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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by 중은우시 2023. 5. 18.

글: 고문겸(高文謙)

유소기 모택동 주은래(왼쪽부터)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포타사령부(炮打司令部) - 나의 한장의 대자보>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유소기, 등소평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 이어진다. 이와 동시에, 모택동은 비밀리에 왕동흥(汪東興)을 파견하여 원래 이미 휴직을 신청한 임표(林彪)를 대련(大連)의 요양지에서 긴급히 북경으로 불러 회의에 참가하도록 한다. 자신에게 힘을 보태주고, 또한 임표로 하여금 유소기를 대체하여 자신의 후계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택동은 유소기와 철저히 등을 지고, 주은래로 하여금 중앙일상공작을 주재하는 위치를 맡게 한다. 이는 중공8대이래 당내의 영도국면에서 중대한 정변이다. 실제로 제8기 11중전회를 개최하기 전까지, 모택동은 이미 유소기를 거치지 않고, 더욱 많은 부분을 주은래에 의지하여 일처리하고 있었다. 전체회의의 각종 준비업무를 모두 주은래가 맡아서 했다. 이에 대하여 주은래는 심정이 아주 복잡했다. 한편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 이는 모택동의 그에 대한 정치적 신임이라는 것을. 연안정풍운동이후, 20여년동안의 시험을 거친 후 그의 정치적 표현에 대한 신임을 보인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는 그가 오랫동안 갈망해 온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주은래의 심정은 가벼울 수가 없았다. 반대로 더더욱 깊은 심연에 빠지고, 여리박빙(如履薄氷)하는 느낌이었다. 이는 모택동이 <포타사령부> 대자보에서 말한 그런 일에서 그 자신도 완전히 무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앞날이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택동이 이렇게 하면 "이어호저(伊於胡底, 어디가 끝일지 모르겠다)"하다. 의문의 여지없이, 주은래는 정치적으로 모택동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다만 모택동이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어느 선까지 가려고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현재 유소기의 최후는 더더욱 그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언제 자신도 같은 최후를 맞이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모택동의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하에서 그는 할 수 없이 그저 "보지만절(保持晩節)"과 "국궁진췌(鞠躬盡疩), 사이후이(死而後已)"라는 신조를 가지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주은래의 이런 심정은 회의기간동안 계속하여 드러난다. 예를 들어, 그는 대회발언에서 스스로를 반성한다: "낡은 머리로 새로운 혁명을 대했다(舊腦筋對待新革命)". 그리고 군중운동의 시험을 통과하려면, 계속하여 씻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우고 개조하겠다는 말이 헛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강조했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전투에 투신해야 한다. 전투에 투신하는 과정에서 잘못을 범할 수는 있다. 크건 작건. 나는 큰 잘못을 범했었다. 지금 그 일을 묻더라도 분명히 잘못을 범할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준비를 해서 잘못을 범하면 고쳐야 한다. 다른 의견을 들어야 하고, 여러 방면의 의견을 비교해야 한다. 만일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군중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주석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중앙에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여러분들도 생각해보면 결국 좀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회의기간동안,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청화대학의 운동상황을 알아보게 시킨다. 이건 아주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 수가 있다. 그는 이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군중대회에서의 발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나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면서 어려운 일이다." "급히 나섰고, 잘못하면 업무팀과 마찬가지로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잘못을 알면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모주석을 제대로 못따랐으면, 알고 고쳐야 한다. 그리고 다시 따라가야 하고, 다시 고쳐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4,50년을 해왔다!"

 

유소기가 이번에 정치적으로 끝장난 것에 대하여 주은래의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 오랫동안, 주은래와 유소기간에는 모종의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과 같은 관계가 존재했다. 유소기는 오랫동안 모택동의 신임과 중용을 받았고, 모택동이 주은래를 견제하고 상대하는 인물로 쓰여왔다. 이에 대하여 주은래 본인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비록 주은래의 재능이나 경력이 모두 유소기보다 위였지만, 당대회에서의 서열에서 부득이 유소기의 아래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외에 주은래는 유소기에 대하여 사상적인 "편(偏 ,치우침)"과 용인(用人)에서의 "협(狹, 속좁음)"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오면서 두 사람은 서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겉으로 서로 겸양하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배후에 권력국면에서 상대와의 사이에 경쟁과 투쟁이 존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은래는 유소기의 사람됨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됨이 온건하고 일처리가 정정당당하고, 문제를 날카롭게 보며, 개인의 수양을 중시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모택동이 이렇게 그를 공격하는데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훗날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그래서 유소기가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당연히 주은래는 사태의 진전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리고 모택동의 태도에 겁먹어, 공개적으로 나서서 유소기를 위해 변명해줄 수도 없었다. 다만 그의 본심을 말하자면, 모택동의 총부리가 되기 싫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이 견결하지 못하고, 두리뭉실하고, 비호해주는 혐의를 받을지라도, 앞장서서 공격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는 그의 일관된 처세술이었다.

