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9399 "풍태후(馮太后)"는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는가? 글: 자옥(子玉)북위(北魏)의 풍태후(馮太后)는 역사상 비교적 인기가 높은 여주(女主)이다. 그녀는 여주(女主)를 엄하게 막는 북위라는 큰 배경하에서, 전면에 나서, 조정국면을 주도했다. 주요원인은 그녀가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拔弘)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인데, 이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먼저 간략하게 풍태후의 신세내력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407년, 풍발(馮跋)은 스스로 북연(北燕)을 세워 왕에 올라, 요동의 땅을 차지한다. 풍발이 죽자, 동생 풍홍(馮弘)이 즉위한다. 그후 북연은 심각한 권력투쟁에 들어간다. 풍홍의 아들 풍숭(馮崇), 풍랑(馮朗)과 풍막(馮邈)은 내부투쟁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전후로 북위에 투항한다.북연도 심각한 내부투쟁으로 실력이 크게 손상입어,.. 2026. 10. 8. "노애(嫪毐)의 난": 그는 가짜환관이 아니라, 진나라 종실장군(宗室將軍)이었다. 글: 영니(寧妮)노애(嫪毐)라는 이름을 들으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장면은 이러할 것이다: 신체적인 능력에 의존하여 후궁으로 들어간 무뢰한이며, 태후에게 잘 보여서 후(侯)의 작위를 받고, 마지막에는 반란을 일으켜 거열형(車裂刑)을 받아 죽는다.스토리는 놀라우면서도 또한 단순하다. 다만, 진나라제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이후 진나라의 작위는 사람머리로 바꾸는 것이다. 백기(白起)는 평생 전투를 해서 적군을 거의 백만을 죽였지만, 그가 얻은 작위는 제16등급의 "대량조(大良造)"이다. 그런데, 소위 "가짜환관"이라는 자가 무엇을 가지고 최고등급인 제20등의 "철후(徹侯)"에 봉해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2곳의 봉지까지 .. 2026. 10. 8. 옹정제 등극후, 그의 등극을 도운 "사야당(四爺黨)" 구성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소도지풍(小島知風)강희61년(1722년) 십일월 십삼일, 북경성의 겨울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창춘원(暢春園)에서 강희제(康熙帝)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몇 시진(時辰)이 지나서,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이 논쟁 속에서 황위에 오르고, 연호를 옹정(雍正)이라 한다.십여년간 지속되었던 구자탈적(九子奪嫡)의 드라마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승리자는 오직 1명이고, 그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있다. 옹정제가 용상에 앉은 후, 당초 그를 지지하던 철간형제들과 심복대신들은 나중에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들의 최후는 차이가 커서, 실로 탄식이 나올 정도이다. 올바른 보스를 따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올바른 보스를 따른 후.. 2026. 10. 8. 흑이(黑彛)와 백이(白彛): 이족(彛族)의 신분등급제도 글: 호모인호료마(胡某人胡了嗎)대량산(大凉山)의 산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노인들은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서 옛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자주하는 말에는 이런 말이 있다: 태어나면서 뼈가 무슨 색인지가 평생의 운명을 결정한다. 듣기에 신비롭지만, 70년전에는 이것이 바로 이 산 속의 확실한 법도였다.사천양산(四川凉山), 운남소량산(雲南小凉山) 일대의 이족(彛族) 내부의 등급구분은 외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착되어 있었다. 진정 폐지된 것은 1956년의 일이다.금년이 2026년이니,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면 꼬박 70년이다. 이족의 옛 규칙에 따르면 사람은 4등급으로 나뉘어진다.가장 윗쪽은 낙합(諾合)이다. 즉 흑이(黑彛)이다.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정도이다. 그들은 토지와 소, 양을 소유한다... 2026. 10. 8. 열강은 왜 중국을 분할점령하지 않았을까? 글: 곤칠설사(坤七說史)1901년 9월 7일, 북경. 경친왕(慶親王) 혁광(奕劻)과 이홍장(李鴻章)을 대표로 하는 청나라조정은 11개국 대표와 을 체결한다. 경성은 이미 일찌감치 함락당했고, 서태후는 멀리 서안으로 도망쳐 있었다. 배상금인 4.5억냥 백은을 당시 모든 중국인들로 나누면 1인당 딱 1냥이 된다.그런데, 이 조약의 처음부터 끝까지 영토할양조항은 단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전의 , 은 모두 영토할양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대를 동원했지만, 토지는 한치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열강은 왜 중국을 분할점령하지 않았을까? 진상은 아주 잔혹하다: 청나라조정은 비록 무릎꿇었지만, 의화단은 죽기살기로 맞섰기 때문이다. 한쪽은 무릎꿇고 한쪽은 죽기살기로 싸운다. 그런데 이것이.. 2026. 10. 8. 옥황묘(玉皇廟)를 둘러싼 30년분쟁은 어떻게 의화단(義和團)의 난으로 발전하였는가? 글: 사해구구(史海鉤勾)하나의 작은 묘(廟)를 둘러싸고 30년간 소송전을 벌이다.산동(山東) 관현(冠縣) 이원둔(梨園屯)의 북쪽에 옥황묘(玉皇廟)가 하나 있었다. 묘는 크지 않았고, 옥황상제를 모시고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매년 명절이 되면 향불을 올리고 절을 했으며, 평상시에는 거의 사람들이 찾지 않았다. 이처럼 별볼일없는 작은 묘 하나를 두고 동치8년(1869년)부터 이원둔의 촌민과 천주교(天主敎)의 교민(敎民)들 사이에 근 30년간 분쟁이 지속된다. 나중에 소송은 현아(縣衙)에서 부아(府衙)로 올라가고, 부아에서 다시 성성(省城)으로 올라갔으며, 촌민은 계속하여 사람이 바뀐다. 묘는 철거되었다가 다시 세우고, 세우고 나면 다시 철거했으며, 결국은 의화단의 난으로 발전하게 된다.하나의 묘, 하나.. 2026. 10. 8. 이전 1 2 3 4 ··· 156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