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123

웅정필(㷱廷弼): 역사의 붕괴, 누구도 화를 피할 수 없다.

글: 일경지월(一景之月)​1​명나라말기의 역사를 읽다보면 한 사람을 절대로 피해갈 수가 없다. 그는 바로 명장(名將) 웅정필(熊廷弼)이다.​그는 아마도 척계광(戚繼光)처럼 빛나지도 않고, 이성량(李成梁)처럼 야심이 크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의 뒤를 이은 손승종(孫承宗)만도 못할지 모른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존재이다.​웅정필은 어렸을 때, 그다지 편안하게 보내지 못했다. 비록 공부는 잘했지만, 현실은 그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않았다. 웅씨집안은 돈이 없었고,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하면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별로 바뀌지 않았다.​스무살이 되던 해, 고향인 강하(江夏,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에는 연속 3년간 기근이 든다. 일가..

심유경(沈惟敬): 정사(正史)이지만 야사(野史)도 그렇게 쓰기 힘들 것이다.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만력20년(1592년) 팔월 이십구일, 평양성(平壤城) 밖의 건복산(乾伏山)은 검날이 눈처럴 하얗게 빛나고, 칼과 창이 도열해 있었다. 한 백발장염(白髮長髥)의 노인이 가솔 몇명을 데리고 진영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조그만치의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이해 사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을 침략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육월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칠월, 명군은 조선에 원군을 보내나, 평양전투에서 참패한다. 조선국왕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명나라에서 한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이 왔다. 그의 이름은 심유경이다. 비록 무직(武職)이긴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몇명이 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도 들고 체력도 약해보였지만, 말솜씨는 뛰어났고, 담량도..

역사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 치신천재(治臣天才), 치국용재(治國庸才)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정덕15년(1520년) 구월, 남하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를 붙잡은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병이 든다.​반란을 평정하고 귀환하는 도중 명무종은 혼자서 청강포(淸江浦)에서 배를 몰아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던 중 부주의하여 물에 빠진다. 어려서부터 북경 자금성에서 생활했던 황제가 수영을 배웠을 리 없다. 물에 빠진 그는 병석에 눕는다.​이치대로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이런 저런 사고를 모두 겪었고, 물에 한번 빠져보아야 한 이틀 정도 기침을 하고, 태의들이 지어준 영단묘약을 먹고, 침대에 이틀 정도 누워 있으면 대체로 회복되곤 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부대가 북경으로 귀환한 후에도 명무종의 병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다음 해 정..

모백온(毛伯溫): 명나라는 안남(安南)을 정복했는가?

글: 자귤(紫橘)​가정제(嘉靖帝)는 각박과은(刻薄寡恩)한 것으로 유명했고, 시기심이 많은 군주였다. 그가 진심으로 대한 사람을 실로 많지 않다.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엄숭(嚴嵩), 서계(徐階)도 가정제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들지 못했다. 가정제의 유모의 아들인 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 육병(陸炳)은 비록 그의 신임을 받았지만, 가정제가 직접 그의 전포(戰袍)를 벗겨주는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모백온이라는 명나라의 개국공신 유백온(劉伯溫)과 성만 다른 인물은 가정제가 그를 위해 지어준 시에서 "태평대조귀래일(太平待詔歸來日), 짐여선생해전포(朕與先生解戰袍)"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그럼 도대체 이 모백온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을까?​명나라와 안남(安南)​홍무제때, 안남국왕(安南國王) 진일규(陳日喹)는..

장거정(張居正) vs 홍조선(洪朝選): 명나라의 궁정투쟁

글: 자귤(紫橘)​장거정이 집권한 기간동안 발호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부정부패했다는 것은 모두 증거가 있다. 다만 그가 번왕(藩王)의 재산에 욕심을 부렸다는 것은 지나친 점이 있다. 후인들이 장거정의 죄상으로 열거한 것중에는 는장거정이 황가를 능멸한 권간(權奸, 간사한 권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양양(襄陽)의 요왕(遼王) 재산에 침을 흘렸고, 요왕사건을 조사하던 홍조선(洪朝選)에게 요왕을 모함하도록 지시했으나, 홍조선이 따르지 않았고, 장거정은 다시 수하를 시켜 홍조선을 죽여 입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장거정의 제2의 조조이다. 장거정이 정말 그 정도로 악독했을까?​장거정과 홍조선의 관계​홍조선은 가정(嘉靖)시기의 진사이고 관직은 도찰원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史)에 이른다. 그가 장거정과 ..

