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開封)을 도성으로 한 왕조는 왜 단명했을까?
글: 종령개시(從零開始)개봉(開封), 이전에는 대량(大梁), 변주(汴州), 변량(汴梁),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로 불렸다. 후세에 팔도고도(八都古都)로 불린다. 그런데, 민간의 역사이야기에는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개봉을 도성으로 삼은 왕조는 대부분 국운이 길지 못했고, 오랫동안 통치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이미지는 후세인들이 아무런 근거없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오대시기(五代時期) 중원정권이 주마등처럼 교체되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전해지는 사료를 읽어보고, 현대의 고고학적 성과를 결합시켜 보면, 그런 결론이 반드시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봉을 도성으로 삼은 정권중에서 수년만에 붕괴된 난세왕조도 있지만, 백여년간 지속한 왕조도 있으며, 태평성세를 구가한 왕조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2026. 8. 28.
"탈문지변(奪門之變)": 아무런 의미없는 정치적 해프닝
글: 관고창회(觀古悵懷)경태8년(1457년) 정월 십칠일의 새벽, 남궁(南宮)의 성벽은 사람들에 의해 구멍이 뚫렸다. 석형(石亨), 서유정(徐有貞)은 1천여명을 데리고 뛰어들어, 냉궁에 7년간 갇혀 있던 태상황(太上皇) 주기진(朱祁鎭)을 모시고 나와 바로 봉천전(奉天殿)으로 향했다.역사는 이 밤을 "탈문지변(奪門之變)" 혹은 "남궁복벽(南宮復辟)"이라고 불렀다.그러나 를 펼쳐놓고, 종법의 그 라인을 따라 살펴보고, 백관의 태도를 살펴보고, 정월 십육일 그 밤의 이후를 살펴보면, 아주 기이한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이번 탈문은 시종일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탈문지변"이 없었더라도, 황위는 여전히 주기진 부자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고, 우겸(于謙)은 죽지 않았을 거시다. 석..
2026.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