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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94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글: 방유(方維) 민국시기는 중국문화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대사(大師)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아니라, 개성도 충만했다. 그리하여 춘추전국과 위진남북조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1. 장태염(章太炎) 1929년, 상해 는 을 발행했다. 에서 108명의 영웅호한을 정한 형식을 모방하여당시 문화계의 대사들의 서열을 매긴 바 있는데, 1위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장태염이었다. 청화대학 국학원이 성립될 때, 가장 먼저 확정된 교수 명단에는 단지 3명이 있었다: 장태염,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 그러나, 장태염은 고사하고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뒤의 두 사람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찌기 양계초에 대하여는 "만일 양계초 같은 무리라면, 역사에 한 글자라도 들어갈 수 .. 2023. 5. 30.
진독수(陳獨秀)는 왜 모스크바의 초청을 5번이나 거절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중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연원은 10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당시의 러시아공산당(이후 소련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꿈)이 장악하고 있던 코민테른(공산국제)은 러시아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대표를 상해로 파견하여 반드시 러시아공산당의 지시를 듣는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진독수는 중공의 초대 당수(黨魁)로 1921년 중공1대부터 1927년 중공5대까지, 진독수가 중공의 당수를 맡았다. 1927년에 이르러, 코민테른의 극동지부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끈 '대혁명'이 실패로 끝난다. 중공당수 진독수는 일거에 중시지적(衆矢之的)이 된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코민테른은 거듭하여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진독수는 모두 거절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 2023. 4. 21.
향충발(向忠發)과 그의 체포전후 (2) 글: 오기민(吳基民) 3. 향충발 체포전후 1931년 4월 24일, 중공정치국후보위원이며 정치보위공작을 책임지던 고순장(顧順章)이 무한에서 체포되고, 바로 변절한다. 주은래는 즉시 상해의 중공중앙기관의 대이전조치를 취한다. 향충발은 프랑스조계 선종로(善鐘路)의 거처에서 이사를 나와 소사도로(少沙渡路)의 주은래의 거처로 옮겨간다. 그와 동거하던 여인 양수정은 임필시(任弼時)의 부인 진종영(陳琮英)과 함께 정안사(靜安寺) 주변의 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모든 것을 천의무봉하게 처리하고 소리소문없이 처리했다. 그러나 암류는 지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순장은 남경에서 그가 원래 홍대(紅隊)에 있을 때의 조수인 진련생(陳蓮生)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주은래와 향충발을 체포하지 못했다고. 그는 바로 진련생에게 .. 2023. 4. 21.
향충발(向忠發)과 그의 체포전후 (1) 글: 오기민(吳基民) 향충발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공6대때 중앙정치국 주석 겸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주석에 당선된다. 사람들은 그를 습관적으로 '총서기'로 불렀다. 사건이 많았던 1931년 6월 22일 체포되었고, 변절한다. 그리고 24일 사망한다. 최근에 출판된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쓴 에서는 그의 체포에 대하여 단지 두 마디만 적혀 있다: "6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주석을 맡았던 향충발이 상해에서 체포된 후 변절한다. 이 두 사람(향충발과 같은 해 4월에 체포되어 변절한 고순장(顧順章)을 가리킴)의 변절은 중공중앙기관과 중앙지도자의 안전에 극히 큰 위협을 조성했다" 오랫동안 향충발에 대한 평가는 아주 각박했다. 노동자출신이기 때문에 '.. 2023. 4. 21.
엽문(섭문, 葉問):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 글: 이광송(李廣松) 일본인과 싸우고 미군과 싸우는 는 네티즌들에게 핫이슈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여러분들에게 fact check를 해드리겠다. 황바이밍(黃百鳴)이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엽문에 관한 사실들에 대하여. "진짜 엽문"은 기실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첫째, 엽문은 외국인과 싸워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는 일본장교, 영국권투선수, 미군을 이겼다고 하지만, 기록이 없다. 둘째, 엽문은 1949년 중국에서 홍콩으로 도망친다. 일본인을 피해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공산당이 집권하자 도망친 것이다. 섭문은 당시 '대도항(大逃港, 홍콩으로의 대탈주)'에 가담한 수십만 중국인중 한명인 것이다. 셋쨰, 엽문과 브루스리(李小龍)이 실제 만난 것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다. 브루스리가.. 2023. 3. 8.
