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85

의화단(義和團) 고위층의 최후

글: 오일주(吳一舟)​1901년초, 청정부는 서방열강의 조건을 받아든다. 그중에는 강력하게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12명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재의(載漪), 재란(載瀾), 재훈(載勳), 영년(英年), 조서교(趙舒翹), 육현(毓賢), 계수(啓秀), 서승욱(徐承煜), 서동(徐桐), 강의(剛毅), 이병형(李秉衡), 동복상(董福祥)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각각 달랐다. 어떤 사람은 처형당하고, 어떤 사람은 유배를 가고, 어떤 사람은 단지 파직당했으며, 어떤 사람은 전사했다.​서태후는 서안으로 도망치는 도중에 군대에 의화단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의화단은 소탕되었는데, 그 의화단의 고위층들(서태후에 의해 의화단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사람, 혹은 조정에서 의화단을 적극 지지한 대신)은 어떻게 할 것..

함풍제(咸豊帝)의 단명을 초래한 4가지 습관...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청나라말기 함풍제의 짧은 일생은 거의 비극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대청제국의 말기황제로서 외적의 침입과 내란이 빈번한 곤경에 직면해야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생활방식은 그의 일생을 비극으로 이끌었다. 함풍제의 재위시 그의 여러가지 행위와 그의 기호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함풍제의 운명은 일찌감치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함풍제의 4가지 애호(愛好)가 실로 그를 요절하게 만들었다. ​함풍제의 단명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생활방식이 그렇게 만들었다. 즉위초기, 함풍제의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한창 나이여서 원래 대청왕조를 진흥시키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실망시킨다..

유춘림(劉春霖): 중국과거역사상 마지막 장원(狀元)

글: 세설신어(細說新語)​중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독서인의 유일한 출로와 추구하는 목표였다. 천년이래 무수한 한문자제(寒門子弟)는 공명을 얻고 운명을 바꿀 희망을 품고, 밤낮으로 등불아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그러나 과거제도는 청나라말기에 점차 폐지된다. 그렇다면 고대 장원의 수준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의 마지막 장원의 답안지를 보면 그의 글씨체에 현대인들이 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그렇다면 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누구일가? 그의 일생은 어떠했을까?과거지로(科擧之路)와 서법천부(書法天賦)​​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유춘림(劉春霖)이다. 1872년, 그는 직예(直隸) 숙녕(肅寧)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유씨집안에서는 교육을 아주 중시했다...

정여창(丁汝昌): 태평천국의 장수에서 북양수군의 제독까지...

글: 김왜취담(金娃趣談) 1861년 이월, 정여창은 정학계(程學啓)를 따라 안경성(安慶城)을 오랫동안 포위공격하고 있던 상군(湘軍)에 투항한다. 이로써 그는 7년간에 걸친 태평군의 생애를 마감하고, 증국번(曾國藩)이 조직한 상군의 일원이 된다. 이때, 정여창은 겨우 25,6세의 나이였고, 정학계가 이끄는 여러 심복장수들 중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인물도 아니었다. 아무도 그가 나중에 중요한 직위인 북양수군의 제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여창과 비교하자면, 정학계야말로 증국번형제가 가장 회유하고 싶어했던 태평군의 지휘관이었다. 상군이 안경을 포위공격할 때, 정학계가 군대를 이끌고 분전하며 저항하였기 때문에 공성전은 계속 실패했다. 오랫동안 싸우면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증국번 형제는 고민이 컸다...

1861년: 함풍제(咸豊帝)와 공친왕(恭親王)

글: 언구림(言九林) 1861년, 러시아는 농노제를 폐지했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청제국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미묘한 전환점에 놓여 있었다. 이 해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청나라조정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성립되었고, 다른 하나는 함풍제가 열하(熱河)에서 사망한다. 1. 함풍제의 존엄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이 해의 1월에 성립된다. 나중에 '총리아문'이라고 약칭된다. 이전에 외국관련업무를 처리하던 중앙기관은 "무이국(撫夷局)"이었는데, 이는 임시기구였다. "무이"에서 "총리각국사무"로 바뀐 배후에는 청나라조정의 외교에 대한 심리상태가 미묘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풍제 혁저(奕詝)에 있어서, 도광제(道光帝) 시절 '영이(英夷, 영국오랑캐)'에 패배한 것..

