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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56

임소(林昭): 문혁때 총살당한 북대재녀(北大才女) 글: 천맥문사(阡陌文史)​1968년, 북대재녀가 옥중에서 20만자의 글을 남기고, 비밀리에 총살당하기 전에 그녀는 무릎꿇기를 거절하면서 소리쳤다: "역사는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공을 넘어 역사의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시간을 1957년의 무더운 여름 밤으로 되돌려 보자. 북경대학의 동문밖의 큰 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거기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북경대학 학생 장원훈(張元勛)은 대자보(大字報)를 붙여 공격의 촛점이 되었고, 사람들은 목이 쉬도록 소리쳤고, 감정은 격앙되고 있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돌연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서 큰 소리로 물었다: "그에게 도대체 비판투쟁받을 만한 부분이 어디있느냐?" ​"넌 뭐냐? 이름이 뭐냐?"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어두.. 2025. 3. 25.
황리중(黃立衆) 이야기 글: 궁장패점랑(弓張貝占郞)​1956년 가을, 20살의 황리중(黃立衆)은 미래에 대한 동경을 안고,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기 위하여, 북상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 그에게 익숙한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4년후, 그는 자신의 독립적인 사고로 북경대학에서 제명당하고, 남으로 돌아오는 열차에 다시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가을날의 저녁때, 남하하는 기차는 달려가고 있었다. 열차칸에는 귀향하는 여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창쪽의 자리에서 황리중은 두 명의 업무인원들 가운데 끼어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호구부가 꽉 쥐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개제학적(開除學籍)"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열차가 장강대교를 지나갈 때, 그는 돌연 힘을 주어 그 호구부를 찢어버렸고, 찢긴 조각이 바.. 2025. 3. 17.
모안영(毛岸英)의 죽음과 팽덕회(彭德懷)의 관계 글: 안창해(顔昌海) 오랫동안 중국당국의 공식 선전내용은 이러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한국전쟁)"를 위하여, 자진하여 장남 모안영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시켰고, 모안영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공식 선전내용의 모택동이 자신하여 장남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안영이 인민지원군에 들어간 것은 조직의 안배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과 팽덕회는 관련이 있을까? 사건의 내막은 이러하다: 1950년 10월 3일, 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다급한 도움요청서신을 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서 아군의 작전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월 5일, 모택동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10.. 2023. 5. 25.
손유세(孫維世): 주은래(周恩來) 양녀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0월의 어느 날, 당시 중국국무원총리로 있던 주은래는 사무실에서 공안부가 보내온 "손유세사망보고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금된 범죄인 손유세는 10월 12일 저녁 11시 공안부병원으로 보내어졌고, 지주막하출혈로 진답받았는데, 치료를 하였지만 살려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4일 오후 3시 30분 사망했다. 이에 보고드린다. 왕명소수(王明蘇修, '소수'는 소련수정주의'를 가리킴)특무전안조." 얼마 후 비서가 돌아와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손유세의 시신은 이미 '현행반혁명'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주은래의 양녀 손유세는 중국의 저명한 희극예술가(戱劇藝術家)로 1921년에 태어났다. 부친 손병문(孫炳文)은 주은래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19.. 2023. 4. 18.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 2023. 2. 25.
팽덕회(彭德懷) 죽음의 배후 글: 임휘(林輝) 1974년 12월 17일, 한 구의 시신이 301병원에서 비밀리에 화장장으로 보내어져 화장된다. 화장신청서에 쓰인 것으로는 "신청인: 왕규(王奎), 주소: 301, 사망자와의 관계: 부자, 사망자성명: 왕천(王川), 남, 76세, 번호: 0012690" 사실상, 이 왕천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바로 중국의 전 국방부장, 원수 팽덕회였다. 중공내부에서 팽덕회는 성격이 솔직하고, 충동적이며, 감히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항전시기, 팽덕회는 중공의 적극항전을 주장했다. 서북의 구석에 숨어서 병력과 힘을 비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바로 모택동의 '마작전'만 하라는 지도사상을 어기면서 진행한 것이다. 이 전투는 중.. 2023.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