백숭희(白崇禧)의 부인 마패장(馬佩璋)의 일생 글: 문사왕왕(文史旺旺) "사생계활(死生契闊), 여자성열(與子成說), 집자지수(執子之手), 여자해로(與子偕老)" 이는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사랑의 시이다. '여자해로'라는 문구는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남녀들이 바라는 바인가? "이득무가보(易得無價寶), 난득유정랑(難得有情郞)"(무가지보를 얻기는 쉽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는 어렵다).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는 쉽다. 그러나 서로 도우면서 인생의 고난을 함께 겪고, 인생의 길에서의 비바람을 함께 막으며 손에 손을 잡고 흰머리가 될때까지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패장(馬佩璋)이다. 현지에서 명망있는 마씨집안의 장상명주이다. 부친 마건경(馬建卿)은 현지의 명망있는 선비였.. 2023. 3. 6.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2) 글: 하월명(賀越明) 홍콩 창간에 막후연락 및 총편집을 맡다. 당납의 중공당원신분은 그와 두번이나 동료로 함께 일했던 원로신문인 서주성이 가장 먼저 밝혔다.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밝힌다. 그는 1980년대초에 (상해인민출판사1981년판)에 "오소주(吳紹澍)와 "라는 절에서 1947년 5월 가 국민당정부에 의해 폐쇄당한 후, 다음 해에 오소주와 함께 대만으로 간 일을 언급한다. "우연하게도 상해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당원동지가 홍콩에서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서 나에게 말했다. 민혁(民革)이 이미 홍콩에 성립되었고, 기관보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임조(李任潮) 선생은 나에게 가서 주재해달라고 했다..." 홍콩에 성립된 민혁의 전칭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로 주석은 이제심(李濟深)으로 자가 '임조'였다.. 2023. 3. 4.
백선용(白先勇): 나의 모친 마패장(馬佩璋) 글: 백선용 모친 마패장 여사는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마유기(馬維琪)는 과거출신으로 흥안현령(興安縣令)을 지냈다. 모친은 장녀였으며, 친남동생이 한명있고, 서출남동생, 여동생 둘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모친을 매우 아꼈고, 그의 장상명주(掌上明珠)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모친이 시집을 가기 전에, 그녀는 소매에 열쇠를 가득 달고 다니면서, 집안일을 관장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마작을 두기만 할 뿐 집안일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은 젊었을 때부터 혼자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면을 보였다. 건괵불양수미(巾幗不讓鬚眉)의 기백을 보였다. 어렸을 때, 모친의 조모는 그녀에게 전족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발이 아프자 할머니를 발로 차고 방문을 뛰쳐나가 난리를 펴서 결국 전족을 하지 않았.. 2023. 3. 2.
장한수(張恨水): 3명의 부인, 13명의 자식, 민국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작가 글: 습문화(拾文化) 장한수가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바로 글솜씨이다. 양으로 따지자면 그는 민국시대 작가들 중에서 절대로 첫손에 꼽힐 것이다. 50여년간 집필하면서 3000여만자를 썼다. 동시에 여러 소설을 연재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최고기록은 동시에 7편의 장편소설을 연재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스토리라인, 그렇게 많은 인물이 있지만, 한번도 헷갈리지 않았고, 한번 글을 쓰면 고치지도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한손으로 소설을 쓰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마작을 했는데, 둘 다 실수없이 해냈다는 것이다. 질로 따져도 그는 팬들사이에서는 대가중의 대가이다. 진인각(陳寅恪)이 두 눈이 멀고 나서, 매일 친구 오복(吳宓)에게 부탁해서 장한수의 소설 을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병상의 무료함을 달랬다고 한.. 2023.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