀨武夫) 중좌, 태평양전쟁때 진주민기습한 구군신(九..

역사연구와 정치선전: 항전사기록의 병폐 (1)

글: 강극실(姜克實)​중일전쟁후, 지금까지 이미 79년이 흘렀다. 오늘날의 소위 고령자층은 절대다수가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21세기의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미 요원한 과거가 되어 버렸다. 만일 자연스럽게 놔두면, 동아시아각국의 민중들 사이에서 대립과 반목이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간의 대립, 국민간의 반목은 전후 80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왜 역사의 원한, 대립은 해소되지 않는 것일까?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역사인식의 대립에 관하여 필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역사교육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기록의 문제이다. 양자간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즉 국가간의 정치적입장, 이해관..

"촉(蜀)": 중국역사상 사천(四川)이외의 지방에도 있었다.

글: 제사(諸史)​현대한어에서 "촉(蜀)"은 일반적으로 주(周)나라때의 파촉국(巴蜀國), 유비의 촉한(蜀漢)정권, 사천(四川)의 별칭으로 쓰인다. 이 셋은 모두 현재의 사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료에 분명히 기록된 것을 보면, 사천이외에도 대량의 "촉지(蜀地)"가 있었가. 그리고 상(商)나라때도 촉국(蜀國)이 있었다.​예를 들어, 에는 "신황벌촉(新荒伐蜀)"이 기록되어 있다: 목야(牧野)전투이후, 주무왕은 수하에게 명령하여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상왕조의 촉국을 공격하도록 한다. 거기에는 "경자벌촉(庚子伐蜀), 을사자촉지(乙巳自蜀地)"라고 쓰여 있다. '경자일'에서 '을사일'까지는 겨우 6일이다. 주무왕의 군대가 하북북부에서 사천까지 6일만에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무왕이 공격한 '촉국'은 분명..

고대전쟁에 사용된 진법(陣法)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글: 자귤(紫橘)​의 전쟁장면을 보면 정말 사람의 피가 끓는다. 극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제후간의 전쟁에서 모두 먼저 진(陣)을 펼치고 다시 돌진하는 것이다.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전군을 지휘하여 바로 공격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왜 고대의 전투에서 항상 먼저 진을 펼치고, 상대방의 화살이 하늘에서 비오듯이 쏟아지는데, 우리측 병사들은 그냥 서서 그것을 맞았을까? 이는 고대전쟁사상의 가장 재미있는 주제와 관련된다. 열진(列陣). 전투는 집단간의 싸움이다. 진법과 대형은 전쟁의 결과에 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최초의 대방진(大方陣)​합리적인 제도는 반드시 당시의 생산력수준과 과학기술수준에 적합해야 한다. 전투에는 반드시 진을 펼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런 관계를 보여준다. 석기시대에 모두 나뭇잎..

중화문명은 왜 4,5천년간 중단없이 지속되었는가?

글: 융소첩(戎小捷)​고대에 서로 다른 인류사회 상호간에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아주 통상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대국, 강국이 소국, 약국을 병합하는 것은 더더욱 흔한 일이었다. 약국, 소국의 제도와 문화는 이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말살되는 일도 자주 발생했고, 기이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전체 인류역사상, 많은 이전의 대국, 많은 이전의 강력한 문명, 많은 이전에 찬란했던 문화가 중단되거나 소멸하는 일도 있었다. 다만 유독 중화문명, 중화문화만은 계속하여 남아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에서 필자가 연구해서 얻은 결론을 먼저 얘기하겠다: 1. 2개의 서로 완전히 다른 유형의 문명상호간에 전쟁이 진행되면, 패배한 측은 쉽게 소멸되고, 그 문화도 승리한 측에..

중국 극권통치(極權統治)의 고분(古墳)을 파헤친다.

글: 산교룡(山蛟龍)​중공을 욕하는 것도 지쳤고, 욕해도 의미가 없다. 오늘은 중국 극권통치의 고분을 파헤쳐보기로 한다.​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중국의 극권통치는 전통이 있는 것이라고. 이미 2천여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공의 '황러시아'통치는 단지 이런 극권통치의 집대성일 뿐이다. 마치 몽골인 혹은 만주인이 한족에 대해 잔혹하게 통치한 것과 마찬가지로.​중국의 극권통치의 근원은 유가사상에 있다(당연히 법가의 일부 사상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가사상은 중국인에 대하여 철저한 유전자개조를 진행했고, 중국인은 보편적으로 유가의 유전자조작인류가 되었다. 아무리 '반동'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가의 쓰레기가 머리 속에 들어 있다.​우리는 역사책을 보고 에서 말한 모든 것..

<청사(清史)>는 왜 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글: 운향객(云乡客)​역사는 하나의 학문으로 그 목적은 인류활동의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학문의 요구사항중 하나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사실을 쓰는 것(写实)"이다. 통치계급이 자신을 미화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격대수사(隔代修史)" 혹은 "역대수사(易代修史)"를 제창했다. 격대수사의 장점은 시간간격이 비교적 가깝고, 각종 참고비교할 자료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정이 감독하는 역사편찬은 마찬가지로 통치계급의 입김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절대로 단지 어느 왕조의 사서만 읽지 않고, 반드시 주변 다른 나라의 사서를 참조하여 비교한다.​​원나라의 원혜종(元惠宗) 지정3년(1343년) 삼월, 조..

<이십사사(二十四史)>중 왜 뒤의 20사는 유명하지 않을까?

글: 하목역사군(夏目历史君) ​ 정사(正史)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마도 모두 공인된 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를 묻는다면 완벽하게 답안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언급하는 것은 개략 혹은 일 것이다. ​ 이 4사는 중에서 "전사사(前四史)"라고 불린다. 모두 개인적으로 편찬한 사서이다. 이런 상황은 기이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모든 시기의 역사는 다 중요한데, 왜 이후의 사서들은 이들 전사서에 비하여 명성이 높지 못한 것일까? ​ 와 의 큰 차이점 ​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얘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처음에 는 ""로 불렸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 , 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는 점차 유실되고, 는 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