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59

관도전투(官渡之戰)의 발생지: 정주 중모현(中牟縣)? 신향 원양현(原陽縣)?

글: 애역사(愛歷史)​한헌제 건안4년(199년), 여러 해동안의 전투를 거쳐 조조는 원술, 장수, 여포등 할거세력을 평정하여, 강역을 더욱 넓혔을 뿐아니라, 군사력도 크게 증강된다. 이미 하북의 원소와 맞서싸울만한 실력을 갖춘 것이다. 조조와 그의 모사들은 치열한 토론을 거쳐 업성(鄴城)을 기습할 계획을 세운다.​그러나, 조조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유비는 조조가 소홀한 틈을 타서, 허창에서 서주로 도망치고, 공개적으로 조조에 반기를 든다. 이와 동시에, 유비는 이 비밀계획을 원소에게 알린다.​조조의 기습계획을 들은 후, 원소는 매우 분노한다. 그는 유주에 할거하고 있던 공손찬을 섬멸시킨 후, 10만대군을 몰아 '청군측(淸君側)'의 명목을 내세워 조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중원의 양대 할거세력간의 ..

위촉오 삼국의 화폐정책: 건위오수(犍爲五銖)와 대천오백(大泉五百)

글: 천료역사재(淺聊歷史齎)​서론​중국고대의 화폐주조는 매우 골치아픈 일이었다. 왜냐하면 전폐(錢幣)의 분량도 맞추어야 하고, 색깔도 아주 중요했다. 한무제(漢武帝) 이전에는 전폐의 상황이 거의 엉망진창이었다.​특히,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동전주조기술을 장악한 후에는 대량으로 열악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한다. 이들 열악한 동전을 시중에 유통시킨 후, 양호한 동전은 자신이 가져온다. 그리고 양호한 동전을 이용하여 다시 열악한 동전을 주조한다.​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열악한 동전에 4전의 구리가 필요하다면, 양호한 동전에는 8전의 구리가 필요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후, 유비는 양호한 동전을 회수하여, 양호한 동전 1개로 열악한 동전 2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순환되면 백성들이 주머..

도원결의(桃園結義): 정사로 본 유비, 관우, 장비......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나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간의 정의(情誼)에 대한 묘사는 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사서에는 몇 마디로 적었는데, 유비가 일찌기 평원상(平原相)으로 있을 때, 관우, 장비 두 사람과 "침즉동상(寢則同床), 은약형제(恩若兄弟)"(잠을 잘 때는 같은 침대에서 자고, 그 정은 형제와 같았다). 평소에 관우, 장비는 유비의 별부사마(別部司馬, 정식편제에 들어 있지 않은 하급무관을 가리킴)로 공손하게 유비의 곁에 서서 호위를 섰다. 그리고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어려운 일들을 함께 겪는다.​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싸우는 수십년동안 유비, 관우, 장비는 ..

황건적(黃巾賊) 3명 우두머리의 최후는...?

글: 정회역사(情懷歷史)​황건적의 난은 동한말기의 농민전쟁이다. 한영제 광화7년(184년)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조정은 부패하고, 환관 외척은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으며, 변방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국세는 날로 약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전국은 큰 가뭄으로 수확이 거의 없는데도 세금은 줄여주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가난한 농민들은 거록(巨鹿)사람 장각(張角)의 호소하에 속속 반기를 들고 모여들었다. 모두 알다시피, 황건적의 난은 직접 동한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3명의 우두머리들은 결국 어떤 최후를 맞았을까?​장각(張角)​장각(? - 184), 기주(冀州) 거록(지금의 하북 평향 서남) 사람이다. 동한말기, 장각은 제자들에게 법술(法術)과 주어(咒..

