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42

서태후(西太后) 인생의 마지막 하루

글: 사설신어(史說新語)​서태후를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그녀를 그다지 좋게 보고 있지 않다.​그녀를 얘기하면 모두가 떠올리게 되는 건 폐관쇄국(閉關鎖國), 각종 굴욕적인 불평등조약, 서방열강에 대해 부득이 무릎꿇는 것, 그리고 수렴청정(垂簾聽政)등등 별로 좋지 않은 단어들이다.​서태후는 17살에 후궁으로 입궁하여, 평생동언 정변도 일으키고, 3차례 수렴청정하면서 48년간 청나라정권을 좌지우지해왔다.​당시 서방은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고, 문명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였는데, 서태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피하는 방법으로 왕조의 꿈만 꾸었다.​그녀는 대권을 독점하면서, 주위의 열강이 노려보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같았다.​만성독약을 먹은 것처럼 방대한 청왕조는 점점 사..

서태후와 의화단 (3)

글: 이신우(李新宇)​7​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했기 때문에, 의화단운동은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태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당연히 크게 보면, "부청멸양"의 네 글자로 이미 충분하게 설명이 된다. 의화단은 제국의 충성스러운 호위무사들이다. 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누굴 지지한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가들이 주목한 점은 역시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다.​의화단이 생길 때가 바로 서태후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시기였다. 바로 서양인에 대한 원한이 폭발할 때였다.​먼저, 무술정변이후의 원한이 쌓여 있었다.​무술변법때 외국인들은 광서제와 유신파를 지지했다. 서태후는 어렵사리 국면을 뒤집고 다시 수렴청정하고, 황제를 연금시키고, 담사동(譚嗣同)등 '무술육군자'를 죽여버렸다 ..

서태후와 의화단 (2)

글: 이신우(李新宇)​4​세계전쟁사상, 이건 유일한 전쟁사례이다: 선전포고를 하고, 공사관을 공격목표로 삼는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렇게 하는 전쟁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공사관은 자신의 영토내에 있기 때문에,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마땅히 즉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당연히 전쟁이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진정한 전쟁이 뒤이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다만 곤혹스럽게도, 6월 20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는데, 8월 14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에 들어와 포위망을 풀 때까지, 50여일동안 대사관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원래, 각국 공사는 청나라조정의 통첩을 받고, 즉시 철수할 준비를 했다. 다만 6월 20일 독일공사가 피살되자, 각국 공사관은 깜짝 놀..

사서태후와 의화단 (1)

글: 이신우(李新宇)​1900년 여름, 북경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히 일어난 일들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를 통해 드러난 것은 왕왕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가장 주목을 끌었던 일은 의화단으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다.​권민(拳民)들이 교당(敎堂)을 불태우고, 선교사를 죽이고, 교민(敎民, 신도)을 죽여 열강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는다. 그들은 대청국에 보호를 요구했고, 조정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열강은 대청제국이 외국교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파병하여 보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외국병사들이 오고 또한 북경으로 진입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소수라 할지라도 결코 범상한 일이라고 ..

누가 서태후로 하여금 서방열강에 선전포고하게 하였는가?

글: 후유(煦濡) 1900년 6월 21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각국에 선전포고하는 조서를 내린다. 서태후는 서방열강의 여러가지 죄행을 나열했다. "삼십년동안, 우리나라가 인자하고 후덕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빌미로 그들은 갈수록 발호하며 우리나라를 핍박하며, 우리의 토지를 침범하고, 우리의 인민을 유린하고, 우리의 재물을 강탈해갔다." "그들은 스스로 교화지국이라고 하면서 예의없이 횡행하고 병력과 무기의 날카로움을 믿고 이렇게까지 했다." 서태후는 이렇게 분노를 표시한 후, 마지막에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선전구호를 내놓는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만고에 수치를 남기기보다 들고 일어나 자웅을 겨뤄보아야 한다!" 이 선전포고를 전환점으로 하여, 청정부는 정식으로 서방열강과 갈라지고, 중국과 서방열강의 전..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으로 쳐들어올 때, 서태후는 왜 서안으로 도망쳤을까?

글: 장금(張嶔) "중국인들은 수도를 점령당하는 치욕과 함께 20세기를 맞이했다"고 말하는 '경자국난(庚子國難)'때 서태후가 서안(西安)으로 도망친 것에 대하여 많은 역사애호가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서안으로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서태후의 이번 소위 "서수(西狩)"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첫째는 서북대지는 사상유례없는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태후가 "서수"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산서(山西)는 '경자국난'전에 이미 여러 해동안 가뭄으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밭이 메말랐고' '보리싹이 시들었다' 산서의 전체 35개 주현(州縣)은 재해를 당해 있었다. 그리고 서태후가 '도망쳐 숨은' 서안은 어떠했을까? 섬서는 재해를 당한 주현이 더욱 많아서 60여곳에 ..

서태후의 3명의 보디가드(保鏢) : 한명한명이 곽원갑보다 강했다.

글: 소철(小哲) 서태후는 죽기를 겁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을 아주 중시한다. 출행때는 항상 많은 수행원들이 따라다녔고, 그 중에는 무공이 고강한 보디가드가 있었다. 오늘은 서태후이 삼대보표에 대하여 얘기해 보기로 한다. 1. 궁보전(宮寶田) 무협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서태후는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는가?

글: 호기와굴조(好奇搲掘組) 오랫동안 이런 견해가 떠돌았다. 서태후는 1900년 분개하여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이다: 즉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의 11개국이다. 문헌자료를 보면, 서태후가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서태후는 의화단 지휘부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글: 위득승(魏得勝) 서태후는 도망치는 길에 군대에 의화단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의화단을 토벌할 때의 문제는 의화단의 지휘부(서태후에 의하여 의화단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거나, 조정에서 의화단을 적극 지지한 대신들)를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서태후는 이홍장(李鴻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