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36

파촉(巴蜀)의 권력게임: 유장(劉璋)은 왜 유비(劉備)를 불러들였을까?

글: 서북낭(西北狼)​만일 삼국시대 군웅들중에서 지능이 떨어지는 순서를 매긴다면, 원술을 2위로 한다면, 익주목 유장을 1위라고 해야할 것이다. 유장은 인랑입실(引狼入室)한 것때문에 그후 천년이상 후세인들로부터 조롱을 받아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아마 우리도 그보다 그다지 총명하지 않을 것이다.​동주병(東州兵)과 본토파(本土派)의 싸움​유장의 내력을 확실하게 알려면 우리는 그의 부친 유언(劉焉)부터 알아보아야 한다.​유언은 한나라말기 가장 만저 한나라가 끝장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중 한명이다. 그 겁난을 피하기 위해, 유언은 한영제(漢靈帝)에게 폐사입목(廢史立牧, 자사를 없애고 목을 설치하자는 것)을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 조치는 지방장관의 권력을 극도로 확장하는 것이고, ..

유비(刘备)의 부인은 10명이 넘었을 것이다.

글: 역사대작회 ​ 유비에게는 감부인(甘夫人), 미부인(糜夫人), 손부인(孙夫人)과 오황후(吴皇后) 네명의 부인이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료의 기재를 보면, 유비의 부인은 이 네명만이 아니다. 칭제이후에 몇명의 비빈을 들였는지에 대하여는 정사에서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아 통계를 내기 어렵지만, 여기에서는 유비가 칭제이전에 몇명의 부인을 거느렸는지를 알아보자. 네 명은 훨씬 넘고,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열명은 넘을 것같다. 아래에서 차례로 살펴보겠다. ​ : "선주(先主, 유비를 가리킴)의 감황후. 패(沛)의 사람이다. 선주가 예주(豫州)에 있을 때, 소패(小沛)에 살았는데, 그때 첩으로 거두었다. 선주는 적실(嫡室)이 여러번 죽어서, 그녀가 항상 집안일을 관장했다(常摄内事)" ​ : "여포..

유비치촉계시록(劉備治蜀啓示錄)

글: 현야(玄野) 유비(劉備)의 촉한(蜀漢)은 삼국난세에서 마지막으로 정족(鼎足)을 이룬 일족(一足)이다. 북으로 한중(漢中)을 취하고, 여러번 북벌(北伐)하였으며, 중국역대정통사회에서는 도통(道統)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실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비가 한나라 황실종친이라는 것이 핵심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그의 신분은 비교적 덜 중요한 원인이고, 진정한 원인은 마땅히 유비가 인재를 아끼고, 인재를 보살피고, 인재를 잘 기용했다는데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당연히 조조(曹操)와 손권(孫權)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능력이 없었던 원술(袁術), 여포(呂布)같은 자들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방면의 능력이 약간 부족했던 원소(袁紹)도 결국 신속히 패망하는 최후를 피할..

유비(劉備)가 놓친 4명의 맹장(猛將)

작자: 미상 동한말기, 유비는 무장으로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 위연등 맹장이 있었고, 문관으로 제갈량, 방통, 법정등 모사가 있었다. 이들은 촉한을 건립하는데 중요한 역량이었다. 그리하여, 조조, 손권등 두 제후와 마찬가지로, 유비의 휘하에도 인재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비의 일생에서 적지 않은 인재들을 놓쳤다. 필자가 오늘 얘기할 것은 4명의 맹장이다. 이들은 모두 촉한을 위해 일하지 않았으니, 후세인들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1. 전예(田豫) 전예(171년-252년), 자는 국양(國讓), 어양(漁陽) 옹노(雍奴)사람(지금의 천진시 무청구). 출생지로 보면 전예와 유비는 모두 유주(幽州) 출신이다. 그러므로, 동한 말기, 전예는 처음에 유비의 곁을 따랐다. 그러나, 모친이 나이가 많아 항상..

유비, 관우, 장비는 어떻게 생겼을까?

글: 문재봉(文裁縫) 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용모는 모두 선명한 특색이 있다. 너무나 선명하여 수천수만명 속에 있어도 바로 찾아낼 수 있고, 한번 보면 잊지 않을만한 그런 용모이다. 먼저 유비를 보자. "키는 칠척오촌,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지고, 두 팔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다. 눈으로 자신의 귀를 돌아볼 수 있고, 얼굴은 관옥(冠玉)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다음으로 관우를 보자: "키는 구척, 수염은 2척이다; 얼굴은 대추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단봉안(丹鳳眼), 와잠미(臥蠶眉)이다. 용모는 당당하며 위풍이 늠름하다." 장비는 또 어떨까?: 키는 팔척, 표두환안(豹頭環眼, 표범같은 머리에 동그란 눈), 연액호수(燕頷虎鬚, 큰 턱과 호랑이수염), 목소리는 큰 우..

유비는 왜 항상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았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유비는 평원상(平原相)이 된 후, 자립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실력과 당시 천하형세로 인하여, 제후들은 부득이 다른 제후와의 합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갈등이 첨예한 적을 상대하고,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제후들이 유비와 합작한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유비는 시종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유비가 평원상이 된 것은 공손찬때문이다. 공손찬이 원소와 싸우기 때문에, 유비와 청주자사 전해(田楷)는 제(齊)의 딸에 주둔했다. 조조는 서주를 공격했고, 서주자사 도겸이 도와달라고 한다. 전해와 유비는 함께 가서 그를 도와준다. 이때 유비에게는 1천여명의 병사가 있었다. 그리고 유주의 일부 소..

유선이 장비의 두 딸을 취하면서, 관우의 딸은 취하지 않은 이유는...?

글: 지역사(知歷史) 아마도 유선(劉禪)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이릉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劉備)는 일생동안 4명의 아들을 두었다. 각각 유선, 유봉(劉封), 유리(劉理), 유영(劉永)이다. 그런데, 유비는 굳이 성격이 유약한 유선에게 황위를 넘겨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비의 이런 결정을 기이하게 여긴다. 유비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 기실 사서 에는 이미 명확하게 답을 제시해 놓았다. 유비의 유조(遺詔)에는 일찌기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제갈량이 예전에 사원의 앞에서 유선이 지혜도 있고 도량도 있다고 칭찬한 바 있는데, 사원은 그 말을 유비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유비는 비로소 유선을 후계자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일생동안 제갈량을 신임했고, 그는..

유비는 익주(益州)를 취한 후 한중(漢中)을 형주(荊州)보다 중시했다.

글: 지역사(知歷史) 유비는 214년 익주를 취한다. 그후 215년 제1차 형주위기가 발생한다. 즉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 조조는 한중의 장로(張魯)에 군사행동을 취한다. 유비는 익주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려하여, 동오의 요구를 받아들여 형주를 재분배하고, ..

왜 유비의 촉한진영에 반도가 가장 많았을까?

글: 기점역사(起點歷史) <삼국지>에서 유비에 대한 평가는 "홍의관후(弘毅寬厚), 지인대사(知人待士)"였다. 그에게 "한고조의 풍이 있고, 영웅의 그릇이었다." 조조도 유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오늘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 조조뿐이다." 손권은 이렇게 말한다: "유예주(유..

역사상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글: 야독사서(夜讀史書) <삼국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유비와 제갈량이라는 군신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을 것이다. 유비는 일찌감치 사람들에게 '유황숙'으로 불리웠지만, 처지는 비교적 비참해서, 반평생을 여기저기 떠돌며 지냈다. 그리고 시종 자신의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