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등소평122

시진핑은 20대에 후계자를 지명할 것인가? 글: 임연(林燕) 중국에서 최고권력의 평화로운 교체가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현임 총서기 겸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후계자를 지명할 것인지가 20대의 촛점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은 올해 가을에 개최될 중공20대에서 최고권력기구인 중공정치국상위의 명단을 교체한다. 아마도 시진핑은 과거의 규칙을 개고, 세번째 임기를 맞이할 것이다. 다만 중공의 최고지도자의 권력은 한번도 가볍게 한 사람의 수중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적이 없다.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 경제학원교수인 바타비얄(Amitrajeet A. Batabyal)은 2월 1일 웹사이트 "Conversation"에 글을 올렸다: 과거, 중공은 권력의 평화로운 교체의 후계계획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내에 이견이 발생하고, 군대가 국내정치에 간여했으.. 2022. 2. 3.
"리잔슈(栗戰書)의 괴이한 실종"과 관련한 소문을 분석하다. 글: 이정관(李正寬) 2022년이 시작되자마자 중국의 정계에는 한마리의 거대한 블랙스완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리잔슈의 괴이한 실종"이다. 사실상 작년 12월 31일, 리잔슈는 "중공정협차화회(茶話會)"에 불참하고 기이하기 실종되었다. 이런 심상치않은 현상은 즉시 국내외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고, 일시에 사방에서 각종 소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리잔수의 신체상황에 문제가 생겼다'는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는 너무나 적다. 여기에서는 잠시 논하지 않기로 한다. 현재 절대다수의 소무는 모두 '중공내부투쟁'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원인을 중점으로 아들 소문이 반영하는 내막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부정부패사건"이 들통났는가? 2개의 주류 소문은 미리 짠 것처럼 들어맞.. 2022. 1. 9.
리잔슈(栗戰書): 낙마의 신호인가? 글: 장걸(張杰) 12월 31일, 중국전국정협은 신년차화회(新年茶話會)를 개최했다. 시진핑, 리커창, 왕양, 왕후닝, 자오러지, 한정등 중공정치국상위와 중국국가주석 왕치산외에 베이징에 있는 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서기, 전인대상무위원회 및 국무원의 일부지도자, 전국정협지도자, 그리고 퇴임한 전국정협부주석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게도 전인대위원장 리잔슈가 불참했다. 민주국가에서, 한 지도자가 이런 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다. 만일 병이 났거나, 외출하거나 혹은 다른 일이 있는 경우라면. 그러나, 독재국가에서 중요한 지도자가 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일종의 좋지 않은 신호이다. 중국 관영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리잔슈가 직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21년 12월 27일에서 28일까지 베이징에서.. 2022. 1. 4.
시진핑: 초조와 불안 글: 안덕렬(安德烈) 2021년을 되돌아보면, 중공지도자 시진핑은 적지 않은 관찰가들의 눈에 지나치게 긴장해 보인다. 그가 긴장하면서, 전당 및 그가 통치하는 전중국이 따라서 긴장하게 되었다. 그는 2020년 연초이후 한번도 출국하지 않았다.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방역이었다. 어떤 분석가는 이를 핑계로 본다. 기실 핑게가 아니라고 볼만한 점도 있다. 시진핑은 방역을 '청령(제로)'가 아니면 안된다는 정도까지 밀어부친다. 중국의 어느 한 곳에서 몇 건이 확진사례가 나타나면, 아마도 구역봉쇄 혹은 전체도시봉쇄까지 해버릴 것이다. 최근의 사례는 1,300만인구의 시안이 겨우 몇백건의 확진으로 전체도시를 봉쇄하며 시민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버린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시진핑은 금년에 카자흐스탄을 방문할.. 2022. 1. 3.
시진핑 연임의 난이도 분석 글: 담소비(譚笑飛) 중공 19기 6중전회에서 중공의 제3차 역사결의를 통과시켜, 시진핑에게 비교적 높은 역사적 지위를 부여했다. 중공의 앞의 2차에 걸친 역사결의는 모두 파구입신(破舊立新)이었다. 이전의 정치노선의 방식을 부정하면서 모택동과 등소평의 권위를 확립했다. 그런데 제3차 역사결의는 뭉뚱그린 내용이었다. 비록 시진핑을 모택동, 등소평과 나란히 세웠지만, 견강부회하는 의미가 너무나 명확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결의는 시진핑의 구상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중공의 당매체들도 논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진파공(陳破空) 선생은 분석을 통해 이 역사결의는 나온지 1달이 지나자 열기가 식고 심지어 집어넣어버리는 분위기라고 한다. 중공의 와 는 심지어 문장을 통해 개혁개방을 찬양하면서 시진.. 2021. 12. 26.
