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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26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2022. 10. 26.
"주덕(朱德)의 편담(扁擔, 멜대)"과 "임표(林彪)의 편담" 글: 임휘(林輝) 1950년대초, 토비(土匪)출신의 중공 전 군사지도자 주덕의 간고(艱苦)하고, 소박한 정신을 칭송하는 글인 이 소학교 교재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글은 조작혐의가 있어 작년에 교과서에서 삭제된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조작혐의가 있는 글이 1967년 2월 정치적 원인으로 주인공을 "임표"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임표사건이 발생하고나서, 주인공은 다시 원래대로 주덕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의 편담"도 날조된 것이 아닌가? 먼저 이 정치적 풍운변화에 흔들린 글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대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1928년 주덕과 모택동은 폭동에 실패하여 도망쳐서 정강산에서 만난 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사람을 5.. 2022. 9. 5.
임표가 정강산에서 발탁, 중용된 경위는? 글: 옥미수(玉米穗) 임표는 주덕이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과 합칠 때, 제28단 1영 3연의 연장(連長)이었다. 28단은 주덕의 주력단이고, 단장은 왕이탁(王爾琢)이다. 1영(營)의 영장은 주자곤(朱子昆, 그는 나중에 환남사변(皖南事變)때 항영(項英)과 함께 피살된다)이고, 2영의 영장은 원숭전(袁崇全)이었다. 2영 영장인 원숭전은 나중에 홍군을 떠나 국민당군에 투항하려 했다. 단장 왕이탁이 그를 뒤쫓아갔다가 원숭전의 총에 죽고 만다. 28단은 하루아침에 단장과 2영의 영장을 잃었다. 임표는 이런 상황하에서 연장에서 먼저 영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얼마 후 단장까지 오른다. 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공초(龔楚)의 회고에 따르면 구체적인 경위는 개략 다음과 같다: 1928년 7월, 먼저.. 2022. 7. 28.
임두두(林豆豆)는 부친 임표(林彪)의 9.13사건 진상을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글: 왕우군(王友群) 1971년 9월 13일, 중공당장에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라고 명시되었던 임표가 그의 처 섭군(葉群), 아들 임입과(林立果)와 트라이던트비행기를 타고 하북 산해관공항(山海關機場)에서 이륙하여 몽골의 원두르칸(溫都爾汗)에서 추락했고, 비행기에 타고 있던 9명은 모두 사망한다. 이것이 바로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9.13사건"이다. 임표는 중국의 십대원수중 한 명이다. 1949년 중공이 권력을 장악한 후, 임표는 국무원 부총리, 중공중앙부주석, 국방부장, 중앙군위제1부주석등의 직위를 맡았다. 문혁때, 중공독재자 모택동(毛澤東)에 바로 다음가는 2인자에 올랐다. 임표의 사후 중공은 그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야심가, 음모가, 매국노, 모택동의 암살을 기도한 원흉으로 규정.. 2021.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