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135

유인궤(劉仁軌): 당나라때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항왜민족영웅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당고종(唐高宗)때 낙양(洛陽)에 순우씨(淳于氏)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죽인 죄로 대리시(大理寺)에 압송되어 수감되었다. 그녀의 죄명은 마땅히 사형감이다. 그런데 재상(宰相) 이의부(李義府)가 마침 대리시를 시찰왔다가 순우씨를 보고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린다.​그리하여, 이의부는 대리시승(大理寺丞) 필정의(畢正義)에게 자신이 순우씨를 첩으로 삼고 싶으니, 방법을 찾아서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한다.​필정의는 그저 담량이 적은 관리였다. 재상의 분부를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몰래 희생양을 찾아서 순우씨와 바꾸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대리시경(大理寺卿) 단보현(段寶玄)에게 발각되고, 그가 고발하여 경성을 뒤흔들게 된다.​사안이 중대하다보니 당고종이 직접..

당덕종(唐德宗): 큰 일을 하려다, 큰 일을 당하다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나라는 이미 "부고모갈(府庫耗竭, 국고를 소모하여 고갈되다)", "금군미약(禁軍微弱)"의 곤경에 빠진다. 그러나, 제오기(第五琦), 유안(劉晏), 양염(楊炎)등 이재(理財)대가들의 노력을 거쳐, 당덕종 즉위초기인 건중원년(780년)의 국고세수는 이미 1305만관곡(貫斛)에 이른다. 정상적인 세입외에 매년 700만관곡에 이르는 염리(鹽利)세수도 있었다. ​그의 부친 당대종(唐代宗)의 즉위초기와 비교하면 국고수입은 몇배로 늘었다.​이런 자금은 당덕종의 허리를 튼튼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삭번(削藩)"전쟁을 시작한다.​그는 큰 일을 하고자 했다(大幹一場).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이를 피동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1​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

이백(李白)은 왜 과거시험을 치지 않았을까?

글: 야사미필가(野史未必假)​1​시선(詩仙) 이백(李白)은 평생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당현종(唐玄宗) 개원(開元)초년, 한 18살짜리 소년이 사천(四川) 재주(梓州) 장평산(長平山) 안창암(安昌巖)으로 가서 조유(趙蕤)라는 은사(隱士)를 방문한다.​조유는 촉중(蜀中)에서 유명한 잡가(雜家)이고, 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이는 종횡가(縱橫家)의 모략을 집대성한 책이다. 내용은 내정, 외교, 군사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고, 아주 실용적이었다.​이 소년은 어려서부터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기서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찾아가서, 조유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한 것이다. 조유는 젊은이가 솔직하고 시원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두 사람의 나이는 20여세였지만, 같은 나이대..

당나라의 도고(道姑)에 관하여

글: 기억군도(記憶群島)​당나라때의 4대여시인(女詩人)인 이야(李冶),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 유채춘(劉采春)중에서 앞의 3명은 모두 도고(道姑)이다. 당나라의 근 200명공주중에서 고양공주(高陽公主), 태평공주(太平公主), 화양공주(華陽公主), 안강공주(安康公主)를 포함한 15명이 도고로 지낸 적이 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무릇 천하의 도관(道觀)은 모두 1,687개소인데, 1,137개소는 도사(道士)이고, 550개소는 여도사(女道士)이다." 비록 이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당나라때 도고가 엄청난 수량으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정도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도교(道敎)는 중국의 전통종교이고, 한(漢)나라때부터 생겨났으며, 당(唐)나라때 전성기..

우문화급(宇文化及): 수양제(隋炀帝)를 죽인 인물의 일생

글: 사설신어(史说新语)​고대에 황권은 지고무상으로 황제는 천하의 최고통치자일뿐아니라,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는 무수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은 황위를 차지하기를 꿈속에서까지 추구하고, 심지어 목숨을 댓가로 내놓기도 한다. 모든 왕조에서는 황위를 둘러싼 명쟁암투가 벌어지고, 형제간에 반목하고, 부자간이 원수로 되는 비극이 무수히 발생했다.​풍운이 일어나는 궁정에서, 이런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황제의 곁을 지켰고, 황제의 신뢰를 깊이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내심의 욕망은 계속 팽창했다. 그는 더 이상 단지 황제의 신하로 지내는데 만족하지 못했고,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갖기를 갈망했다.​마침내, 어느 어두운 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계획을 실행한다. 그..

두보(杜甫)의 집안내력은...?