당매체의 이상 논조: 중남해가 내부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가? 글: 학평(郝平) 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중공이 지금까지 자랑하던 집권 '정당성'의 기초였다. 그런데, 이 '정당성'의 기초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 얼마전에 끝난 중공중앙경제공작회의의 보고에서 연이어 25번의 '온(穩)'자가 출현했다. 이는 당이 현재 경제가 신속히 하락함으로 인한 집권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시에 경제문제는 중남해 내부투쟁의 촛점이 되어 버렸다. 는 12월 9일 이론판에 평론원 취칭산(曲靑山)의 라는 제목의 글을 싣는다. 여기에서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의 개혁개방에 대한 공헌을 언급하였으나, 시진핑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시진핑이 당내의 서로 다른 목소리의 반대에 봉착했다고 보았다. 현재, 이 글은 인민망 '관점' 난의 인기글의 8위에 위치하고.. 2021. 12. 16.
장유유(張維維): 나의 부친 장춘교(張春橋) 문: 너는 장춘교의 큰 딸이다. 부친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답: 나는 1947년 1월 6일생이다. 금년 허세로 칠십이다. 나는 집안에서 첫째이고, 큰여동생은 나와 2살도 차이나지 않는다. 막내여동생은 5살 차이가 난다. 남동생은 막내여동생과 다시 5살차이가 난다. 나의 부친은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모주석의 비서라고 생각했고, 모주석의 말을 들었고, 모주석을 위해 일했다. 그뿐이다. 그래서 만일 화국봉(華國鋒)이 그를 기용했으면 그는 계속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쓰지 않으니,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그는 모주석을 숭배하는 것처럼 화국봉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는 화국봉에게 의견을 냈고, 화국봉은 아마도 그게 기분좋지 않았을 것이다. 무대랑이 점.. 2021. 12. 11.
장춘교(張春橋)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글: 왕우금(王友琴) 1976년 10월 6일 저녁, 모택동의 처 강청과 장춘교등 4명은 돌연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그들은 "4인방"으로 불린다. 그 전에 그들은 이미 중국권력서열 6위내에 들어가는 4명이었다. 장춘교는 당시 중국 권력서열4위의 권력자였다. "4인방"이 체포된 것은 27일전에 발생한 모택동사망과 더불어 '문혁'의 종결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었다. 4년후인 1980년말, '특별법정'은 임표와 4인방 두 반혁명집단에 대한 재판에서, 장춘교에게 '사형집행유예' 판결을 내린다. 2년후에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98년 "병보석"으로 풀려나며, 2005년 사망한다. 향년 88세이다. 40년이 지났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이미 '4인방'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2016년 문혁발동50.. 2021. 12. 1.
제3차역사결의에 드러난 중국의 10대위기 글: 학평(郝平) 중국 신화사는 11월 16일, 6중전회에서 통과된 제3차 역사결의의 전문을 공표했다. 결의는 모두 36,000여자이다. 신화사는 동시에 6,600여자의 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4만여자는 일관된 중국의 문화선전에서의 가대공편(假大空騙)의 특징외에도 중국에 닥친 사상유례없는 내부투쟁의 위기국면과 직면한 현실적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위기1: 결의기초과정에서의 구심투각(勾心鬪角) 이 6,600여자의 '기초설명(起草說明)'에 따르면, 제3차역사결의의 초안작성은 2021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8개월이나 걸렸다. 시진핑이 기초조의 조장을 맡고, 왕후닝, 자오러지가 부조장을 맡았다. 다만 이 설명에서는 곧이어 이런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당과 국가의 유관지도자동지 및 유관중앙부서와 지방책임.. 2021. 11. 17.
6.4 천안문사태때 진압명령을 내린 핵심인물은......? 글: 일진천설(一眞濺雪) 1986년말, 베이징, 상하이, 허페이...등지의 대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탐관오리의 부패를 처벌하고, 정치체제개혁을 진행하고, 민주, 자유를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당과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등소평과 그 주위의 완고한 원로들은 등소평의 추종자들인 리펑, 천시통같은 자들과 함께 학생들의 행위는 국외반중세력의 책동에 의한 반당,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당시 당중앙주석을 맡고 있던 후야오방등 당내의 개혁파들은 학생들의 행위를 애국행위로 보았다. 그들의 많은 요구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정확하게 인도하고, 설명하고 소통하여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학생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반대했다.. 2021.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