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29

임표의 마지막 7일...

글: 서염(徐焰)(서염이 쓴 , 중앙문헌출판사에서 발췌)​북대하(北戴河)의 서쪽 바닷가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 연봉산(聯峰山) 연화석(蓮花石) 옆에, 청회색의 공(工)자형 2층건물이 한동 숨겨져 있다. 이곳은 북대하 중직관리처(中直管理處)의 별장건물들 중에서 96호이어서, 96호루라고도 불렀다(모택동이 거주하는 별장은 95호이다).​1971년 9월 12일 깊은 밤, 임표(林彪), 섭군(葉群), 임입과(林立果), 유패풍(劉沛豊)은 이곳에서, 황급히 산해관공항으로 가는 자동차에 올라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 청회색의 공자형 2층건물은 이로 인해 임표의 생애에서 마지막을 보낸 유일한 목격자가 된다.​1969년 북대하 96호루를 건축할 때, 임표는 떠오르는 해와 같았다. 그는 햇빛을 겁내고, 바람을..

임표도주사건 관련자 퉁옥춘(佟玉春)의 진술

퉁옥춘(佟玉春) 구술, 서운(舒雲) 정리​1​1971년 9월 12일 18.30분, 산해관공항(山海關機場)의 운항당직 이만향(李萬香)이 보고했다: 북경에서 전용기 1대가 오고 있다. 나는 비행장의 참모장이고, 전용기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고 있어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지휘했다. 그러나 전용기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20시 10분이 되어서야 전용기가 온다는 말을 들었다.​20시 15분, 트라이던트 전용기 1대가 산해관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전용기로 나아가 영접했다. 이건 관례이다. 수장(首長)이 비행기에 타거나 내릴 때는 공항총책임자가 송영을 해야 했다. 나는 임표(林彪)의 아들 임입과(林立果)가 전용기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뒤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이 따라나왔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공군사령부..

913사건: 임표죽음의 진상에 관한 몇가지 설....

글: 조대부(趙大夫)​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 913사건이 벌써 53주년이 되었따. 지금까지도 중국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대사건에 대하여 인터넷에서는 지금까지도 많는 논의가 있다. 그중 임표가 탄 비행기가 어떻게 추락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여, 여기에서는 각종 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서산우해설(西山遇害說)​이 설은 1983년 미국에서 출판된 영문서적에서 나왔다. 책이름은 "The Conspiracy and Death of Lin Biao"이며, 작자는 Yaomingle이다. 1983년 6월, 타이완 시사문화출판사업유한공사가 중문으로 번역하면서 책제목을 "임표의 음모와 사망(林彪的陰謀與死亡)"이라 했다. 작자의 이름은 요명리(姚明理)라고 썼다. 1983년 8월, 홍콩의 원동평론출판..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주덕(朱德)의 편담(扁擔, 멜대)"과 "임표(林彪)의 편담"

글: 임휘(林輝) 1950년대초, 토비(土匪)출신의 중공 전 군사지도자 주덕의 간고(艱苦)하고, 소박한 정신을 칭송하는 글인 이 소학교 교재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글은 조작혐의가 있어 작년에 교과서에서 삭제된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조작혐의가 있는 글이 1967년 2월 정치적 원인으로 주인공을 "임표"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임표사건이 발생하고나서, 주인공은 다시 원래대로 주덕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의 편담"도 날조된 것이 아닌가? 먼저 이 정치적 풍운변화에 흔들린 글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대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1928년 주덕과 모택동은 폭동에 실패하여 도망쳐서 정강산에서 만난 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사람을 5..

임표가 정강산에서 발탁, 중용된 경위는?

글: 옥미수(玉米穗) 임표는 주덕이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과 합칠 때, 제28단 1영 3연의 연장(連長)이었다. 28단은 주덕의 주력단이고, 단장은 왕이탁(王爾琢)이다. 1영(營)의 영장은 주자곤(朱子昆, 그는 나중에 환남사변(皖南事變)때 항영(項英)과 함께 피살된다)이고, 2영의 영장은 원숭전(袁崇全)이었다. 2영 영장인 원숭전은 나중에 홍군을 떠나 국민당군에 투항하려 했다. 단장 왕이탁이 그를 뒤쫓아갔다가 원숭전의 총에 죽고 만다. 28단은 하루아침에 단장과 2영의 영장을 잃었다. 임표는 이런 상황하에서 연장에서 먼저 영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얼마 후 단장까지 오른다. 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공초(龔楚)의 회고에 따르면 구체적인 경위는 개략 다음과 같다: 1928년 7월, 먼저..

임두두(林豆豆)는 부친 임표(林彪)의 9.13사건 진상을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글: 왕우군(王友群) 1971년 9월 13일, 중공당장에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라고 명시되었던 임표가 그의 처 섭군(葉群), 아들 임입과(林立果)와 트라이던트비행기를 타고 하북 산해관공항(山海關機場)에서 이륙하여 몽골의 원두르칸(溫都爾汗)에서 추락했고, 비행기에 타고 있던 9명은 모두 사망한다. 이것이 바로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9.13사건"이다. 임표는 중국의 십대원수중 한 명이다. 1949년 중공이 권력을 장악한 후, 임표는 국무원 부총리, 중공중앙부주석, 국방부장, 중앙군위제1부주석등의 직위를 맡았다. 문혁때, 중공독재자 모택동(毛澤東)에 바로 다음가는 2인자에 올랐다. 임표의 사후 중공은 그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야심가, 음모가, 매국노, 모택동의 암살을 기도한 원흉으로 규정..

임표(林彪)의 "괴병(怪病)": 임표 운전기사의 회고...

글: 초성서(楚成瑞) 조적(祖籍)은 산동 액현(掖縣)이고 일찌기 관동으로 가서 요녕성 대련에 거주한다. 1945년 영구(營口)에서 동북인민자치군에 참여하고, 입대한지 3년만에 제4야전군의 총사령관 임표의 운전기사가 된다. 임표는 그의 차를 타고, 관외에서 관내로 들어오고, 다시 북평에서 개봉으로 남하하고, 그후에 한구로 진입한다. 1950년초, 꽃을 들고 환영하는 가운데 그와 임표의 '승용차'는 북경으로 돌아온다. 매년 이어지는 전투로 임표는 피로에 지쳐 쓰러졌다. 임표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그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었다. 기실 이 병은 일찌감치 평형관전투전에 이미 앓았다. 그때 적군은 강하고 아군은 약했다. 그래도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을 1만명 죽이면서 아군 8천을 잃..

임표의 "평형관대첩"에서 일본군을 몇명이나 섬멸했을까?

글: 상청(常靑) 중국 대륙의 전통적인 교육과 선전에 나오는 "평형관대첩"은 임표가 지휘한 팔로군 115사단 3개단이 1937년 9월 25일 평형관에서 일본제5사단 21여단 수송부대를 기습하여 1000여명을 섬멸한 전투이라고 하며, 그것은 중국이 개전이래 최초의 섬멸전이고, 중국인민의 사기를 고무시켰으며, '일본군 불패'신화를 철저히 깨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도 과연 그러할까? 아래에서는 필자가 여러 각도에서 사건의 진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팔로군이 당시에 일본군을 몇명이나 죽였는지, 평형관에서 발생한 이 전투를 과연 "대첩"이라 부를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이 전투는 임표의 최초 판본인 전보(電報)의 내용은 적 수송부대 1개대대를 섬멸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편제라면, 일본군의 1개 대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