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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83

대당후기 재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만일 당나라 289년의 역사를 나눈다면 가장 적절한 구분법은 바로 안사의 난 이전과 안사의 난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전란은 전방위적으로 당나라를 바꿔버렸다. 당나라말기의 여러 정치, 경제, 군사 내지 사회문제의 근원은 모두 이 반란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첫째, 이 반란은 개원, 천보연간의 성세의 번영을 무너뜨리고, 북방의 경제를 심각하게 파괴하였다. 인구는 대규모로 이주하여 전란의 중심이었던 중원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강회(江淮)지역으로 갔다. 전쟁시기, "경사의 쌀값은 1두(斗)에 1천까지 올랐다." 동관(潼關)에서 정주(鄭州) 사이의 "5백리에 편호(編戶)가 천여호일 뿐이었다." 그저 "소조처참(蕭條凄慘), 수유귀곡(獸遊鬼哭)"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2024. 12. 20.
"안사의 난"때 대당의 중앙군(中央軍)은 어디에 있었나? 글: 냉병기연구소(冷兵器硏究所)​반군인 안록산(安祿山)측은 반기를 든 후에 태원(太原) - 황하(黃河) - 장안(長安)의 진격노선을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하동지역에 대한 군사지배력이 완전하지 못한 점을 인식해서인지, 일찌기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성공적으로 증명한 바 있는 이 노선을 취하지 않고, 안록산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노선은 하북에서 남하한 후, 먼저 낙양(洛陽)을 공격하고, 다시 장안을 함락시키는 것이었다.​이 방안은 비교적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시간을 더욱 소모하게 된다. 당나라조정측을 보면 더욱 기이하다. 후세에 검토해보면, 당현종(唐玄宗)은 안록산에 대한 황당함에 가까운 신임으로 절호의 반란평정기회를 놓쳐버린다. 더욱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아마도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알.. 2024. 12. 12.
당나라가 안사의 난 이후 150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글: 역사황금도(歷史黃金島)​일반인들의 생각으로는 안사의 난 이후 대당제국이 사분오열되고, 이미 완전히 쇠퇴하였으며, 당나라가 흥성한 것은 안사의 난 이전의 100여년간이라고 여긴다.​기실, 대당은 화하역사상 보기 드물게 강력한 인성(靭性)이 있었떤 왕조이다. 안사의 난이라는 다른 왕조같으면 왕조가 멸망할 동란을 겪고서도 150년간이나 더 존속할 수 있었다.​그뿐아니라, 안사의 난 이후의 중당(中唐), 만당(晩唐)은 절대로 암흑시기가 아니었다. 반대로 안사의 난이후 당나라는 강력한 생명력을 폭발시켰고, 중고(中古)에서 근고(近古)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천년변국(千年變局), 천년곤국(千年困局)에 각 방면에서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한다.​그 배후의 원인은 아주 복잡하다.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그냥.. 2024. 12. 5.
안사의 난(安史之亂)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글: 화로치(禾珯茬)​당대종(唐代宗) 광덕원년(763년) 정월, '안사의 난'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1​사조의(史朝義)는 막주(莫州, 지금의 하북성 임구 북쪽)에서 당군에게 패배하고, 성안에 들어가서 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조의는 연(燕)의 마지막 황제이고 반란군장수 사사명(史思明)의 아들이다.​대세가 기운 것을 보자 부장(部將) 전승사(田承嗣)는 기운빠진 얼굴로 달려와 사조의를 만난다: "폐하, 당군의 공세가 너무 맹렬합니다. 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같습니다."​사조의는 원래 무능한 자였다. 전승사의 말을 듣자 더욱 당황해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경, 어떻게 하면 좋겠소?"​전승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위험한 전략을 써야할 것같습니다."​.. 2024. 11. 3.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진실은...? (3) 글: 최애역사(最愛歷史)​5​안사의 난을 평정한 여러 충신과 공신들 중에서, 곽자의는 유일하게 선종(善終)한 인물이다. 이건 항제가 그에 대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가 아니고, 곽자의 본이니 뛰어난 EQ를 지니고 있었으며, 인욕부중(忍辱負重)했고, 심지어 심지어 자오(自汚,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란만장하고 궤이한 정치투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사서(史書)에서 말하기를 안사의 난 이후, 천하의 안위는 곽자의 한 사람의 몸에 이십년간 달려 있었다. 당시, 곽자의는 "권력이 천하에 미치지만 조정의 의심을 사지 않았고, 공로가 세상을 뒤엎을 정도이지만, 황제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호화사치를 다 했지만, 그것에 대해 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실제로 이름을 날린 후의.. 2024. 10. 13.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진실은...? (2) 글: 최애역사(最愛歷史)​3​장순이 피살된 5백년후 문천상(文天祥)은 안에 이런 말을 쓴다: "위장수양치(爲張睢陽齒), 위안상산설(爲顔常山舌)". 장수양(수양성을 지킨 장순을 가리킴)의 바로 뒤에 나오는 안상산은 안진경(顔眞卿)의 당형인 안고경이다. 이것도 일가족 충열의 이야기이다.​안사의 난이 발발했을 때, 안고경은 상산(常山, 지금의 하북성 정정)태수를 맡고 있었다. 그의 당제(堂弟) 안진경은 평원(平原, 지금의 산동성 덕주)태수로 있었다. 안진경이 부임한 후, 이미 안록산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부장 이평(李平)을 조정으로 보내어 사실을 보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체 성의 병사들에게 병마를 준비하도록 명령하고, 호족들을 불러서, 함께 반군에 대응할 대책을 상의했.. 2024.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