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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64

게네필(格嫩皮勒): 몽골의 마지막 황후 글: 장생전(張生全)1938년 5월, 스탈린은 게네필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비록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게네필은 여전히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는다. 그녀가 감옥을 나설 때, 한 촬영사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찍었다. 이어서 그녀는 담담하게 형장으로 걸어갔다. 총소리가 들리고 게네필을 핏물 속에 쓰러지면서 그녀의 비참한 운명은 끝이 난다. ​게네필의 운명은 그녀가 19살 되던 해에 전환점이 온다.​그때는 1923년 7월이었고, 몽골황제 제쮠담바 복드칸(哲布尊丹巴 博克多格根)은 황후가 병사하자 전국에 선비령(選妃令)을 내린다. 수천, 수만의 적령기여성중 19세의 게네필은 목민(牧民)의 딸로 신분이 아주 한미했지만, 그녀는 비교적 예쁜 용모로 수천, 수만의 적령기여성중 두각을 나타내어 여러 단계의 .. 2024. 12. 3.
"중화민국"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글: 마비명(馬悲鳴)​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75세 생일을 지냈다. 10월 5일, 라이칭더(賴淸德)는 중화민국이 곧 113세 생일인 쌍십절(雙十節)을 맞이하는데 즈음하여 말하기를, 나이로 따지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절대로 중화민국 인민의 "조국"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중화민국은 아마도 중화인민공화국 75세이상 민중의 조국일 것이라고 했다.​인터넷에는 이로 인하여 공산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180도 입장을 바꾸어 중화민국 및 그 전총통 장공(蔣公, 장개석)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정확한 것도 아니다.​국민당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반란단체라고. 그러나 기실 중화민국도 반란단체로 조직된 정권이다.​경자귄비의.. 2024. 10. 11.
북양육진(北洋六鎭)의 연혁과 최후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갑오년 청일전쟁이후인 1895년, 청나라정부는 광서안찰서(廣西按察使) 호율분(胡燏棻)이 천진에서 신군(新軍)을 편성훈련시킨다. 11월에는 조선에서 돌아오고 같은 회군계(淮軍係, 이홍장계열)인 원세개(袁世凱)가 호율분을 대체한다. 1897년 원세개는 직예안찰사(直隸按察使)로 승진하고, 신군은 무위우군공위경사(武衛右軍拱衛京師)로 개편된다; 1899년 겨울 무위군은 원세개가 산동순무(山東巡撫)로 가면서 따라간다. 1901년 11월 원세개는 이홍장의 뒤를 이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된다. 1904년 원세개는 왕영해(王英楷), 오장순(吳長純), 단기서(段祺瑞)의 3진(鎭)을 북양상비군(北洋常備軍)으로 건립하고, 무위우군은 제4진, 제5진으로 확대개.. 2023. 1. 25.
중국공산당 건당(建黨)의 내막 글: 방주자(方舟子)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제1차전국대표대회("1대")를 개최한 것을 중국공산당 성립의 표지로 본다. "1대"는 7월 1일에 개최된 것이 아니다. 이 날짜가 공산당건립기념일로 정해진 것은 모택동이 임의로 지정한 것이다. 공산당이 성립된 초기에는 도망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매년 건당을 경축하지도 못했다. 1938년 공산당이 섬서북부에 근거지를 마련 하고, 안정되고난 후에 비로소 모택동은 매년 건당을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만, 모택동이 비록 1대 대표이고, 기록을 책임진 대표이기는 하지만, 자신도 "1대"를 도대체 언제 개최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연안에는 또 한명의 "1대"대표인 동필무가 있었다. 모택동은 동필무를 찾아가서 물어본다. 동필무도 구체적으로 어느 날에 개최했는지.. 2021. 12. 23.
중국공산당 1대성립의 진상 글: 장우진(張又晋) 2009년 필자는 귀국하여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상하이를 거쳐가게 되었고, 며칠간 머물렀다. 그동안 친구들과 함께 중공1대구지(舊址)로 갔다. 거기는 지금 역사박물관이다. 필자가 1대박물관을 참관할 때 두 가지 소소한 사건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나는 13개의 실제사람과 같은 크기의 조각상이다. 당시 회의를 개최한 장소에는 당시의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13명의 1대대표들이 탁자를 둘러싸고 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 의장의 위치에는 모택동이 서 있다. 기우가 헌앙하고 신채가 혁혁하며 정신이 환발하며 오른손을 들어 휘두르며 중국인민의 나아갈 길을 가르키고 있다. 동필무, 이달등은 양측에 앉아 있으면서 존경하는 눈빛으로 위대한 영수 모택동을 올려다 보고 있다. 장국도, .. 2021. 12. 2.
타이타닉호의 중국인생존자 6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종의(鍾毅), 오상울(吳尙蔚) 1912년 4월 14일, 23:40경 당시 호화 여객선 '영원히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던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에서 빙산에 부딛쳤다. 1,514명의 승객은 차가운 대서양 깊은 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생존한 700여명의 승객은 바다 위에서 4,5시간동안 사투를 벌였으며 마침내 구원온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사고의 여파는 여러 해동안 지속되었다. 1998년 제임스 카메론감독의 는 더욱 개인적인 각도에서 이 사건을 재현했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경전으로 남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타이타닉호의 생존자 중에는 6명의 중국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타이타닉호가 출항한 1912년은 신구교체의 시기였다. 1차대전이 곧 발발할 .. 2021.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