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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開封)을 도성으로 한 왕조는 왜 단명했을까? 글: 종령개시(從零開始)​개봉(開封), 이전에는 대량(大梁), 변주(汴州), 변량(汴梁),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로 불렸다. 후세에 팔도고도(八都古都)로 불린다. 그런데, 민간의 역사이야기에는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개봉을 도성으로 삼은 왕조는 대부분 국운이 길지 못했고, 오랫동안 통치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이미지는 후세인들이 아무런 근거없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오대시기(五代時期) 중원정권이 주마등처럼 교체되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전해지는 사료를 읽어보고, 현대의 고고학적 성과를 결합시켜 보면, 그런 결론이 반드시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봉을 도성으로 삼은 정권중에서 수년만에 붕괴된 난세왕조도 있지만, 백여년간 지속한 왕조도 있으며, 태평성세를 구가한 왕조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2026. 8. 28.
당문종(唐文宗): 아들이 있는데 왜 조카를 황태자로 세웠을까? 글: 사기백년(史紀百年)​개성5년(840년) 정월, 장안성은 아직 한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황궁은 이미 혼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병석의 당문종(唐文宗) 이앙(李昻)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유조(遺詔)를 쓰면서, 황태자를 재상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면 이씨집안의 혈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잘못했다. 겨우 몇시진후에, 모든 것은 철저히 뒤집힌다. 그리고 이건 단지 14년에 걸친 비극의 마지막 일막이었다.​환관에 의해 용상에 앉혀진 황제, 황태자조차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당문종이 왜 평생동안 "황태자를 정하는" 일이 지지부진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이 황위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보력2년(826년), 십이월 초팔일.​그.. 2026. 8. 28.
모택동의 형제들.... 글: 사효생(史曉生)​많은 사람들은 모택동에게 두 명의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모택담(毛澤覃)과 모택민(毛澤民)이다. 형제 3명중에서, 모택민은 1943년에 희생되었고, 나이가 가장 어린 모택담은 그보다 훨씬 먼저인 1934년 4월 서금(瑞金)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엄호부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불행히도 희생되었다.​모택담과 모택민외에 모주석의 고향집 소산충(韶山冲)에는 7명의 형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7명의 형제들 중에서도 혁명사업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이 있다.​그들은 누구일까? 아래에서 하나하나 얘기해보기로 하자.​모주석의 다른 형제들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모주석 가족의 전승관계부터 정리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모주석의 증조부 모조인(毛祖人)부터 시작해야 한다.​모조.. 2026. 8. 28.
"탈문지변(奪門之變)": 아무런 의미없는 정치적 해프닝 글: 관고창회(觀古悵懷)​경태8년(1457년) 정월 십칠일의 새벽, 남궁(南宮)의 성벽은 사람들에 의해 구멍이 뚫렸다. 석형(石亨), 서유정(徐有貞)은 1천여명을 데리고 뛰어들어, 냉궁에 7년간 갇혀 있던 태상황(太上皇) 주기진(朱祁鎭)을 모시고 나와 바로 봉천전(奉天殿)으로 향했다.​역사는 이 밤을 "탈문지변(奪門之變)" 혹은 "남궁복벽(南宮復辟)"이라고 불렀다.​그러나 를 펼쳐놓고, 종법의 그 라인을 따라 살펴보고, 백관의 태도를 살펴보고, 정월 십육일 그 밤의 이후를 살펴보면, 아주 기이한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이번 탈문은 시종일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탈문지변"이 없었더라도, 황위는 여전히 주기진 부자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고, 우겸(于謙)은 죽지 않았을 거시다. 석.. 2026. 8. 28.
민국(民國)은 왜 강력한 중앙정부를 건립하지 못하였을까? (2) 4. "황금십년" 왜 진정한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었는가?​1928년 북벌에 성공하고, 동북이 깃발을 바꿔달았다. 남경국민정부는 명목상 전국을 통일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중국에서 중앙집권을 재건하는 기점으로 보고, 국민당이 군벌할거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현대화의 궤도로 이끌 것이라 믿었다.​다만, 역사는 증명한다. 이건 그저 유한하고, 취약한 통일이며, 국민정부는 시종 진정으로 중앙권력이 허약한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부인할 수 없는 일은 남경정부가 "황금십년(1927-1937)" 기간동안 약간의 성취를 거두었다는 것이다.​외교분야에서, 개정신약운동(改訂新約運動)을 통해 관세자주권을 회복하여, 관세세율을 원래의 '치백추오(値百抽五)'에서 점차 20%이상으로 끌어올렸다. 관세수입은 1928년의 1.. 2026. 8. 28.
민국(民國)은 왜 강력한 중앙정부를 건립하지 못하였을까? (1) 글: 한팔리문예지성(漢八里文藝之聲)​1912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이 건립되었고, 2천여년간 지속되던 황제제도는 철저히 종결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때 사회각계는 보편적으로 낙관적인 일종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신생의 공화국체제의 중국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신속히 통합하여 하나의 현대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세계강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될 것이라고.​그러나 그후 38년간의 역사흐름은 완전히 이런 예상을 벗어나버린다. 중앙정부는 주마등처럼 교체되고, 지방군벌은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버티며, 지방을 나눠 통치했으며, 국가재정은 장기적으로 외채와 적자재정에 의존했으며, 군대는 사인화 속성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정치구너력은 파편화된 분산상태를 나타내게 된다.​원세개(袁世凱)의 독재로부터 군벌혼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2026.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