진실한 이릉지전(夷陵之戰): 유비는 겨우 5만을 거느렸고, 제갈량은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글: 역사전쟁(歷史戰爭)​이릉지전은 삼국시대 "3대전투"중 마지막 전투이다. 는 이릉지전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했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관우의 피살로 인하여, 제갈량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분개하여 70만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육손에게 화소연영(火燒連營)당하며 전군이 몰살당한다. 육손은 오군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제갈량의 팔진도에 격퇴당하고, 촉군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연의에서는 이릉지전을 아주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변화무쌍하고 곡절이 많은 스토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역사상 진실한 이릉지전은 도대체 어떠했을까?​이릉지전의 원인​연의에서는 유비가 온 나라의 힘을 모아서 동오를 공격한 원인에 대하여 동오가 관우를 죽였기 때문에 유비는 의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적벽대전: 조조가 패배한 원인은 화공이 아니다?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역사상 적벽대전은 한말 삼분천하의 정치국면을 결정한 중대사건이다. 의 가공을 거쳐, 특히 설전군유(舌戰群儒), 초선차전(草船借箭), 차동풍(借東風), 장간도서(蔣幹盜書), 주유타황개(周遊打黃蓋), 화소적벽(火燒赤壁)등의 이야기로손류연합군이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한 민간기억을 채워놓았다. 그렇다면, 위, 촉, 오 삼국정립 국면을 확립시킨 적벽대전에서 결정적인 승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중 결정적인 작용을 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정말 손류연합군이 동풍을 빌어, 조조의 전선을 태워버렸기 때문에 조조의 군대가 패배하게 된 것일까?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하여, 최근 들어, 여러 연구자들이 삼국연의의 사고범위를 넘어, 역사로 되돌아가 더..

"관도대전(官渡大戰)"에 대한 의문점

글: 이경서(李慶西) 에는 관도대전을 쓰면서, 관우(關羽)가 조조(曹操)의 백마(白馬)에서의 포위당한 상황을 풀어준 것부터 시작한다. 그 일은 제25회 후반부에 쓰여 있다. 원소(袁紹)는 대장 안량(顔良)을 보내 여양(黎陽)에서 황하를 건너게 했고, 안량은 황하남안의 백마에서 유연(劉延)을 증원하러 가던 조조의 군대와 부닥친다. 안량은 송헌(宋憲), 위속(魏續) 두 장수를 연이어 참하고, 무예가 뛰어난 서황(徐晃)마저 물리친다. 그리하여 조조군영의 여러 장수들은 전율하게 된다. 이때 정욱(程昱)이 나서서 추천하여 관우가 출전한다.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조가 산 아래 안량이 배치한 진세를 가리키며, 기치가 선명하고 칼과 창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엄정하고 위엄이 있어, 관우에게 말하기를, ..

동오(東吳) 역사상 3차례의 탁고(托孤): 1차례 성공, 2차례 실패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223년, 유비(劉備)는 백제성(白帝城)에서 탁고(托孤)한다. 같은 해,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두 탁고대신은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나중에 이엄은 제갈량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파면당한다. 다만, 촉한은 제갈량의 통치하에 국력을 회복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조위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벡제성탁고는 비교적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동오의 역사에서도 3차례의 탁고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성공했지만, 두번은 실패하고 만다. 1. 손책탁고(孫策托孤) 건안5년 사월 사일(200년 5월 5일), 손책(孫策)은 단도산(丹徒山)에서 사냥하다가 허공(許貢) 문객의 암살을 당한다. 손책은 상세가 엄중했고,..

"이사쟁공(二士爭功)": 위나라가 촉과 오를 멸망시킨 후 왜 두 공신의 다툼이 일어났을까?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 삼국시대 말기에 사마소(司馬昭)가 주도한 조위(曹魏)가 촉한(蜀漢)을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두 공신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이사쟁공'의 비극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뿐아니라, 사마소의 아들인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주도한 서진(西晋)이 동오(東吳)를 멸망시키는 전쟁에 성공한 후, 다시 한번 두 공신 왕혼(王渾), 왕준(王濬)간에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다시 '이사쟁공'의 일막이 벌어진다. 유사한 상황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마씨가 주도하는 촉과 오를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항상 공신..

삼국시대 12필의 명마(名馬)

글: 흔다적노력(很多的勞力) 적토(赤兎) 말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적토연지수(赤兎臙脂獸).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1장이며, 말굽부터 꼭대기까지 키는 8척이다. 포효하면 하늘로 오르고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이다. 이 말은 먼저 동탁(董卓)이 타가가, 나중에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넘겨준다. 인중여포, 마중적토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여포가 죽은 후에는 조조(曹操)가 관우(關羽)에게 넘겨주고, 관우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관우가 죽은 후, 이 말은 여러 날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결국 굶어죽는다. 이 말은 말중의 극품일 뿐아니라, 의리를 아는 좋은 말이었다. 적로(的盧) 마작적로비쾌(馬作的盧飛快), 궁여벽력현경(弓如霹靂弦驚). 적로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아주 빨리 달리고, 아주 높이 뛴다. 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