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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185

[역사추리] 여공(呂公)은 왜 딸을 유방(劉邦)에게 시집보냈을까? 글: 역사대작회(歷史大炸燴) 만일 역사서의 설명대로라면, 여공이 당시 처음 유방을 만났을 때,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주요 이유는 유방이 처음 만났을 때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여공이라는 사람은 관상을 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여공이 처음 유방을 만났을 때, 즉시 유방은 아주 귀한 인물이 될 것이고, 나중에 분명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즉시 유방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일에 관하여, 사서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에 따르면, 당시 여공이 유방에게 이런 이유를 댔다. 신소호상인(臣少好相人), 상인다의(相人多矣), 무여계상(無如季相), 원계자애(願季自愛), 신유식녀(臣有息女), 원위기추첩(願爲箕帚妾) 번역하자면, "저는 관상을 볼 줄.. 2023. 9. 19.
황소(黃巢)는 왜 실패했는가?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의종(唐懿宗)은 황음사치(荒淫奢侈)하고, 지취금미(紙醉金迷)하며, 환관이 권력을 농단하고 ,번진이 지방에 할거했으며,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각지에서는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결국 대규모의 황소의 난(黃巢起義)이 일어난다. 황소는 875년에 거사하여, 884년 죽을 때까지 전후로 10년간 활약했다. 이 십년간은 881년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6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기본적으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뒤의 4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 즉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서, 궤불성군(潰不成軍), 궤멸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와 의 기록을 보면, 황소는 교.. 2023. 3. 16.
유방(劉邦)은, 주원장(朱元璋), 이연(李淵)과 비교하여, 가장 힘들게 천하를 얻었다. 글: 역사경전비(歷史經典沸) 유방은 대한(大漢)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대진(大秦)과 항우(項羽)였다. 이연은 대당(大唐)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대수(大隋)와 왕세충(王世充)이었다. 주원장은 대명(大明)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원조(元朝)와 진우량(陳友諒)이었다. 유방은 평민이고, 주원장도 평민이면서 거지까지 되었었다. 이연흔 황친국척이다. 그들의 출신으로 보면, 이연이 강산을 얻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연은 신분이 귀족이니, 평생 다른 사람들이 뛰어넘기 어려운 계층의 이점이 있었다. 즉, 그의 출발점이 아주 좋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욱 쉽게 최초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왕왕 한 사람에 있어서 일생에서 최초의 기반을.. 2022. 11. 21.
중국의 비극, 항우의 실패를 비웃으면서 시작되었다. 글: 주건군(朱建軍) 생당작인걸(生當作人傑) 사역위귀웅(死亦爲鬼雄) 지금사항우(至今思項羽) 불긍과강동(不肯過江東) 항우와 유방의 군사대결은 항우의 패배로 끝이 난다. 표면적으로 보면, 누가 최고통치자가 되느냐는 백성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 항우가 서초패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더라면, 중국의 미래는 아마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항우는 복고(復古)를 더욱 원했다. 그래서 분봉제도(分封制度)를 채택한다; 유방은 비록 일부 자제들에게 분봉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시황의 제도를 채택한다. 이것은 이번 글의 주제가 아니다. 내가 더욱 말하고 싶은 것은 항우의 실패라는 이 사건이 중국인의 심리에 미친 영향이다. 이 영향은 중국인에게 “성왕패구(成王敗寇, .. 2022. 6. 3.
항우(項羽)의 패망후 그 휘하의 4대맹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서초패왕 항우는 힘이 남달라서, 상대가 두려움을 느끼던 맹장이다. 동시에 항우의 휘하에는 4명의 맹장이 있었다. 그들은 항우를 따라 동정서토, 남정북전하였다. 거록지전에서는 진군 40만을 격파하기도 했고, 팽성지전에서는 유방의 56만대군을 물리쳐서 위명을 천하에 떨친다. 그러나, 항우는 결국 패망했다. 그렇다면 그의 휘하에 있던 4대맹장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가장 먼저 얘기해아할 맹장은 용차(龍且)이다. 용차에 관한 사료는 많지 않다. 그는 분명 일찌감치 항량, 항우를 따랐을 것이고, 계속하여 항씨집안이 심복이었다. 용차는 항량의 휘하에서 사마(司馬)를 맡았고, 동아전투에 참가하여 진군을 대파한다. 항우의 용인술에는 특징이 있다. "그가 즐겨 기용하는 사람은 항씨일족이거.. 2021. 6. 6.
