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계초) 4

양계초(梁啓超)와 채악(蔡鍔): 원세개(袁世凱)를 잠못이루게 한 사도(師徒)

글: 고문기(高文麒) 2003년 4월, 천진의 마르코폴로광장의 북쪽에 두 동의 나란히 선 이탈리아식 서양건물이 정식으로 관광객에게 개방되었다. 북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중화민국초기의 대사상가 양계초의 주택이고, 남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그의 서재인 그 이름도 유명한 음빙실(..

고홍명(辜鴻銘)과 양계초(梁啓超)의 비교

글: 정만군(程萬軍) 청나라말기, 부패하고 썩은 청나라조정은 이미 백족지사(百足之蛇)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각종 신구 "애국지사"가 연이어 등장하여, 각자의 파벌의 정견으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신구파로 나뉜 "변사(辯士)"의 무리중에서,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이 나타난다...

양계초(梁啓超)의 아홉 자녀

근대에 변법자강운동으로 유명한 양계초(1873년-1929년)는 슬하에 아홉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의 세 아들이 중국과학원의 원사가 되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아홉자녀는 차례로 사순(思順), 사성(思成), 사영(思永), 사충(思忠), 사장(思庄), 사달(思達), 사의(思懿), 사녕(思寧), 사례(思禮)이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