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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52

진경지(陳慶之): 전설의 백포장군(白袍將軍) 글: 자귤(紫橘)​남북조는 장수가 운집한 시대이다. 다만 전설적인 인물을 얘기하자면 문관출신으로 수천명으로 낙양(洛陽)을 수복한 진경지(陳慶之)를 꼽아야 할 것이다. 진경지는 명문출신도 아니고, 심지어 그는 아부를 통해 관직을 얻은 한문(寒門, 한미한 집안)출신이다. 다만 그것이 그의 휘황한 업적을 가릴 수 없다. 오늘은 남조 소량(蕭梁)의 전설적인 무장 진경지에 대해 얘기해보기로 한다.​한문(寒門)출신​남조 양(梁)시기에는 문벌사족의 지위가 여전히 공고했다. 진경지는 의흥군국(宜興郡國) 사람이다. 사서에 그의 군망(郡望)이 적혀 있지 않다. 이를 보면 그가 한문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시기에 그는 소연(蕭衍)을 따라다녔고, 그의 시종(侍從)이었따. 의 기록에 따르면, 소연은 바둑을 좋아하여 자.. 2024. 10. 16.
우계마후(牛繼馬後): 사마예(司馬睿)는 우예(牛睿)였을까? 글: 사해심진(史海尋珍) 서진(西晋)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족들간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한다. 역사에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라고 부른다. 거듭되는 혼전속에 동한말기이래 원래 심각하게 손상입은 국력이 더욱 소모된다. 북방이 머물던 유목민족은 그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중원을 차지하고자 한다. 사마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의 보호하에, 남방의 건업(建鄴, 지금의 남경)으로 내려가 동진(東晋)을 세운다. 다만, 사마예의 즉위에 대하여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 중요한 하나의 원인은 바로 그가 사마씨(司馬氏)의 후손이 아니고, 우씨(牛氏)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소문은 "우계마후(牛繼馬後)"로 불린다. 그렇다면, "우계마후"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서 전파된 것일까? 우리는 먼저 시간을 삼국시대 후기로.. 2022. 10. 6.
"낭야왕씨(琅琊王氏)": 어떻게 위진남북조때 권력의 최전성기를 맞이했을까? 글: 명금명사(明今明史) 구시왕사당전연(舊時王謝堂前燕) 비입심상백성가(飛入尋常百性家) 이 시에서 얘기하는 것은 위진시기의 두 명문집안의 이야기이다. 낭야왕씨와 진류사가(陳留謝家). 그러나 낭야왕씨와 비교하면 진류사가는 그래도 약간 못하다고 할 수 있다. 1. 왕씨의 내력 왕씨의 역사는 유구하다. 당시의 족보에서 조상을 동주(東周)때 주령왕(周靈王)의 태자 희진(姬晋)이라고 한다. 제왕의 후손이므로 '왕(王)'을 성으로 삼았다. 이 가족의 최초의 보첩(譜牒)은 서진(西晋)때 최림(崔琳)이 만들었다. 최림이 쓴 보첩의 서문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왕씨의 선조는 원래 성이 희(姬)로, 주령왕의 태자인 진이다. 실로 왕실의 후손이다. 더구나 주,진,한,위를 거치면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2022. 5. 8.
음모가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의 죄악의 일생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하간왕 사마옹(?-306)은 안평왕(安平王) 사마부(司馬孚)의 손자이고, 태원왕(太原王) 사마괴(司馬瑰)의 아들이다. 즉 그는 사마의(司馬懿)의 질손(侄孫)이다. 진무제(晋武帝) 대에 이르러, 사마옹은 황제와의 관계가 이미 소원해졌다. 그런데 사마옹은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인재를 좋아하여, 젊었을 때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는다. 그리하여 진무제는 그를 "여러 제후의 의표(儀表)가 될만하다"고 말한다. 관중(關中)은 당시에 아주 부유한 곳이었고, 서진의 법에 따르면 "비친친부득도독관중(非親親不得都督關中)"이었다. 사마옹은 황제의 가까운 친척도 아니어서, 원래 관중도독의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현명한 인물로 추천받아" 평서장군(平西將軍), 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 2021. 11. 21.
진문제(陳文帝) 진천(陳蒨): '남황후'를 세우려 한 황제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진문제 진천에 대해 얘기해보자. 진천이라는 인물은 역사상 평가가 상당히 좋다: "어려서는 민첩하고 도량과 견식이 있었으며, 용모가 아름다웠다. 경전과 사서를 중시하여 행동거지가 우아했으며, 모든 일을 예법에 맞추어 했다." 한마디로 하면 학식도 있고, 용모도 뛰어난 자질이 높은 종합적인 인재라는 말이다. 다만, 진천이 등극한 것은 하늘의 조화라 할 수 있다. 기실 진나라에서 당시 진천의 지위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는 진나라의 창업자 진패선(陳覇先)의 조카이다. 이런 신분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역사상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여러가지 전제가 만족되어야 한다. 황상에게 아들이 없어야 하고, 아들이 있더라도 무능하고 불효하여야 한다. 그러나, 진패선의 아들 .. 2021. 6. 11.
왕희지(王羲之)의 생졸년(生卒年)은? 글: 송지견(宋志堅) 왕희지는 59세때 죽었고, 그는 58년간 살았다. 이 점은 사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아무런 이견이 없다. 다만 왕희지의 생졸년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303년에 태어나서, 361년에 죽었다는 것이고, 둘째, 307년에 태어나서, 365년에 죽었다는 것이며, 셋째, 321년에 태어나서 379년에 죽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도대체 몇년도에 태어나서, 몇년도에 죽었을까? 우리는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답안을 찾아보기로 한다. 355년 즉 영화11년, 왕희지는 왕술(王述)의 아래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회계내사(會稽內史)의 관직을 사직한다. 왕희지는 원래 왕술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이전에 그는 그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회.. 2020.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