남명(南明) 홍광제(弘光帝)와 가짜황제사건, 가짜황후사건, 가짜태자사건....

글: 자귤(紫橘)​명나라때의 수수께끼사건을 얘기하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창제(泰昌帝)시기의 정격안(梃擊案), 홍환안(紅丸案), 이궁안(移宮案)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세 사건은 명나라정국에 미친 영향이 비교적 적었고, 외적의 위협이 비교적 적은 상황하에서의 내부투쟁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때 더욱 유명한 것은 홍광제(弘光帝)때의 남도삼안(南渡三案) 혹은 홍광삼안(弘光三案)이다. 이 세 개의 사건은 명나라의 말세때 발생한 당쟁이고, 북쪽의 영토가 이미 청나라에 점령된 상황하에서 명나라의 관료들은 여전히 내부투쟁에 골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태창삼대안(泰昌三大案)과 동림(東林)​명나라때는 수수께끼사건이 아주 많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태창삼대안이다. 엄격히 말해서, 삼대사건은 태창제의 등극을 전후하여 ..

주순수(朱舜水):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끼친 "명나라유민(明的遗民)"

글: 자귤(紫橘)주순수가 일본에서 학문을 가르친 곳노신은 그의 藤野先生)>에서 일본의 중국인 주순수(朱舜水)를 언급하면서, 그를 "명나라의 유민(明的遗民)"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일본 이바라기현(茨城县, 역사상의 미토번(水户藩))에는 주순수의 동상이 있다. 일본에 망명한 중국인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큰 영향력을 지니고,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기념하고 있을까? 그것은 주순수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维新)의 씨를 뿌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주순수의 원래 이름은 주지유(朱之瑜)로, 절강여요(浙江余姚)사람이고 명나라말기 5대학자중 한명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 스스로의 호를 '순수(舜水)'라 하였는데, 이는 고향의 강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숭정11년(1638년), 주순수는 문무가 모두 뛰어..

만력제(萬曆帝):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가?

글: 역사기실유취(歷史其實有趣) 만력14년, 서력1586년. 만력제 명신종(明神宗) 주익균(朱翊鈞)의 후계자분제가 정식으로 의사일정에 올라왔다. 황제의 나이가 적지 않고, 황제에게 아들도 있으니, 국본(國本)을 안정시키고 국조(國祚)를 이어가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루빨리 후계자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사자인 만력제는 후계자인 황태자의 후보와 관련하여, 일찌감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은 황삼자(皇三子) 주상순(朱常洵)이었다. 당연히 그가 이 아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애옥급오(愛屋及烏)의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주상순의 모친은 바로 만력제가 가장 좋아한 비인 정귀비(鄭貴妃)였기 때문이다. 먼저, 만력제는 일찌기 정귀비에 대하여 "유가옥질(柔嘉玉質), 완닉란의(婉嬺蘭..

유백온(劉伯溫): 장량, 제갈량에 비견되는 그는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글: 흑색군(黑色君) 민간전통이야기에서 유백온은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과 나란히 이름을 떨치는 지자(智者)이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창립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 그후 공성신퇴(功成身退)하여 귀은전원(歸隱田園)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시기를 받아 주원장 혹은 호유용(胡惟庸)에게 독살당한다. 역사상 유백온은 정말 그렇게 신기하였을까? 왜 귀은한 후에 선종하기 힘들었을까? 유백온은 주원장의 눈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유백온은 언제 관직에 나왔을까? 주원장의 부모가 아직 건재하고, 주원장 본인이 아직 지주를 위해 소를 키우고 있을 때, 유백온은 이미 지방관리를 지낸지 오래되었다. 그 자리에서 4,5년간 있은 후, 현(縣)에서는 더 이상 승진할 기회가 없다고 보고, 또한 동료들과의 관계도..

왕보신(王輔臣): 일생동안 7번의 배신, 강희제에 투항한 후 왜 자결하였을까?

글: 진단설(震旦說) 스승이 어떤지에 따라, 닮은 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오삼계(吳三桂), 강양(姜瓖)이 왕보신에게 끼친 영향은 기실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 명나라의 장수였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에 진입한 후, 그는 이자성에게 귀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그의 가산을 몰수하자,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순한다. 청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다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계속하여 배반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왕보신은 원래 농민군 출신이다. 고영상(高迎祥), 이자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자형을 죽여버린 후, 명나라의 대동총독(大同總督) 강양(姜瓖)에 투항한다. 이자성이 경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강양은 투항을 선택하여, 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