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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137

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2) 글: 팽배신문(澎湃新聞)​1894년 봄, 조선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조선왕조는 이를 진압할 힘이 없어, 중국주조선특사 원세개(袁世凱)의 적극적인 주장에 힘입어 조선왕조는 6월 3일 청정부에 구원병을 청한다. 6월 4일 광서제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육군을 조선에 보내어 난을 평정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청일전쟁의 육상전투의 역사는 여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조선파병명령을 받은 후, 이홍장은 휘하의 야전부대에서 선발한다. 그가 선발한 부대를 보면, 주로 근대화정도가 높고, 군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직예연군부대의 인원들이다. 그리고 직예제독 섭지초와 태원진총독 섭사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다. 그리고 윤선초상국에서 상선을 보내어 이들을 조선수도 한성의 남쪽에 있는 아산에 상륙시킨다. ​선두부대로.. 2024. 11. 12.
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1) 글: 팽배신문(澎湃新聞)​130년전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근대중국의 운명에 중요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전쟁패배의 결말은 직접적으로 1840년이후 중국이 군사자강으로 국가자강을 추진한 양무모델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며, 새로운 자강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이는 이 오래된 전쟁이 군사자체를 뛰어넘는 역사적인 귀감의 의미를 지니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일전쟁에 대한 반성은 시간을 초월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끊임없는 과정에 맞추어 청일전쟁도 자주 새롭게 조명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에서 폭넓은 주목을 받고, 토론하고 기념하고 있다. 자주 현실의 이슈에 대하여 청일전쟁을 꺼내어 귀감으로 삼곤 한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점이라면 역사상의 청일전쟁은 실제로.. 2024. 11. 12.
19세기 첫 10년: 중국해적의 황금십년(黃金十年) 글: 최애역사(最愛歷史)​건륭제는 자칭 중국의 태평성세를 창조하고 이어갔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신의 아들, 태청제국의 황위계승자 애신각라 옹염(顒琰)(즉 가경제)를 화약통 위에 올려놓았다.​화약통에 앉아 있게 된 가경제는 사고가 빈발하는 제국에 대하여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심신이 지쳐갔다.​힘겹게 3년을 참고나서 마침내 거탐 화신(和珅)을 무너뜨린다;누가 알았겠는가, 사천,호북의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일촉즉발이 되어 청나라중기 최대의 내부전란이 된다.그동안, 자금성안에서는 기이한 암살사건이 발생하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나중에 또 한 무리의 천리교도(天理敎徒)가 태감의 내부호응하에 황궁으로 쳐들어와, '한당,송명에도 없었던 일'이 일어난다.​이뿐아니라, 제국의 변방 - 화남.. 2024. 11. 11.
청나라 병사: "병(兵), 정(丁), 졸(卒), 용(勇)"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글: 설정사기(雪亭史記)​청나라궁중드라마를 보면 아마도 이런 모습에 익숙할 것이다. 머리에 붉은색의 두립(斗笠)을 쓰고 변발을 기른 청나라병사들의 상의 중간에 둥근 원 안에 "병(兵)", 혹은 "정(丁)", 혹은 "졸(卒)", 혹은 "용(勇)"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마치 상품에 브랜드를 붙인 것처럼.​병사들의 복장에 왜 이런 글자를 써놓았을까? 병, 정, 졸, 용은 각각 무슨 뜻일까?​어떤 사람은 그건 간단하지 않냐고 말하지 않을까 모르겠다.​병과 졸은 장기의 소병과 소졸처럼 청나라의 가장 하급의 병종으로 선봉으로 적진으로 돌진하는 역할을 해서, 대포받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느냐고. 한 마디로 말해서 장교가 뒤에서 명령만 내리면 병과 졸은 적진으로 돌진다가 죽는 병사일 것이라고.​정과 용은 다르다. .. 2024. 10. 29.
의화단(義和團)의 시말(始末) 글: 장명(張鳴)​모두 의화단은 산동(山東)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륙학자들은 의화단의 뿌리가 백련교(白蓮敎)같은 류의 민간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근거가 없다. 의화단내에 민간종교의 신도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의화단은 확실히 이들 종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대만학자는 의화단의 기원을 향단(鄕團)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근거는 그다지 없다. 그저 의화단의 전성기에 향단이 참여했다는 것이지, 그들이 의화단의 기원은 아니다. 그래서, 미국학자인 주석서(周錫瑞)는 아예 19세기말 20세기초의 산동사회 및 문화를 의화단의 기원으로 본다. 이렇게 말하면 안전하기는 안전하지만, 그러나 확실한 대답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실망스럽다.​의화단은 초기에 신.. 2024. 10. 25.
청일전쟁에서 청군의 어뢰는 몇척의 일본군함에 명중했을까? 글: 삼파도(三把刀)​19세기말기에 발발한 청일전쟁(중국에서는 中日甲午戰爭이라 함)에서 중국이 패전하면서 특히 북양수군이 전멸하면서 후세에 "갑오지치(甲午之恥)"라 불리고 있다. 일본군국주의의 외교와 군사압력으로 청정부는 패전후 굴욕적인 을 체결해야 했다. 이제 100여년이 지났고, 신중국은 이미 논쟁의 여지없는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정했고, 정치, 경제와 군사분야에서 모두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더 이상 예전의 굴욕사는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물망국치(勿忘國恥)'는 모든 사람들이 중국민적이 겪은 고통과 굴욕을 잊지 말아야 하고, 그래야만 더욱 굳건한 신념으로 미래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바다에서 100여년간 표류하던 어뢰(魚雷)가 발견되어, 다시 한번 그 당시의 갑오해전을 떠올리게 만들.. 2024.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