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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26

형주(荊州)전투에서 관우(關羽)에게 치명적 일격을 가한 것은 누구일까? 글: 서북낭(西北狼)​219년에 발생한 양번(襄樊)전투는 삼국역사상 가장 읽기 힘든 대목이다. 관우는 이 해에 사망했고, 전체 삼국의 형세는 달라진다. 동시에 한실부흥의 한가닥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이 사건에 관하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관우의 '부주의' 혹은 쥐새끼같은 무리의 후안무치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우가 이 전체 사건에서 무슨 '부주의'한 부분은 없다. 여몽(呂蒙)의 '백의도강(白衣渡江)'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의 방향은 여러 방면의 힘겨루기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단순하게 어떤 사건의 성패를 어떤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의 나태이다. ​형주의 힘겨루기​형주사건의 기인(起因)을 따져보자면,.. 2024. 8. 2.
역사상 관우(關羽)가 사용한 병기는 무엇이었을까? 글: 영주해객(瀛州海客) 호북 형주 관우사의 관공상 소설 는 제77회에 관우가 옥천산에 나타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이렇게 적고 있다: "공중에 한 사람이 보였다. 적토마(赤兔馬)를 타고, 청룡도(靑龍刀)를 들고, 왼쪽에는 백면장군이 있고, 오른쪽에는 흑면규염의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함께 구름 끝에서 내려와 옥천산 정상에 내려왔다." 많은 말이 필요없다. 아마도 '적토마' '청룡도'라고 들으면 바로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세상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적토마와 청룡도는 모두 관우의 상징이다. 그리고 적토마와 비교하자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는 관우에 전속적인 신병으로 더욱 대표성이 있다. 관우와 함께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필마참안량(匹馬斬顔良)".. 2024. 3. 8.
관우(關羽)는 왜 여몽(呂蒙)에게 참패했는가? 글: 개말노생(芥末老生) 건안24년(219년), 십월, 관우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양양(襄陽, 지금의 호북성 양양시 양양구)전선에서 조조의 군대와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손권이 돌연 부대를 둘로 나누어 습격하도록 한다. 하나는 여몽, 육손이 이끄는 정예병으로 배를 타고 공안(公安, 지금의 호북성 공안현),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을 공격하고, 다른 하나는 장흠(蔣欽)이 이끄는 수군(水軍)으로 한수(漢水)를 따라 북상하여 직접 양양(襄陽)을 친다. 관우를 겨냥한 천라지망을 조조와 손권이 손을 잡고 펼친 것이다. 여몽은 대군의 선봉부대로, 병사를 이끌고 위장된 상선(商船)에 숨어서, 관우가 장강을 따라 배치한 여러 초소의 경계망을 뚫고 공안에 도달한다. 공안의 수비장수 사인(士仁)은 권항서(勸降書.. 2023. 5. 19.
관우의 후손이 있을까? 글: 선한(宣漢) 중국인에게 "의용(義勇)" 두 글자의 화신인 관우는 성공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동맹군에게 성을 빼앗기고 도망치다가 죽는다. 그의 최후는 역대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관우의 장남 관평은 부친을 따라 전투에 나섰다가 맥성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붙잡혀 부친과 함께 죽는다. 차남 관흥은 제갈량이 중시했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띨 관씨는 여몽의 손에 붙잡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 관우의 혈맥은 그리하여 더욱 희박해지게 된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수백년 천여년이 지나는 동안 관우는 역대군왕, 무인,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신으로까지 모셔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일부 관우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정부의 녹봉과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관우의 후손은 이어져.. 2021. 12. 25.
관우의 후손이 남아 있을까? 글: 고산(高山)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심심하면 항상 고대의 명인들의 후손에 대하여 얘기하다가, 일단 관우의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이 없어진다. 관우의 후손은 그다지 큰 공헌이 없으므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관우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얘기한다. 도대체 관우는후손을 두었을까? 관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동한 삼국시대의 대장이다. 또한 유비와 도원결의한 형제이기도 하다. 관방사서의 기재이건 아니면 역사연의소설의 묘사이건, 관우는 모두 충성과 의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온조참화웅과 천리주단기로 삼척동자도 아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영웅도 죽는 법이다. 건안24년(219년), 관우는 형주를 지키다가, 조조와 손권이 .. 2021. 12. 24.
관우의 딸은 결국 누구에게 시집갔을까? 글: 지역사(知歷史) 사서에 이름을 남긴 여성은 아주 적다. 관우의 딸도 예외는 아니다.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건안24년(219년), 관우는 형주를 잃고, 아들 관평(關平)과 함게 오나라장수에 붙잡혀 살해된다. 그를 따라 도망쳤던 나머지 가족(그의 딸을 포함해서)의 행방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진수의 기록에 따르면, 관우에게는 아들 관흥(關興)이 있고, 그가 관우의 작위를 승계했다. 추측하건데 그는 나이가 어려서 성도(成都)에 남아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부친과 함께 겁난을 당하지 앟은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추측할 수도 잇다. 아이는 전란중에 적의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고. 그러나 어떻게 추측하든간에 관흥은 사서에 기록된 유일하게 살아남은 관우의 아들이다. 민.. 2020.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