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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소설의 5대명장(名將) 글: 이치아(李治亞)​중국고대소설을 아주 좋아하고, 평서를 읽는 것도 좋아한다. 만일 맹장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으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소설속의 고수이다. ​첫째, 서부조왕(西府趙王) 이원패(李元覇)​그는 에 나오는 인물로,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의 셋째아들이다. 그 시기의 맹장들에게 이원패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서열2위의 맹장 우문성도(宇文成都)를 순식간에 죽여버리고, 사평산(四平山)아래에서 철추를 내리쳐 배원경(裴元慶)을 쫓아버린다. 철추를 한번 내리쳐 웅괄해(雄闊海), 오운소(伍雲召), 오천석(伍天錫)의 호구를 찢어버린다. 나성(羅成), 양사태(梁師泰), 진경(秦瓊)등은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문성도와도 차이가 아주 컸다. 그런 우문성도조차 이원패에게는 두 수만에 패배.. 2024. 7. 26.
명나라때의 "왜구(倭寇)"는 일본인이었을까? 글: 조대부(趙大夫)​왜환(倭患)의 근원​대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명나라때 창궐했던 왜구는 당시의 "해금(海禁)"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명나라가 건립된 후, 엄격한 "해금정책"을 실행한다. 정부와 해외국가간에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는 외에 나머지 민간해상무역은 일률적으로 금지되었다. 명태조 주원장의 홍무(洪武)시기에 여러번 명을 내린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들이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이 사사로이 해외 여러 나라와 통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민이 마음대로 바다로 나아가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한다." 명성조 영락(永樂)시기에 약간 느슨해지는 했지만, 여전히 "해금"정책은 위배할 수 없는 '조훈(祖訓)'이었다.​그후, "해금"정책은 조이기도 하고 느슨해지기도 .. 2024. 7. 26.
진실한 이릉지전(夷陵之戰): 유비는 겨우 5만을 거느렸고, 제갈량은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글: 역사전쟁(歷史戰爭)​이릉지전은 삼국시대 "3대전투"중 마지막 전투이다. 는 이릉지전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했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관우의 피살로 인하여, 제갈량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분개하여 70만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육손에게 화소연영(火燒連營)당하며 전군이 몰살당한다. 육손은 오군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제갈량의 팔진도에 격퇴당하고, 촉군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연의에서는 이릉지전을 아주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변화무쌍하고 곡절이 많은 스토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역사상 진실한 이릉지전은 도대체 어떠했을까?​이릉지전의 원인​연의에서는 유비가 온 나라의 힘을 모아서 동오를 공격한 원인에 대하여 동오가 관우를 죽였기 때문에 유비는 의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2024. 7. 26.
왜 중국에는 수재(水災)가 많이 일어나는가? 글: 위경생(魏京生)​최근 몇년동안 수재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먼저 남방이 물에 잠기고, 현재 점차 북으로 확장되고 있다. 허난(河南)이 잠기고, 샨시(陝西)가 잠겼다. 그리고 수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허베이(河北)지역이다. 수리전문가인 왕웨이뤄(王維洛)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최근 글어 십만개의 댐,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수재는과거보다 더욱 많아졌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매번 수재가 발생할 때마다, 수만, 수십만의 백성들이 이재민이 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관리들에게는 오히려 공을 세워 상을 받고, 승진하고 돈을 벌 좋은 기회게 된다. 몇개의 영웅이미지를 만들어서 잘 선전하면 그게 좋은 관리, 총명한 관리가 되는 것이다. 이건 중공이 오랫동안 취해온 방식이다.​그러.. 2024. 7. 26.
대영박물관의 티벳 문화재 글: 궁장패점랑(弓長貝占郞)​칠회모(漆繪帽, Lacquered hat) No. 14티벳에서 온 승관모(僧官帽)이다. 대영박물관에 들어온 것은 1905년이다. 박물관의 소개에 따르면, 칠회모는 원래 사원의 한 승려가 입었던 복식의 일부분이다. 과거 티벳지방정부는 "정교합일(政敎合一)"제도를 시행하여, 사원이 지방의 종교사무와 사원자신의 관리자이자 통치자였다. 동시에 이 지방사회의 주요관리자이며 통치자였다. 그러므로, 티벳 각지의 사원은 왕왕 현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고, 정치, 경제, 교육, 사법등 직능을 갖추고 있었다. 사원내부에 서로 다른 등급 혹은 서로 다른 분야를 맡는 승관들이 공동으로 전체 사원의 내외정교사무를 관리했다.​장화(藏靴, Oracles's boots), No. 15용수문장화.. 2024. 7. 25.