조위(曹魏)의 효기장군(驍騎將軍) 3명은 누구일까?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효기장군은 고대의 무장 관직이다. 한무제때 이광(李廣)이 효기장군에 봉해진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사마천은 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漢)은 마읍성(馬邑城)으로 선우(單于)를 유인했다. 대군을 마읍의 옆 골짜기에 매복시켰고, 이광이 효기장군으로 호군장령을 이끌었다. 그때 선우가 눈치를 채고 가버린다. 한나라군대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다. 그후 4년이 지나, 이광은 위위(衛尉)로 장군이 되어, 안문관(雁門關)을 나가 흉노를 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록 촉한과 동오에는 모두 효기장군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위의 역사에는 3명의 효기장군이 있다. 그리고 이 3명은 모두 조위의 종실(宗室)이다. 그렇다면, 조위의 세 명의 효기장군은 도대체 누구일까. 첫번.. 2021. 5. 11.
자영(子嬰): 조고를 가볍게 제압하고, 항우에게 목숨을 잃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진나라는 진이세(秦二世)로 멸망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삼세(秦三世)를 언급하기도 한다. 진삼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로 자영이다. 그러나 그는 조고를 죽이고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일 이외에 다른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를 진삼세로 언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그가 즉위하기 전에 이미 진(秦)이 스스로의 지위를 낮추어 황제의 칭호를 취소하고, 진왕(秦王)으로 자칭하였으며, 통일전의 각 제후국과 같은 지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각국으로부터의 적대감을 약화시키고, 당시 제후들이 참여한 의군의 공격을 중단시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황위를 가지고 따진다면 진나라는 확실히 진이세로 끝난 것이다. 진한교체기 혹은 초한전쟁의 전날, 이 자영은 실제 아주.. 2021. 1. 25.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은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왜 동생 유항(劉恒)에게 황위가 넘어갔을까? 글: 조문사(朝文社) 한혜제 유영이 재위하던 기간동안 비록 명목상으로 황제였지만, 사실상 권력자는 모친인 여후(呂后)였다. 유영이 사망한 후, 전소제(前少帝) 유공(劉恭), 후소제(後少帝) 유홍(劉弘)이 전후로 즉위한다. 비록 이들 둘은 허수아비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만, 어쨌든 황제에 오르긴 한다. 사료에 따르면, "밤에, 각각 사람을 나누어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상산왕(常山王)과 소제(少帝)를 자택에서 주살했다." 바꾸어 말하면, 유영의 6명 아들 중에서, 2명은 황제에 올랐다. 전소제 유공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모두 반여집단(反呂集團)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에는 반여집단의 진평(陳平), 주발(周勃)등의 옹립하에,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이 즉위한다. 그렇다면, 왜 유영의 남은 .. 2020. 11. 25.
중국역사의 비극: 깡패가 영웅을 이기다 글: 두우관주(斗牛關注) 나는 진한(秦漢)의 역사를 마음 속으로 자세히 생각해 보아왔다. 관련서적도 많이 읽으면서, 느낌 점이 많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중화민족 역사의 길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범아강한자수원필주(犯我强漢者雖遠必誅, 강한 우리 한나라를 침범하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해 버리겠다)"이런 호연지기를 펼치는 말에 심취하고있을 때, 왕왕 소위 '강한(强漢)'의 배후에 천년간 이어지는 민족의 재난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항우의 죽음은 중국인들에게 "성왕패구(成王敗寇, 이기면 왕이고, 지면 도적이다)"를 기억시켰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존엄이라고는 없는 생활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유방의 성공은 후세에 가장.. 2020. 11. 21.
미중쟁패: 한흉(漢匈)쟁패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글: 공손책(公孫策) 미국이 중국에 정식으로 무역전을 전개한 후, 중국의 태도는 양보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관찰가들은 대부분 현단계에서 장악하고 있는 자원과 가용한 무기/수단을 가지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역사의 경험을 가지고 장기간으로 종심을 늘이는 방법을 시험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양강쟁패의 가능한 결과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흉쟁패100년 여기에서 비교대상으로 삼을 시기는 기원전200년부터 기원전100년까지의 100년간이다. 배경은 흉노칸국과 진,한제국의 쟁패이다. 그 이전에 중국은 전국시대였고, 북방초원민족은 '호(胡)'로 통칭되었다. 진(秦), 조(趙), 연(燕)은 모두 장성을 건설하여 호인을 막았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 2020.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