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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200만이 동북(만주)으로 이주했는데, 왜 중국에 '일본족'은 존재하지 않을까? 글: 묵책설사(墨策說史)​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항복한다. 동북의 156만 일본교민은 하룻밤만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다.​군인도 좋고, 이민자도 좋고, 상인도 좋다. 모조리 그달이 14년간 살고 있던 그 땅위에 버려진 것이다. ​일본인들은 14년동안 이민도 오고, 학교도 만들어, 이 땅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1945년 무조건항복을 했고, 지금 동북에는 "일본족"이 없다.​일본의 이민계획은 매우 거창햏다.​1936년 5월, 일본 히로다(廣田)내각은 "만주로 농업이민 백만호를 이주시킨다"는 것을 국책중 하나로 정한다. 계획에 따르면 20년내에, "일본에서 동북으로 100만호, 500만명을 이민보내고, 동북을 "대화민족(大和民族)"이 핵심으로 하는 인구구조로 만들.. 2026. 9. 10.
<영락대전(永樂大典)> 은 어디로 갔을까? 글: 오칠열독(五七悅讀)​프랑스에서 경매로 나온 2책(冊)이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금년6월 정식으로 항주국가판본관(杭州國家板本館)이 소장되었다. 이 일은 모두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언뜻 듣기에 좋은 소식이다. 그렇지 않은가?​다만, 같은 뉴스에 이런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2026년 8월까지, 맟책(冊)이 넘는 정본(正本)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고, 부본(副本)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2책이 돌아왔지만, 만책이 넘게 실종명단에 올라 있다. 여기에서는 이미 돌아온 2책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실종명단을 가지고 얘기해보기로 한다.​얼마나 방대한 책인가?​1403년, 대명(大明)의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는 "포람천하서(抱攬天下書)"의 대전(大典)을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전후로 2,000.. 2026. 9. 7.
중국고대 "친왕(親王)"의 "봉호(封號)"는 어떻게 지었을까? 글: 사해구구(史海鉤勾)​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왜 당나라이전의 왕야(王爺)는 모두 "진왕(秦王)", "진왕(晋王)", "제왕(齊王)"같은 지명으로 불렸는지, 그리고 청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공친왕(恭親王)", "예친왕(禮親王)", "예친왕(睿親王)"같은 길상어로 바뀌었는지.​이세민(李世民)은 황제가 되기 전에 "진왕(秦王)"이었다. 그런데 진나라는 일찌감치 멸망했는데,왜 "진왕"이라고 봉했을까? 사마소(司馬昭)는 황위를 찬탈하기 전에 "진왕(晋王)"이었다.그러나 진(晋)의 땅과 그가 무슨 관계있단 말인가? 청나라에 이르러, 서태후의 호적수는 "공친왕혁흔(恭親王奕訢)"이다. 광서제(光緖帝)의 부친은 "순친왕혁현(醇親王奕譞)"이다. 이런 "공(恭)", "순(醇)"은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말일까.. 2026. 9. 7.
주원장(朱元璋)은 왜 남옥(藍玉)을 죽여야 했을까? 글: 효함사화(崤函史話)​대명 홍무26년서기 1393년 이월 초팔일, 남경성(南京城)에는 큰 눈이 휘날렸다.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는 오문(午門) 앞에서 두 손으로 밀주(密奏)를 하나 들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때문이 아니라, 흥분때문이었다.그가 고발하는 대상은 대명개국제일명장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이었다.이 밀주에는 천하를 뒤흔들 글자가 숨겨져 있었다: 모반(謀反)그리고 이때의 주원장은 무영전(武英殿) 내에서 벽에 걸린 대명강역도(大明疆域圖)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동북에서 운남까지 하서에서 연해까지, 강산의 절반은 남옥이 사워서 얻어낸 것이다.그의 눈길은 "포어아해(捕魚兒海)"라는 글자에 놓였다. 그것은 남옥의 가장 빛나는 전투가 열린 곳이다. 10만의 북원(北元) 잔여부대가 하룻.. 2026. 9. 7.
개봉(開封)을 도성으로 한 왕조는 왜 단명했을까? 글: 종령개시(從零開始)​개봉(開封), 이전에는 대량(大梁), 변주(汴州), 변량(汴梁),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로 불렸다. 후세에 팔도고도(八都古都)로 불린다. 그런데, 민간의 역사이야기에는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개봉을 도성으로 삼은 왕조는 대부분 국운이 길지 못했고, 오랫동안 통치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이미지는 후세인들이 아무런 근거없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오대시기(五代時期) 중원정권이 주마등처럼 교체되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전해지는 사료를 읽어보고, 현대의 고고학적 성과를 결합시켜 보면, 그런 결론이 반드시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봉을 도성으로 삼은 정권중에서 수년만에 붕괴된 난세왕조도 있지만, 백여년간 지속한 왕조도 있으며, 태평성세를 구가한 왕조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2026. 8. 28.
당문종(唐文宗): 아들이 있는데 왜 조카를 황태자로 세웠을까? 글: 사기백년(史紀百年)​개성5년(840년) 정월, 장안성은 아직 한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황궁은 이미 혼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병석의 당문종(唐文宗) 이앙(李昻)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유조(遺詔)를 쓰면서, 황태자를 재상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면 이씨집안의 혈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잘못했다. 겨우 몇시진후에, 모든 것은 철저히 뒤집힌다. 그리고 이건 단지 14년에 걸친 비극의 마지막 일막이었다.​환관에 의해 용상에 앉혀진 황제, 황태자조차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당문종이 왜 평생동안 "황태자를 정하는" 일이 지지부진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이 황위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보력2년(826년), 십이월 초팔일.​그.. 2026.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