주은래 모택동 임표 유소기(왼쪽부터)

그리하여, 주은래의 전체회의 발언중에 한편으로 학교에 공작조를 파견하고 공작조를 철수시키지 않은 것에 대하여, "방향상의 잘못이다" "심각하게 비판하는 것은 좋은 점만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도 끼워넣어서 유소기, 등소평과 함께 책임을 분담한다. "북경에서 중앙에 남아 일한 우리 몇 사람은 모두 공작조를 파견하는데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게 유소기, 등소평 두 사람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감경시켜주었다. 

 

이후 임표가 주재한 정치국상위확대회의에서도 참석자들은 정치적 압박으로 사전에 안배한 바에 따라 속속 유소기를 공격하여 장도중인추(墻倒衆人推, 담장이 무너지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민다)의 장면이 나타났다. 임표는 이때 대체로 이미 모택동이 등소평문제에서 권모술수를 부리고, 정치적으로 여지를 남겨두고, 등소평을 기용해서 그를 견제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같다. 그래서 회의에서 유소기를 비판하는 외에 고의로 창끝을 등소평에게 향한다. 그가 모택동선집 4권으 ㅣ주석을 편집처리하는 문제에서, 그 본인과 제4야전군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고 하여, 등소평과 오함(吳晗)이 정치적 포커라고 얘기하면서 적아모순이라고 하여, 등소평으로 하여금 회의후 권한을 내놓게 만들었다. 회의동안 유소기, 등소평 두 사람에 대한 비투에서 주은래는 시종 정좌하고 앉아서, 침묵을 유지한다. 

 

주은래가 유소기를 비판하는 문제에서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하여, 모택동은 그냥 모른 척 지나가준다. 모종의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는 모택동이 주은래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것, 즉, 항상 당내투쟁때는 두리뭉실한 역할을 맡았던 외에, 더욱 중요한 것은 모택동이 주은래를 써야 하기 때문에, 그를 지나치게 곤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당내에서 비록 일언구정(一言九鼎)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여러가지 구체적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를 대신해서 일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 주은래처럼 당내에 영향력도 있으면서 근심거리를 대신 잘 해결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직접 손쓰기 곤란하여 모택동이 직접 나서기 어려운 일인 경우에 주은래가 나서서 주선하여 모택동의 의도를 관철시켜줄 수 있고, 그런 역할을 다른 사람이 하기는 어려웠다. 마땅히 이 점이 모택동의 노모심산(老謀深算)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유소기를 버리고, 임표를 기용하여 후계자로 삼는 문제에서도 모택동은 그런 방식을 취한다.

 

8월 5일, 모택동은 결심을 굳힌 후, 먼저 주은래를 찾아가서 그가 이제 막 완성한 <포타사령부> 원고를 주은래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유소기는 안될 것같다. 그에 대해서 21년간 관찰해왔는데, 완전히 실망했다. 등소평에 대해서도 7년간 관찰해왔는데, 역시 실망했다. 그리고 화제를 바꾸어 주은래의 의견을 묻는다. 기실 모택동은 이때 일찌감치 결정해놓고 있었다. 임표를 유소기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 결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고의로 그런 의사를 내비치지 않고, 반대로 물어본다: "당신이 보기에 현재의 부주석중에서 또 누가 있겠는가?" 주은래의 태도를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주은래는 총명한 사람이다. 당연히 모택동의 뜻을 잘 알았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은 분명했다. 중앙상위의 7명 중에서 모택동을 제외하고, 주덕(朱德)은 이미 나이가 많고, 진운(陳雲)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어서 이미 두 사람은 상위의 일상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남은 것은 유소기, 주은래, 임표, 등소평 4명이다. 이중 유소기와 등소평이 안된다면, 남은 것은 주은래와 임표 뿐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은래 본인은 자신을 잘 알았고,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모택동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엇다. 왜냐하면 주은래는 과거 여러번 중앙영도핵심내부에서 자신은 그저 보좌할 뿐 스스로 키를 잡을 수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내에 후계자 후보로 유소기, 임표, 등소평을 순서대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은래는 자연스럽게 의견을 이렇게 표시하게 된다: 그럼 임표를 불러오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의 이런 말은 모택동의 뜻에 들어맞았다. 모택동은 아주 기뻐하면서 그 자리에서 결정내린다. 그리고 주은래에게 그에 따라 처리할 것을 분부한다. 그후 주은래는 즉시 비행기를 보내 임표를 대련에서 북경으로 데려오고, 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중앙당, 정, 군의 각 부문책임자들에게 알린다.

 

이것이 바로 임표가 후계자가 되는 대체적인 경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