중국사회의 꿈과 현실 글: 이군(李郡)​중국의 국사(國師)들이 말하는 "중국몽(中國夢)"의 정의는 내용이 아주 풍부하다. 예를 들어, 동승서강(東昇西降), 인민폐가 달러를 대체한다, 시(時)와 세(勢)가 우리에게 있다는 등등이다. 이치대로라면, 한 사람, 한 나라가 아름다운 꿈을 가지는 것은 뭐 크게 잘못된 일도 아니다. 다만 만일 현실을 전혀 도외시하고, 매일 꿈속에서 본 일들을 얘기하고 있다, 전세계에 "동승서강", "요요영선(遙遙領先, 훨씬 앞서간다는 뜻으로 화웨이가 자주 하는 말임)", "윈윈은 중국이 두번 이긴다는 뜻이다"라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가 '중국몽'의 진실성을 믿게 하기 위하여, 통큰외교를 하면서 거액의 대외원조를 실행하고, 대외선(大外宣)을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국내에서 곤경에 빠져 .. 2024. 7. 25.
곽약사(郭藥師): 요나라출신으로 송에 투항하고, 다시 금에 투항한 삼국의 교란자. 글: 팽배신문(澎湃新聞)​요나라 보대4년(1122년) 구월, 대요제국의 "상승군(常勝軍)" 총사령관 곽약사는 탁주(涿州), 역주(易州) 두개 주를 바치면서, 부하 8천명을 이끌고 송나라에 투항한다.​일찌기 동북아를 웅패했던 대요제국은 이때 이미 국력이 쇠퇴하여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1114년에 거병한 후, 여진기병의 말발굽이 대요제국의 절반을 짓밟고, 거란병사들은연전연패했다. 요나라의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는 1112년 봄에 이미 협산(夾山, 지금의 내몽골 토목특좌기)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제국의 내부는 인심이 흉흉했고, 나라의 앞날이 보이지 않었다.​곽약사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요, 금, 송의 3대제국이 서로 운명을 걸고 싸우는 시대배경하에서, 곽약.. 2024. 7. 25.
시중쉰(習仲勛)이 말년에 12년간 선전(深圳)에 거주한 내막은...? 글: 왕우군(王友群)​2023년 10월 15일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의 탄생110주년 기념일이다. 중국대륙에서는 여러 기념활동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시중쉰이 말년에 왜 12년간 선전에 거주했는지라는 이슈를 다뤄보기로 한다.​시중쉰은 중공의 제1대, 제2대 집단지도성원이다. 모택동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국무원부총리 겸 국무원 비서장이었다. 등소평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중공정치국위원, 전인대 부위원장이었다.​1988년 4월, 시중쉰은 제7대 전인대 부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퇴임'한다.​시중쉰이 선전으로 유배당하다.​전 전임대 법률공작위원회 연구실주임이었떤 가오카이(高鍇)의 회고에 따르면, 1990년 10월 30일, 시중쉰은 마지막으로 전인대 상무위원.. 2024. 7. 24.
시진핑이 중앙경위국장(中央警衛局長)을 4차례 교체한 내막은? 글: 정효농(程曉農)​해외에서 중국고위층의 정치적미래의 변화에 대하여 얘기할 때, 정변이라는 단어가 출현하는 빈도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시진핑의 주위에서 정변이 발생할지여부에 대하여 추측하기도 한다. 다만, 왕왕 이런 추측시 왕왕 정변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다. 도대체 중공내에서 어떻게 해야 정변이 발생할 수 있을까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본문은 중공정권이 건립된 이래의 정변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공내부에서 정변이 발생한 것은 실제 사례가 있다. 정변의 성패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기실 아주 간단하다. 즉, 누가 '총을 잡고 있느냐'이다. ​시진핑 취임전 저우용캉(周永康)의 정변미수​최근에 일어난 중공고위층의 권력충돌은 2012년 3월 19일이다. 그때 시진핑은 아직 총서기에 .. 2024. 7. 24.
과도한 자신감이 중국의 내외곤경을 불러왔다. 글: 이군(李郡)​최근 들어, 중국사회내부는 여러가지로 풀기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다. 각종 약방문을 모두 써봤다. 무슨 공급측면개혁, 내순환, 신품질생산력등등 각종 조치는 모조리 먹히지 않았고,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전체 사회경제는 모두 통제불능상태가 되었고, 여러 업종은 반마비상태가 되어 버렸다. 외부환경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최근 몇년간 중국은 대외교, 기백외교를 하고, 많은 자금을 투입하여 일대일로를 진행했다. 결국 진짜 친구는 몇몇 얻어내지도 못하고, 갈수록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국내학자들은 여전히 국내 GDP가 5%이상의 속도로 성장한다는 것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현재 중국의 사회경제는 이미 마이너스성장에 접어.. 2024.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