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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182

중국의 비극, 항우의 실패를 비웃으면서 시작되었다. 글: 주건군(朱建軍) 생당작인걸(生當作人傑) 사역위귀웅(死亦爲鬼雄) 지금사항우(至今思項羽) 불긍과강동(不肯過江東) 항우와 유방의 군사대결은 항우의 패배로 끝이 난다. 표면적으로 보면, 누가 최고통치자가 되느냐는 백성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 항우가 서초패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더라면, 중국의 미래는 아마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항우는 복고(復古)를 더욱 원했다. 그래서 분봉제도(分封制度)를 채택한다; 유방은 비록 일부 자제들에게 분봉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시황의 제도를 채택한다. 이것은 이번 글의 주제가 아니다. 내가 더욱 말하고 싶은 것은 항우의 실패라는 이 사건이 중국인의 심리에 미친 영향이다. 이 영향은 중국인에게 “성왕패구(成王敗寇, .. 2022. 6. 3.
항우(項羽)의 패망후 그 휘하의 4대맹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서초패왕 항우는 힘이 남달라서, 상대가 두려움을 느끼던 맹장이다. 동시에 항우의 휘하에는 4명의 맹장이 있었다. 그들은 항우를 따라 동정서토, 남정북전하였다. 거록지전에서는 진군 40만을 격파하기도 했고, 팽성지전에서는 유방의 56만대군을 물리쳐서 위명을 천하에 떨친다. 그러나, 항우는 결국 패망했다. 그렇다면 그의 휘하에 있던 4대맹장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가장 먼저 얘기해아할 맹장은 용차(龍且)이다. 용차에 관한 사료는 많지 않다. 그는 분명 일찌감치 항량, 항우를 따랐을 것이고, 계속하여 항씨집안이 심복이었다. 용차는 항량의 휘하에서 사마(司馬)를 맡았고, 동아전투에 참가하여 진군을 대파한다. 항우의 용인술에는 특징이 있다. "그가 즐겨 기용하는 사람은 항씨일족이거.. 2021. 6. 6.
조위(曹魏)의 효기장군(驍騎將軍) 3명은 누구일까?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효기장군은 고대의 무장 관직이다. 한무제때 이광(李廣)이 효기장군에 봉해진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사마천은 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漢)은 마읍성(馬邑城)으로 선우(單于)를 유인했다. 대군을 마읍의 옆 골짜기에 매복시켰고, 이광이 효기장군으로 호군장령을 이끌었다. 그때 선우가 눈치를 채고 가버린다. 한나라군대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다. 그후 4년이 지나, 이광은 위위(衛尉)로 장군이 되어, 안문관(雁門關)을 나가 흉노를 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록 촉한과 동오에는 모두 효기장군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위의 역사에는 3명의 효기장군이 있다. 그리고 이 3명은 모두 조위의 종실(宗室)이다. 그렇다면, 조위의 세 명의 효기장군은 도대체 누구일까. 첫번.. 2021. 5. 11.
자영(子嬰): 조고를 가볍게 제압하고, 항우에게 목숨을 잃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진나라는 진이세(秦二世)로 멸망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삼세(秦三世)를 언급하기도 한다. 진삼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로 자영이다. 그러나 그는 조고를 죽이고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일 이외에 다른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를 진삼세로 언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그가 즉위하기 전에 이미 진(秦)이 스스로의 지위를 낮추어 황제의 칭호를 취소하고, 진왕(秦王)으로 자칭하였으며, 통일전의 각 제후국과 같은 지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각국으로부터의 적대감을 약화시키고, 당시 제후들이 참여한 의군의 공격을 중단시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황위를 가지고 따진다면 진나라는 확실히 진이세로 끝난 것이다. 진한교체기 혹은 초한전쟁의 전날, 이 자영은 실제 아주.. 2021.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