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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36

십사아거(十四阿哥) 윤제(胤禵): 강희제가 선택한 진정한 황위계승자.... 글: 임건(林乾)​강희제(康熙帝)는 제2차 태자폐위후 걱정스럽게 말한다: 한,당이래 태자가 어렸을 때는 쟁탈전이 벌어지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지만, 일단 태자가 어른이 되고 나면 "그의 좌우에 여러 사람이 모이고, 당파를 만들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게 되며,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지금 여러 황자들은 학문이나 견식에서 각각 못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나이가 모두 장성하였고, 분봉을 받았으며, 그 소속인원들중에는 자신의 주인을 비호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한다:​"설사 황태자로 누구를 세우더라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이전에 이미 잘봇을 범했는데, 이번에 다시 가볍게 황태자를 세웠다가, 다시 잘못되면 어찌해야할.. 2025. 3. 9.
홍주(弘晝): 옹정의 다섯째 아들, 황당한 일생.... 글: 최최불시최(崔崔不是催)​강희50년(1711년), 옹친왕부(雍親王府)에는 온 집안이 기뻐하는 일이 일어난다. 옹친왕 윤진(胤禛)이 다섯째아들 홍주(弘晝)를 얻은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서 왕부에 활기가 늘었을 뿐아니라, 전체 가족이 기뻐해 마지 않았다. 홍주의 모친 경씨(耿氏)는 포의(包衣)출신으로 비록 지위가 낮았지만, 단장온화(端莊溫和)한 성격으로 윤진의 총애를 받았다. 혼란스러운 황자들간의 황위계승투쟁국면에서 홍주의 탄생은 원래 금상첨화이고, 윤진에게 또 하나의 카드를 추가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여, 윤진은 그를 폭풍의 중심으로 밀어넣지 않고, 그를 위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홍주의 어린 시절은 아무런 걱정이 없지 지냈다. 그는 좋은 생활조.. 2024. 12. 22.
장정옥(張廷玉)의 비참한 최후 글: 장굉걸(張宏傑)​장정옥(張廷玉), 안휘(安徽) 동성(桐城)사람으로, 서향문제(書香門第) 출신이다. 29살때 진사급제하고, 45세에 예부시랑이 되고, 옹정제때 대학사(大學士), 수석군기대신(首席軍機大臣)이 된다. 옹정제가 사망할 때,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사후에 태묘(太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전체 청나라200여년동안 그는 유일하게 이런 대우를 받은 한인(漢人)이다.​공자(孔子)의 말씀중에 이런 것이 있다: "군사신이례(君使臣以禮), 신사군이충(臣事君以忠)"(군주는 신하를 예의로 대하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 모신다). 원나라이전에 역대황제와 대신은 "군군(君君), 신신(臣臣)"(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의 직분을 지켰다. 원나라때부터 군신관계는 주노관계로 바뀌고, 대신은 .. 2024. 12. 18.
방포(方苞): 학문지도(學問之道), 구기방심(求其放心) 글: 자약역사회(自若歷史匯)​고대에 독서인(선비)의 최종목표는 무엇인가? "학성문무예(學成文武藝), 화여제왕가(貨與帝王家)" 대다수사람들은 머리를 들이밀어 관료가 되어 광종요조(光宗耀祖), 봉처음자(封妻蔭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인도 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3명의 황제가 연이어 불렀는데도 그는 모두 거절하고 그저 서생으로 책속에 머리를 쳐박고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지냈다. 그는 바로 청나라때 동성파(桐城派) 산문의 창시자인 방포이다.​아마도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그는 머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굳이 힘들게 살려고 하다니, 아래에서 그에 대하여 차례로 알아보기로 하자.​방포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였다. 4살때 댓구를 맞출 수 있었고, 5살때 문장을 .. 2024. 11. 25.
정마낙(鄭馬諾)과 심복종(沈福宗): 잊혀진 유럽의 두 중국인, 유럽의 중국붐을 일으키다. 글: 자귤(紫橘)심복종청나라때의 유학생을 얘기하게 되면 대부분은 용굉(容閎)을 떠올린다. 그는 "근대유학운동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기실 청나라때 해외유학을 최초로 떠난 사람은 정마낙(鄭馬諾)이다. 그는 오랫동안 마카오에서 생활하면서, 포르투갈인들에게 배웠고, 전통한학교육을 받은 지식분자는 아니었다. 청나라때 진정한 최초의 유학생은 강희제때의 심복종(沈福宗)으로 보아야 한다. 정마낙과 심복종의 유학은 중국에 영향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유럽에 중국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었다.​최초의 유럽유학중국인​습관적으로 우리는 심복종, 정마낙을 최초의 중국유럽유학생으로 보자. 서열상으로도 역시 심복종이 앞서고, 정마낙이 그 뒤를 차지한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보묜, 심복종은 강희제때의 인물이고, 정마낙은 명청교체기의.. 2024. 8. 12.
위가씨(魏佳氏): 그녀는 어떻게 일개 궁녀에서 황후에 올랐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 위가씨(魏佳氏), 만주 상황기(鑲黃旗) 사람이다(원래는 만주 정황기(正黃旗)의 포의(包衣)이다). 그녀는 건륭제(乾隆帝)의 셋째 황후이고, 가경제(嘉慶帝)의 생모이며, 내관영(內管領) 위청태(魏淸泰)의 딸이다. ​ 건륭10년(1745년), 그녀는 위귀인(魏貴人)에 봉해지며, 같은 해에 영빈(令嬪)으로 승진한다; 건륭13년(1748년), 에는 영비(令妃)로 승진하고, 건륭24년(1759년) 영귀비(令貴妃)로 승진한다; 건륭25년(1760년)에 황십오자(皇十五子) 영염(永琰, 즉 나중의 가경제)을 낳는다. 건륭30년(1765년), 황귀비(皇貴妃)로 승진하고, 건륭38년(1773년) 겨울, 황귀비의 아들인 황십오자 영염이 건륭황제에 의해 비밀입저(秘密立儲)된.. 2024.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