조복전(曹福田): 의화단(義和團)의 2인자

글: 여소뢰(余少鐳) 오랫동안 의화단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ㅇ니상은 '봉양필반(逢洋必反)' '봉양필멸(逢洋必滅)' 즉 외국 것은 모두 반대하고 없앤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소위 '양'자가 붙은 물건은 국가를 따지지 않고, 브랜드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서양인이 중국을 해치기 위해 가져온 것이니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화단이 한양멸양(恨洋滅洋)한 사료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그저 뒤져보기만 하면 나온다. 예를 들면, 청말민초의 광동 순덕 사람 나돈융(羅敦曧)이 쓴 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의화단은 철로, 전선은 모두 서양인들이 중국을 해하지 위한 것이니 철로는 불태우고 전선은 철거한다. 무릇 집안에 서양책, 서양지도를 보관하고 있으면 모두 '이모자(二毛子)'이니, 잡아서 반드시 ..

동치제(同治帝)의 사인은 매독인가 천연두인가?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동치13년말, 대청은 다시 한번 황제가 바뀌게 된다. 조정은 대행황제(사망한 전임황제를 가리킴)의 유조(遺詔)를 반포한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짐은 몸이 원래 강건했으나, 금년 십일월에 천화(천연두)에 걸렸다. 조심해서 조리했으나, 날이 갈수록 원기가 약해지고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전에 우리는 얘기했었다. 청나라황제의 유조에 사인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동치제는 명확하게 유조에서 자신이 천연두로 사망한다고 적었다. 에도 편자는 다시 한번 동치제가 천연두고 사망했다고 적는다: "천연두에 걸려 성체가 나빠지고 결국 신민을 떠나게 되었다." 청나라황제중에서 동치제는 수명이 가장 짧은 황제이다. 그전까지 이 기록보..

가경(嘉慶)연간, 좋은 인재가 많았는데 왜 점점 쇠퇴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는 아마 건륭제만이 자칭 천조상방(天朝上邦)이라 자처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강건성세(康乾盛世)이후 청나라는 아주 명확하게 쇠퇴현상을 보인다. 역사의 철칙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 시간이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왕조는 거의 수백년의 기간동안 존속한다. 가경제때가 아마 흥성하다가 쇠퇴하는 기로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륭연간에 건륭제는 여러번 강남을 순유하고,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현상이 엄중해졌다. 옹정제때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정무를 보지도 않았고, 쇄국정책을 쓴다. 번성하던 대청왕조는 이때부터 이미 쇠퇴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한(漢)나라의 경우를 보면, 한편으로 진나라에서 모든 힘을 쏟아서 건설한 각종 도로와 성곽으로 이미 아주 견..

사격격(四格格): 만청제일미녀(晩淸第一美女)

글: 독보심해유(獨步深海遊) 중국역사상의 미녀를 얘기하자면, 대다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사대미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나 예뻤는지를 말하자면, 고대인들은 그저 구름잡는 표현을 썼다. 그녀들은 "침어낙안(沉魚落雁)"이라든지, "폐월수화(閉月羞花)"라든지. 이런 말은 현재인들이 보기에 약간 과장된 것같지만, 약간 상상을 해보면, 그래도 여전히 용모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여자의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문구를 얘기하자면, 조위의 문학가 조식의 그 를 꼽아야 할 것이다. 조식은 에서 낙신의 용모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모습(天人之姿)로 묘사했는데, 후세의 무수한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에게는 고대인들의 미녀에 대한 찬미가 과장된 점이 있다고 느낄 것이..

청나라 흑마장군(黑馬將軍) 탑제포(塔齊布)의 전설

글: 두약(杜若) "함풍(咸豊)연간, 청군은 흑마를 한 마리 얻는데, 이 말은 사람을 보면 발로 걷어차고, 물어버렸다. 오직 탑장군을 보자 고분고분해서 말을 잘 들었다. 적군의 추격을 받았을 때, 흑마는 땅구덩이에 몸을 숨기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청나라말기 상군(湘軍)에 탑제포(1816-1855)라는 명장이 있었다. 자는 지정(智亭)이고, 만주 팔기 상황기(鑲黃旗)출신이다. 처음에 그는 화기영(火器營) 조총호군(護軍)에서 삼등어전시위로 발탁된다. 함풍제 초기, 그는 호남으로 파견된다.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하여, 여러번 조정의 발탁을 받는다. 그는 제독(提督)에 오른 후, 왼팔에 네 글자 "충심보국(忠心報國)"을 새긴다. 탑장군에게는 한 마리의 전마(戰馬)가 있었는데 말 중에서 용구(龍駒)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