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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86

왜 동치제(同治帝)를 청나라황제중 가장 무능하다고 말하는가 글: 안금(安錦)​함풍11년, 내우외환을 겪은 후의 함풍제 애신각라 혁저(奕詝)가 승덕 피서산장에서 병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금성이외에서 병사한 두번째 황제가 된다(북경으로 들어오기 전의 누르하치나 홍타이시는 제외).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애신각라 재순(載順)은 자연스럽게 황위를 승계한다. 먼저 숙순(肅順)등 찬양정무팔대신(贊襄政務八大臣)이 정한 새 연호는 "기상(祺祥)"이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등과 손을 잡고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팔대신을 주살하고 정권을 탈취한 후 연호를 "동치(同治)"로 바꾼다.​이때부터 양궁태후(兩宮太后)(즉, 동태후 자안태후와 서태후 자희태후)가 수렴청정하고, 공친왕 혁흔이 정부수뇌인 의정왕이 된다.​'학습지진아' 황제​동치제 재순은 이런.. 2025. 1. 6.
의화단(義和團) 고위층의 최후 글: 오일주(吳一舟)​1901년초, 청정부는 서방열강의 조건을 받아든다. 그중에는 강력하게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12명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재의(載漪), 재란(載瀾), 재훈(載勳), 영년(英年), 조서교(趙舒翹), 육현(毓賢), 계수(啓秀), 서승욱(徐承煜), 서동(徐桐), 강의(剛毅), 이병형(李秉衡), 동복상(董福祥)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각각 달랐다. 어떤 사람은 처형당하고, 어떤 사람은 유배를 가고, 어떤 사람은 단지 파직당했으며, 어떤 사람은 전사했다.​서태후는 서안으로 도망치는 도중에 군대에 의화단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의화단은 소탕되었는데, 그 의화단의 고위층들(서태후에 의해 의화단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사람, 혹은 조정에서 의화단을 적극 지지한 대신)은 어떻게 할 것.. 2024. 11. 4.
함풍제(咸豊帝)의 단명을 초래한 4가지 습관...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청나라말기 함풍제의 짧은 일생은 거의 비극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대청제국의 말기황제로서 외적의 침입과 내란이 빈번한 곤경에 직면해야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생활방식은 그의 일생을 비극으로 이끌었다. 함풍제의 재위시 그의 여러가지 행위와 그의 기호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함풍제의 운명은 일찌감치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함풍제의 4가지 애호(愛好)가 실로 그를 요절하게 만들었다. ​함풍제의 단명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생활방식이 그렇게 만들었다. 즉위초기, 함풍제의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한창 나이여서 원래 대청왕조를 진흥시키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실망시킨다.. 2024. 9. 6.
유춘림(劉春霖): 중국과거역사상 마지막 장원(狀元) 글: 세설신어(細說新語)​중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독서인의 유일한 출로와 추구하는 목표였다. 천년이래 무수한 한문자제(寒門子弟)는 공명을 얻고 운명을 바꿀 희망을 품고, 밤낮으로 등불아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그러나 과거제도는 청나라말기에 점차 폐지된다. 그렇다면 고대 장원의 수준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의 마지막 장원의 답안지를 보면 그의 글씨체에 현대인들이 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그렇다면 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누구일가? 그의 일생은 어떠했을까?과거지로(科擧之路)와 서법천부(書法天賦)​​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유춘림(劉春霖)이다. 1872년, 그는 직예(直隸) 숙녕(肅寧)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유씨집안에서는 교육을 아주 중시했다... 2024. 9. 6.
정여창(丁汝昌): 태평천국의 장수에서 북양수군의 제독까지... 글: 김왜취담(金娃趣談) 1861년 이월, 정여창은 정학계(程學啓)를 따라 안경성(安慶城)을 오랫동안 포위공격하고 있던 상군(湘軍)에 투항한다. 이로써 그는 7년간에 걸친 태평군의 생애를 마감하고, 증국번(曾國藩)이 조직한 상군의 일원이 된다. 이때, 정여창은 겨우 25,6세의 나이였고, 정학계가 이끄는 여러 심복장수들 중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인물도 아니었다. 아무도 그가 나중에 중요한 직위인 북양수군의 제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여창과 비교하자면, 정학계야말로 증국번형제가 가장 회유하고 싶어했던 태평군의 지휘관이었다. 상군이 안경을 포위공격할 때, 정학계가 군대를 이끌고 분전하며 저항하였기 때문에 공성전은 계속 실패했다. 오랫동안 싸우면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증국번 형제는 고민이 컸다... 2023. 2. 2.
1861년: 함풍제(咸豊帝)와 공친왕(恭親王) 글: 언구림(言九林) 1861년, 러시아는 농노제를 폐지했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청제국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미묘한 전환점에 놓여 있었다. 이 해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청나라조정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성립되었고, 다른 하나는 함풍제가 열하(熱河)에서 사망한다. 1. 함풍제의 존엄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이 해의 1월에 성립된다. 나중에 '총리아문'이라고 약칭된다. 이전에 외국관련업무를 처리하던 중앙기관은 "무이국(撫夷局)"이었는데, 이는 임시기구였다. "무이"에서 "총리각국사무"로 바뀐 배후에는 청나라조정의 외교에 대한 심리상태가 미묘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풍제 혁저(奕詝)에 있어서, 도광제(道光帝) 시절 '영이(英夷, 영국오랑캐)'에 패배한 것.. 2022.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