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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97

장정(長征)때 장국도(張國濤)를 지지한 홍군장령(紅軍將領) 3명의 최후는...? 글: 성장고사(成長故事)​인민해방군역사상, 하나의 특수한 집단이 있다. 그들은 일찌감치 혁명에 투신하였고, 당내에서 중요한 직무를 맡았었지만, 나중에 지위는 크게 낮아진다.​이런 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이들 장령들이 혁명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거나, 병이 들었거나, 노선착오문제를 범했기 때문이다.​장정(長征)도중 장국도는 '분열주의'를 시도했고, 3명의 장령이 장국도를 지지한다. 그 세 명은 각각 진창호(陳昌浩), 하장공(何長工)과 나병휘(羅炳輝)이다.​태도가 가장 확고했던 사람은 진창호이다. 진창호는 홍군내부의 중량급인물이고, 허세우(許世友), 진석련(陳錫聯)과 서해동(徐海東)이 모두 진창호의 부하들이었다.​진창호는 모스크바유학경력이 있을 뿐아니라, 풍부한 실전전투경험도 가지고 있었으며, 업무능력도 매우 강.. 2024. 12. 3.
향충발(向忠發):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중공최고지도자, 그는 변절했는가? 글: 조대부(趙大夫)​중공은 탄생이후 지금까지 이미 100년여가 지났다. 백년의 역사과정에서 현제 세계최대의 당내에 당의 1인자가 된 사람을 보면 손가락으로 꼽을만하다. 아래는 역대중공최고지도자의 목록이다:​중앙국서기: 진독수(1921년 7월 중공1대에서 선거로 선임)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진독수(1922년 7월 중공2대에서 선거로 선임)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진독수(1923년 6월 중공3대에서 선거로 선임)중공중앙총서기: 진독수(1925년 1월 중공4대에서 추선)중공중앙총서기 : 진독수(1927년 4월 내지 5월 중공5대에서 추선)중공중앙총서기: 향충발(1928년 6월 내지 7월 중공6대에서 선거로 선임)(주: 1931년 향충발이 국민당에 체포되어 살해당한 후, 왕명이 대리함)중공중앙총서기: 박고(진방헌).. 2024. 10. 17.
문강(文强): 모택동의 사촌동생은 왜 국민당의 특무가 되었는가? 글: 유혜빙(游慧冰)​모택동의 사촌동생인 문강(文强)은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그는 일찌기 중국공산당의 중요간부였고, 북벌전쟁, 8.1남창의거에도 참가했으며, 사천성위상위 겸 군위서기, 천동특위서기를 맡았었다. 나중에 공산당을 떠나 국민당 '군통'의 특무와 '국군'의 장교가 되어 회해전투에 참가했을 때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26년간 지내다가 1975년에 비로소 특사를 받아 석방된다.​출옥후에 문강은 제6기, 네7기 전국정협위원, 민혁중앙 감찰위원, 황포군관학교 동문회이사등의 직위를 지낸다. 그는 광범위한 인맥을 이용하여 해협양안의 교류업무를 전개했고,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해 공헌했다. 그는 등소평을 존경하여, "나는 라는 책을 한권 쓰겠다"고까지 한다. 아쉽게도 그가 글을 쓰기.. 2024. 5. 28.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글: 방유(方維) 민국시기는 중국문화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대사(大師)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아니라, 개성도 충만했다. 그리하여 춘추전국과 위진남북조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1. 장태염(章太炎) 1929년, 상해 는 을 발행했다. 에서 108명의 영웅호한을 정한 형식을 모방하여당시 문화계의 대사들의 서열을 매긴 바 있는데, 1위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장태염이었다. 청화대학 국학원이 성립될 때, 가장 먼저 확정된 교수 명단에는 단지 3명이 있었다: 장태염,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 그러나, 장태염은 고사하고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뒤의 두 사람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찌기 양계초에 대하여는 "만일 양계초 같은 무리라면, 역사에 한 글자라도 들어갈 수 .. 2023. 5. 30.
진독수(陳獨秀)는 왜 모스크바의 초청을 5번이나 거절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중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연원은 10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당시의 러시아공산당(이후 소련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꿈)이 장악하고 있던 코민테른(공산국제)은 러시아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대표를 상해로 파견하여 반드시 러시아공산당의 지시를 듣는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진독수는 중공의 초대 당수(黨魁)로 1921년 중공1대부터 1927년 중공5대까지, 진독수가 중공의 당수를 맡았다. 1927년에 이르러, 코민테른의 극동지부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끈 '대혁명'이 실패로 끝난다. 중공당수 진독수는 일거에 중시지적(衆矢之的)이 된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코민테른은 거듭하여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진독수는 모두 거절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 2023.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