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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80

모택동의 "신문학(新聞學)"원칙 글: 옥미수(玉米穗)​모택동은 30년대말이후 당의 이데올로기부문을 통제하기 위해 분투해왔고, 신문잡지는 중공의 이데올로기선전계통에서 특수한 지위를 점거하는데 비추어, 모택동은 중공의 신문잡지를 크게 주목했다. 1941년 5월 15일, 모택동은 와 신화사(新華社) 내부간행물 을 합병한다고 선언하고, 다음 날 정식으로 중공중앙기관보 를 창간했다. 모택동은 전당에 이후 중공의 "일체 당의 정책은 와 신화사를 통하여 전국에 발표된다"고 통지한다.​ 창간초기, 박고(博古)가 사장이 되고, 양송(楊松)이 주편(主編)을 맡는다. 이 두 사람은 당내 소위 국제파인물에 속한다. 그들은 를 소련 의 중국판으로 만들었다. 신문에서 당시 소련-독일전쟁의 전황을 대거 보도했다. 국제문제와 관련된 뉴스, 사론과 문장이 가득했으며.. 2024. 10. 8.
사정의(謝靜宜): 모택동(毛澤東)의 기요비서(機要秘書) 글: 왕우군(王友群)​10년문혁때, 모택동과 처 강청외에 모택동의 곁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중 특히 유명한 여인이 있는데, 모택동을 잘 모셨을 뿐아니라, 관직도 갈수록 높아져서 거의 전인대부위원장에 오를 뻔했다. 그 여인은 바로 모택동의 기요비서를 맡은 바 있는 사정의이다.​총애를 받은 후 교만해지다.​모택동의 보건의사 이지수(李志綏)는 그의 회고록에서 '모택동에 의해 부화(腐化)된 여자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처음 모택동을 알게 되었을 때 천진무사한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모택동의 성생활, 특수성격과 지존권세는 이들 젊고 무지한 여자아이들로 하여금 점차 타락하게 만들었다. 여러 해동안 나는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아왔다. 그녀들은 모택동의 '여자친구'가 .. 2024. 8. 21.
모택동이 일본침략에 감사하면서 어떤 말을 했을까? 글: 옥미수(玉米穗)​모택동이 일본침략에 감사한 것은 자주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그건 그저 반어법에 불과하다고 변호한다. 그렇다면,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은 일본침략에 감사할 때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말했을까? 그것을 을한번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같다.​제1차로 모택동이 일본침략에 감사한 것은 1956년이다. 당시 일본군 중장 엔도 사부로(遠藤三郞)가 중국을 방문했고 직접 모택동에게 일본군도(軍刀) 한 자루를 선물하며, 일본군인은 이후로 더 이상 중국을 적으로 삼지 않겠다고 표시하며, 과거의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진지한 사과를 보낸다. 모택동은 엔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우리의 선생이고 우리는 당신들에게 감사한다. 너희가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중국인민을 교육시켰고, 모.. 2024. 8. 4.
모택동의 "평생 두 가지 큰일을 했다"는 말에 관하여 글: 모원신(毛遠新)(초고 2009. 02, 수정 2024. 02)​모주석이 자신의 "평생 두 가지 큰 일을 했다(一生干了兩件大事)"는 말을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임종유언이라고까지 말한다.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언제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보았지만, 나의 대답은 항상 이러했다: "그 말을 나는 모른다. 1975년 10월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양(瀋陽)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한다. 그해 11월이후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석의 곁에서 보냈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나온 후에 비로소 일부 자료에서 보게 된 것이다."​이 말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그중 구체적인 시간, 장소, 참가자에 대하여는 다음.. 2024. 7. 7.
모택동의 진짜 유언은 무엇이었을까? 글: 섭영렬(叶永烈)1976년 5월의 모택동비록 모택동이 이미 화국봉을 중공중앙제1부주석으로 지정했지만, 왕홍문은 화국봉을 무시했다. 그가 보기에 화국봉은 그들의 적수가 되기에 등소평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1976년 7월, 왕홍문은 다시 그의 비서 소목(萧木)에게 그를 위해 전면적인 발언개요를 초안하라고 지시한다.​반년전, 왕홍문은 주은래(周恩来)가 사망한 후 자신이 중앙업무를 주재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비서 소목에게 전면적인 발언개요를 작성하라고 하여, 소목은 설날연휴마저도 쉬지를 못했었다.​이번에, 왕홍문은 다시 한번 소목에게 고생을 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상의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가 부주석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서서 초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이 '.. 2024. 5. 9.
<모택동선집(毛澤東選集)>의 저작권문제 글: 백매(白梅) 1995년 6월 중순, 중공중앙문헌연구실,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중공중앙당교는 중앙서기처와 공동으로 을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의 1권 내지 4권의 160여편의 글 중에서, 모택동이 집필초안한 것은 단지 12편 뿐이며, 모택동의 수정을 거친 것이 모두 13편이고, 나머지 글들은 모조리 중공중앙의 다른 지도자, 혹은 중공중앙판공청 및 모택동의 비서등이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에 수록된 '저작'들은 대부분 중국공산당이 서로 다른 시기에 각종 서신, 전보, 문건, 그리고 지도자의 강연원고를 모아서 완성된 것으로, 원래 '해방구'에서 소책자로 인쇄되어 돌려보던 것이었다.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북해방구'의 하르빈과 같은 도시에서는 이들 소책자를 묶어서 두꺼운 으로 편찬했다. 신.. 2023.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