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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무제)7

유수가 황제에 오른다는 "사상최고의 참어(讖語)"는 사실일까?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1 인터넷에는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다: 왕망이 황위를 찬탈한 후, 그의 국사(國師)인 유흠(劉歆)은 어느 날 <적복부(赤伏符)>라는 기서(奇書)를 보고 한 마다 참어를 추산해 낸다: "유수발병포부도(劉秀發兵捕不道), 사이운집용투야(四夷雲集龍鬪野), 사칠염제.. 2018. 12. 13.
유수(劉秀): 왜 신분도 고귀하지 않고, 뜻도 크지 않은 그가 동한을 개국할 수 있었을까?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유수는 동한의 개국황제이다. 역사에서 광무제(光武帝)라 칭한다. 역사상 광무제 유수에 대한 평가는 아주 노파. 그는 위로는 천명을 받아, 혼란을 수습하여 바로잡아 천하를 안정시키고, 한 마음으로 국가의 진흥을 꾀했으니, "중흥지주(中興之主)"라는 것이다. .. 2018. 7. 2.
광무제의 두 황후: 음려화(陰麗華)와 곽성통(郭聖通) 글: 사문(思文) 서한말기 하남 신야(新野)에 한 거부가 있는데, 성이 음(陰)씨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춘추전국시대의 명상 관중(管仲)의 후예라고 한다. 관중의 칠대손인 관수(管修)가 제나라에서 초나라로 가서, 음대부(陰大夫)에 봉해진다. 이때부터 '음'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한.. 2012. 2. 4.
유수(劉秀): 그는 어떻게 농민에서 황제로 되었는가? 글: 정계진(丁啓陣) 한나라때 유씨황족에 기인(奇人)이 나타난다. 만일 왕망의 찬탈이 없고, 난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한고조의 9대손 유수는 일생동안 아마도 약간의 학문을 지니고, 열심히 일하는 농민으로 살았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풍속최미(風俗最美)”, “유학최성(儒學.. 2011. 5. 9.
광무제 유수(劉秀): 중국역사상 전투를 가장 많이 치른 황제 글: 유계흥(劉繼興) 동한(東漢)의 개국황제인 광무제 유수는 강인한 의지와 인간적 매력으로 천하의 군웅을 끌어모아 천하를 차지했다. 그는 일개 평민에서 역사에 빛나는 명군으로 성장한다. 그는 전투에서 아주 용감했는데, 이는 역대제왕중에서 드물게 보는 경우이다. 곤양전투에서는 유수가 솔선.. 2010. 2. 14.
후한 광무제릉: 풍수설에 어긋나는 신비한 능묘 글: 문재봉(文裁縫) 중국고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살아서는 소주항주에 살고, 죽어서는 북망(北邙)에 묻힌다" 그 뜻은 바로 북망산이 풍수길지라는 것이다. 사후에 이곳에 묻힌다면 자손만대가 그 혜택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북망산의 건너편은 황하(黃河)이다. 이는 풍수설의 사상에 들어맞는.. 2009. 7. 20.
유수(劉秀): 부드러움(柔)으로 천하를 다스리다 글: 허화강(許禾鋼) 중흥황제 유수는 키가 크지 않았다. 겨우 7척3촌이었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 8척이상이어야 장대한 남자로 보는 기준에 따르면, 그는 '경량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량급인 그는 중량급의 인간적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역사상, 그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치국평천하의 고수.. 2008.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