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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72

정강산시기 주모(朱毛) 충돌: 임표(모택동지지) vs 진의(주덕지지) 글: 옥미수(玉米穗) 1928년 연말, 국민당군은 정강산에 대한 제3차 포위소탕작전을 벌인다. 정강산에서는 당정군긴급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한다. 회의에 출석한 사람은 모택동(毛澤東), 주덕(朱德), 진의(陳毅), 홍오군(紅五軍)의 팽덕회(彭德懷), 등대원(滕代遠), 상감변구특위서기(湘贛邊區特委書記) 담진림(譚震林)등이었다. 주덕이 의견을 내놓는다: 정강산은 우리가 1년간 건설한 혁명근거지이다. 쉽게 버릴 수 없다. 다만 만일 모든 홍군이 이 산을 지킨다면 양식이 부족하여 오래 버틸 수 없고, 고사당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홍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홍4군 31단과 홍5군은 모택동, 팽덕회 두 동지가 지휘하여 정강산을 고수하고, 나(주덕)는 홍4군 28단, 29단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동으로 가.. 2022. 7. 28.
정강산(井岡山)시기 주모(朱毛) 충돌: 원인은? 글: 옥미수(玉米穗) 주덕(朱德)이 군대를 이끌고 처음 정강산에 들어왔을 때, 모택동과의 사이이 적제 않은 이견과 충돌이 있었다. 이는 많은 당사자료에 언급되고 쓰여 있다. 다만 기술방법은 비교적 우회적이다. 어떤 경우는 간략히 언급하며 지나가며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중공초기 고위군사장군인 공초(龔楚)가 쓴 에는 주덕과 모택동간의 충돌을 일으킨 구체적인 사건과 원인에 대하여 상세하게 회고하고 기술하였다. 공초는 또한 그 본인이 당시 주덕과 모택동 두 사람의 성격차이 및 능력등 방면에서의 자신의 견해도 써놓았다. 공초의 기술에 따르면, 1928년 5월부터 10월까지, 주모간에 몇건의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진다. 첫째, 6월하순, 28단, 29단(주덕이 이끌고 정강산에 들어간 부대)은.. 2022. 7. 27.
누가 10년문혁의 역사죄인인가? 글: 왕위범(王偉凡) 나는 비록 문혁때 출생하고, 문혁때 동년을 보냈지만, 문혁에 대하여 윗세대처럼 직접 겪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문혁에 대한 이해는 문혁당사자들이 쓴 회고록에서 어느 정도 얻은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문혁을 얘기하는 사람이 적다. 최근 CCTV에서 인기리에 방송된 을 보고 다시 10년문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문혁은 이미 38년이 지났다. 다만 중국의 집권자들은 오랫동안 선택적망각을 했고, 나도 대다수의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찌기 문혁의 주요 죄괴화수(罪魁禍首)는 임표집단과 왕장강요(王張江姚) 사인방의 두 '반혁명집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중 임표와 그의 가족은 전용기추락으로 사망했고, 강생(康生)은 일찌기 병사했다. 그리하여 문혁이 끝난 후에 법정에 서지 않았다.. 2021. 12. 17.
모택동은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했는가? 글: 원빈(袁斌)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전당 및 전군의 최고지도자지위를 확립했다는 것이 중공의 일관된 설명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장정역사연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현존하는 자료와 학자 허팡(何方)등의 연구에 따르면, 준의회의는 중공이 장정으로 도망하는 도중에 귀주 준의에서 거행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이다. 주로 박고, 주른애, 이덕이 장정에서 통솔하던 군사노선의 잘못을 반성한 것이다. 그때 중앙홍군의 장정을 통솔한 사람은 소위 "삼인단"(총서기 박고, 정치국상위 주은래 및 코민테른 대표 이덕)이다. 회의에서 박고는 5차에 걸친 포위소탕에 대한 총괄보고를 했고, 주은래는 부보고(副報告)를 했다. 정치국상위 장문천(張聞天)은 '반보고(反報告)'를 하여, 삼인단의 군사노선의 .. 2021.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