글: 풍지(馮至) 두보는 진(晋)나라의 명장 두예(杜預, 222-284)의 제13대손이다. 두예는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두예의 막내아들 두탐(杜耽)은 진(晋)의 양주자사(凉州刺史, 양주는 지금의 감숙성 무위)였고, 두탐의 손자 두손(杜遜)은 동진(東晋)초기 남으로 이주하여 양양(襄陽)으로 갔고, 위흥태수(魏興太守, 위흥은 섬서 안강 서북)를 지낸다. 그는 양양두씨(襄陽杜氏)의 시조이다. 두손의 아들 두건광(杜乾光)의 현손(玄孫)인 두숙비(杜叔毗)는 북주(北周)에서 협주자사(硤州刺史, 협주는 호북성 의창 서북쪽)를 지낸다. 두숙비의 아들 두어석(杜魚石)은 수(隋)나라때 획가현령(獲嘉縣令, 획가는 하남성에 있음)을 지낸다. 두어석은 두의예(杜依藝)를 낳으니 그는 공현령(巩縣令)이었다. 두의예는..

안록산(安祿山)의 종족과 종교배경은...? (하)

글: 영신강(榮新江) 3. 안록산의 종교신앙과 그 응집력 안록산의 종교신앙문제에 대하여 이전에 언급한 경우는 많지 않다. 안록산은 호인이므로 마땅히 다른 호인들처럼 자신의 종교신앙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그드인은 페르시아에 유래하고 소그드특징을 지닌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중국에서는 천교(祆敎)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안록산도 천교신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증명한다. 안록산은 이런 종교신앙을 충분히 이용하여, 여러 호족민중을 단결시켰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록산이 정치인물로서 동시에 다른 종교의 역량도 이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천보14년(755), 안록산은 유주 대민충사(大憫忠寺)의 동남부에 무구정광보탑(無垢淨光寶塔)을 건설했다. 방산석경(房山石經)에도 그..

안록산(安祿山)의 종족과 종교배경은...? (상)

글: 영신강(榮新江) 1. 안록산의 소그드(粟特)종족 특징 안록산, 사사명(史思明)등이 반란을 일으킨 종교적 배경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들의 종족 및 성장배경 즉 그들이 살았던 소그드족 취락의 상황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안록산의 종족에 관하여 일찌감치 1925년, 쿠와바라 지츠조우(桑原騭藏)가 요여능(姚汝能)의 에 근거하여, 강국(康國)출신의 소그드인이라고 하였다. 향달(向達)도 이 견해에 찬동했다. 진인각(陳寅恪)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안사의 난(安史之亂)때 당나라사람들이 말하는 "잡종호(雜種胡)"는 대다수의 경우 아홉성의 소그드인(九姓粟特人)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1955년, Edwin G. Pulleyblank(중국명 蒲立本)는 성명, 내원(來源)등 방면에서 상세히 안록산이 막북 돌궐칸국내부에서 생..

영태공주릉(永泰公主陵): 무측천 손녀의 묘에 얽힌 이야기...

글: 야독문사(夜讀文史) 1958년, 섬서(陝西) 함양(咸陽)부근의 양산(梁山)에서 채석노동자들이 산을 깎아 돌을 캐고 있었다. '쿠궁'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열린 깨트린 돌의 아래에 크기가 균일하고, 배열이 나란한 돌로 쌓은 석벽이 발견된다. 이는 분명 능묘(陵墓)이다. 공사팀은 즉각 공사를 중단하고, 현지의 문화재당국에 연락한다. 문물국은 소식을 들은 후, 즉시 고고인원을 파견하여 현장조사를 진행한다. 사료기재를 종합하여, 연구자들은 이곳은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와 여황 무측천(武則天)의 합장능인 '건릉(乾陵)'이라고 판단한다. 그후 몇년간 고고학자들은 건릉주변을 탐사했고, 차례로 여러개의 배장묘(陪葬墓)를 발견한다. 그중 1킬로미터 바깥의 배장묘는 전문가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 묘는 총면적이 ..

황소(黃巢)는 왜 실패했는가?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의종(唐懿宗)은 황음사치(荒淫奢侈)하고, 지취금미(紙醉金迷)하며, 환관이 권력을 농단하고 ,번진이 지방에 할거했으며,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각지에서는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결국 대규모의 황소의 난(黃巢起義)이 일어난다. 황소는 875년에 거사하여, 884년 죽을 때까지 전후로 10년간 활약했다. 이 십년간은 881년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6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기본적으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뒤의 4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 즉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서, 궤불성군(潰不成軍), 궤멸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와 의 기록을 보면, 황소는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