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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142

아편전쟁(鴉片戰爭) vs. 영중무역전(英中貿易戰): 오도된 역사진상으로 미중무역전을 성찰한다 글: 조효(趙曉)​1840년, 영국함대가 중국남해로 진격했고, 광주의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다. 중국인에 있어서, "근대굴욕사"의 시작이며,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의 시작점이었다. 이때부터, "아편전쟁"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고, 모든 중국학생들의 마음 속에서 "국치제1과목(國恥第一課)"이 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중국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국제역사학계에서 이번 전쟁을 "Opium War"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부른다:​The First Anglo-Chinese War(제1차중영전쟁)War for Trade(통상전쟁, 무역전)​호칭이 다른 것은 절대로 언어선택의 문제처럼 간단한 걳이 아니다. 이는 가치입장과 서사논리의 차이이다:​"아편전쟁.. 2025. 4. 14.
청나라때 환관의 급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글: 성도일보(星島日報)관음보살로 분장한 서태후의 곁에 위타보살(韋陀菩薩)로 분장한 이연영(오른쪽), 선재동자(善財童子)로 분장한 사거거(四格格, 경친왕 혁광의 넷째딸)(왼쪽)이 있다.고대봉건사회에, 다른 사람들보다 두각을 나타내려면 과거시험을 치르거나 군인이 되는 두 가지 길 외에 또 하나의 지름길이 있었는데 바로 환관으로 궁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환관이 되려면 첫번째 요건이 '궁형(宮刑)'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실체계에서 불가결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수입은 어느 정도였을까? 청나라때 환관의 봉록제도 및 기타수입원을 보면,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띄게 된다. 매월 급여를 받는 외에 숨은 수입원도 있었다. 원래 환관이 성지를 읽는 것도 풍성한 수입을 얻는 일이었다.​청나라 .. 2025. 4. 14.
"내무부(內務府)": 청나라의 가장 강력한 기구 글: 한림냉지식(翰林冷知識)​청나라의 관제(官制)중에 이런 기구가 있다. 총관(總管)은 반드시 만주인이 맡아야 하며, 한번도 한인(漢人)이 맡은 바가 없다.​대명이 자자한 납란명주(納蘭明珠), 연희요(年希堯), 부항(傅恒), 복륭안(福隆安), 복장안(福長安), 화신(和珅), 풍신은덕(豊紳殷德), 숙순(肅順), 문상(文祥)같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장친왕(莊親王) 윤록(胤祿), 질친왕(質親王) 영용(永瑢),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까지도 이 기구의 총관을 맡은 바 있다.​이런 것만 보더라도 이 기구가 절대로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뿐아니라, 나중에는 심지어 황제를 기만하기까지 했다. ​이 기구는 바로 내무부(內務府)이다. 전칭은 "총관내무부(總管內務府)"이다.. 2025. 2. 27.
대청(大淸): "기실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 글: 흑조음(黑噪音)​제목만 보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말씀드리면,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려는 것이 아니라, 대청의 조정에서 국내에 선전할 때 확실히 청일전쟁(중국에서는 甲午戰爭이라 함)에 승리했고, 일본에 이겼다.​만일 1894년에서 1895년에 살았던 중국인이고, 또한 청일전쟁에 관심이 있었다면, 당신은 분명히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할 확률은 99.9%라고 여겼을 것이다.​왜냐하면 당신이 보고 들을 수있는 관방매체와 선전에서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알다시피,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정부는 일본에 참패했고, 근대중국에서 처음으로 진정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이며, 청나라조정이 붕괴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어쨌든 서양열강에게 패배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전의 제자였던 동쪽이웃나라 .. 2025. 1. 20.
아편전쟁: 군사상의 무능, 도덕상의 무치 글: 최애역사(最愛歷史)​한쪽은 강경한 태도의 청나라 흠차대신(欽差大臣)이고, 다른 한쪽은 절대로 타협이 없는 영국의 주중상무감독이다. 이들은 "교흉(交凶, 흉수를 내놓는 것)"과 "구결(具結, 책임을 인정하는 서면)"문제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는 1839년 중국-영국관계의 주요 내용이다.​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 1801-1875)의 고집을 임칙서(林則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광동순무(廣東巡撫)와 이 일에 대해 언급할 때, 임칙서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의혹을 얘기한다: "엘리엇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출로가 없는데, 왜 마음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임칙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영이(英夷)"두목은 왜 이 두 가지 '천경지의(天經地義)'한 일에 대하여 .. 2024. 12. 23.
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2) 글: 팽배신문(澎湃新聞)​1894년 봄, 조선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조선왕조는 이를 진압할 힘이 없어, 중국주조선특사 원세개(袁世凱)의 적극적인 주장에 힘입어 조선왕조는 6월 3일 청정부에 구원병을 청한다. 6월 4일 광서제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육군을 조선에 보내어 난을 평정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청일전쟁의 육상전투의 역사는 여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조선파병명령을 받은 후, 이홍장은 휘하의 야전부대에서 선발한다. 그가 선발한 부대를 보면, 주로 근대화정도가 높고, 군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직예연군부대의 인원들이다. 그리고 직예제독 섭지초와 태원진총독 섭사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다. 그리고 윤선초상국에서 상선을 보내어 이들을 조선수도 한성의 남쪽에 있는 아산에 상륙시킨다. ​선두부대로.. 2024.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