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리중(黃立衆) 이야기
글: 궁장패점랑(弓張貝占郞)1956년 가을, 20살의 황리중(黃立衆)은 미래에 대한 동경을 안고,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기 위하여, 북상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 그에게 익숙한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4년후, 그는 자신의 독립적인 사고로 북경대학에서 제명당하고, 남으로 돌아오는 열차에 다시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가을날의 저녁때, 남하하는 기차는 달려가고 있었다. 열차칸에는 귀향하는 여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창쪽의 자리에서 황리중은 두 명의 업무인원들 가운데 끼어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호구부가 꽉 쥐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개제학적(開除學籍)"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열차가 장강대교를 지나갈 때, 그는 돌연 힘을 주어 그 호구부를 찢어버렸고, 찢긴 조각이 바..
2025. 3. 17.
팽덕회(彭德懷) 죽음의 배후
글: 임휘(林輝) 1974년 12월 17일, 한 구의 시신이 301병원에서 비밀리에 화장장으로 보내어져 화장된다. 화장신청서에 쓰인 것으로는 "신청인: 왕규(王奎), 주소: 301, 사망자와의 관계: 부자, 사망자성명: 왕천(王川), 남, 76세, 번호: 0012690" 사실상, 이 왕천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바로 중국의 전 국방부장, 원수 팽덕회였다. 중공내부에서 팽덕회는 성격이 솔직하고, 충동적이며, 감히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항전시기, 팽덕회는 중공의 적극항전을 주장했다. 서북의 구석에 숨어서 병력과 힘을 비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바로 모택동의 '마작전'만 하라는 지도사상을 어기면서 진행한 것이다. 이 전투는 중..
2023.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