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80

안사의 난(安史之亂)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글: 화로치(禾珯茬)​당대종(唐代宗) 광덕원년(763년) 정월, '안사의 난'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1​사조의(史朝義)는 막주(莫州, 지금의 하북성 임구 북쪽)에서 당군에게 패배하고, 성안에 들어가서 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조의는 연(燕)의 마지막 황제이고 반란군장수 사사명(史思明)의 아들이다.​대세가 기운 것을 보자 부장(部將) 전승사(田承嗣)는 기운빠진 얼굴로 달려와 사조의를 만난다: "폐하, 당군의 공세가 너무 맹렬합니다. 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같습니다."​사조의는 원래 무능한 자였다. 전승사의 말을 듣자 더욱 당황해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경, 어떻게 하면 좋겠소?"​전승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위험한 전략을 써야할 것같습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진실은...? (3)

글: 최애역사(最愛歷史)​5​안사의 난을 평정한 여러 충신과 공신들 중에서, 곽자의는 유일하게 선종(善終)한 인물이다. 이건 항제가 그에 대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가 아니고, 곽자의 본이니 뛰어난 EQ를 지니고 있었으며, 인욕부중(忍辱負重)했고, 심지어 심지어 자오(自汚,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란만장하고 궤이한 정치투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사서(史書)에서 말하기를 안사의 난 이후, 천하의 안위는 곽자의 한 사람의 몸에 이십년간 달려 있었다. 당시, 곽자의는 "권력이 천하에 미치지만 조정의 의심을 사지 않았고, 공로가 세상을 뒤엎을 정도이지만, 황제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호화사치를 다 했지만, 그것에 대해 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실제로 이름을 날린 후의..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진실은...? (2)

글: 최애역사(最愛歷史)​3​장순이 피살된 5백년후 문천상(文天祥)은 안에 이런 말을 쓴다: "위장수양치(爲張睢陽齒), 위안상산설(爲顔常山舌)". 장수양(수양성을 지킨 장순을 가리킴)의 바로 뒤에 나오는 안상산은 안진경(顔眞卿)의 당형인 안고경이다. 이것도 일가족 충열의 이야기이다.​안사의 난이 발발했을 때, 안고경은 상산(常山, 지금의 하북성 정정)태수를 맡고 있었다. 그의 당제(堂弟) 안진경은 평원(平原, 지금의 산동성 덕주)태수로 있었다. 안진경이 부임한 후, 이미 안록산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부장 이평(李平)을 조정으로 보내어 사실을 보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체 성의 병사들에게 병마를 준비하도록 명령하고, 호족들을 불러서, 함께 반군에 대응할 대책을 상의했..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진실은...? (1)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안사의 난은 전후로 8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이 8년이 단순히 관군과 반군간에 전쟁을 벌인 기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8년간, 조정내부에는 무수한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그리하여 원래 일찌감치 평정되었어야할 제국의 반란이 꼬박 8년이나 끌게 된 것이다. 그렇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정사이다.)​1​만일 반란과 평정의 각도에서 보면, 안사의 난은 간단히 3개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제1단계: 천보14년(755년) 십일월, 안록산(安祿山)이 거병하고, 반군이 연이어 낙양, 장안을 함락시킨다; 지덕2년(757년) 정월, 안록산이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당한다. ​제2단계: 지덕2년(755년) 구월, 십월, 당숙종(唐肅宗)은 곽자의(郭子儀), 이광필..

안록산(安禄山)의 부하들 중에는 한인(汉人)이 많았을까, 호인(胡人)이 많았을까?

글: 일국지군(一国之君)​안록산은 혼자서 범양(范阳), 평로(平卢), 하동(河东)의 삼진절도사(三镇节度使)를 맡았고, 3진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18.4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안록산이 당나라조정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기반이다. 안록산, 사사명(史思明) 두 사람은 소그드 호인(粟特胡人)이다. 즉 중국사서에서 말하는 "소무구성(昭武九姓)"이다. 이들은 처음에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살았다. 나중에 흉노(匈奴)가 굴기하자, 하서(河西)를 정복하며 월지인(月氏人)을 쫓아낸다.​구성(九姓)은 각각 강(康), 안(安), 조(曹), 석(石), 미(米), 하)-(何), 화심(火寻), 무지(戊地), 사(史)이다. 소무구성은 바로 월지인이다. 흉노에 패배한 후, 소무구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서역(西..

당나라이후 장안을 왕조의 수도로 삼지 않은 이유는?

글: 청수(清水) ​ 진, 한, 당의 휘황찬란한 역사는 모두 수도를 관중지구에 두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통일왕조는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어느 왕조도 관중을 수도로 삼거나, 관중을 기반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북송도 낙양으로 천도할 생각은 하였지만, 장안으로 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주원장도 관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의 관중지구는 이미 너무 파괴되어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관중지구의 쇠퇴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인 점도 있고, 정치적인 점도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중심의 이전이다. 특히 대운하가 개통되어 남북경제가 연결된 후, 관중의 경제적지위는 점차 저하된..

진실한 대당 장안(長安): 그다지 번화하지 않았다...

글: 해변적서새라(海邊的西塞羅) 아래의 도면은 당나라때의 장안성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주택지역(坊)과 상업지역(市)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높은 담장, 제도적으로 법률로 엄격히 통제했다. 이런 기이한 도시의 구성방식은 중국역사상 아주 유명한 "방시제도(坊市制度)"이다. 그렇다. 비록 지금이 대다수 영화드라마작품에서는 성당시기의 장안이 얼마나 번화했는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적으로 진실한 성당의 장안성은 아마도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정제(整齊), 숙목(肅穆), 냉청(冷淸)했었다고 할 것이다. 전체 도시의 25개 관도(官道)는 동서로 14도(道), 남북으로 15도(道)이다. 전체 장안성은 이들 도로로 모두 108..

발해(渤海)와 일본(日本)의 해상교류

글: 송정(宋靖) 발해국(698-926)은 '해동성국'으로 불리웠고, 나라는 200여년간 존속하면서, 동북아 여러 나라, 지역과 문화 및 경제교류를 진행했다. 발해국은 동북아에서 중요한 항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해상교통로를 통하여 발해국 남경(북한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靑海土城))에서 출발하여 직접 신라로 가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발해국 동경(지금의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일설에는 북한 부거리)에서 출발하여, 직접 일본으로 갔다. 대일항로는 비교적 안전했다. 발해국은 강역이 동해에 닿았고, 5개의 교통간선중 하나로서 일본도(日本道)는 발해의 제2대왕인 대무예(大武藝, 718-737)시기부터 개척되었다. 그때 일본은 신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일부러 발해와 '친인결원(親仁結援)'의 우호관계를 건립..

당나라의 멸망은 얼마나 참혹하였는가.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중국고대에 가장 명성이 높은 왕조는 당나라일 것이다. 대당의 태평성세때 팔방에서 조공을 바쳐 동방의 주인 내지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로서 존경을 받았다. 당나라의 황제는 아주 개명하여, 천하의 현사들을 불러모았다. 출신이나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재능만 있다면 모두 대당을 위해 공헌하도록 남겨서 일하고 생활하게 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대당이 번영했을 때의 모습이다. 그러나 대당이 멸망하는 참상에 대하여는 별다른 인상이 없다. 실제 당나라의 최후는 참열(慘烈)이라고 형용해도 지나치지 않다. 907년, 당나라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다.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 양왕(梁王) 주온(朱溫)이 권력을 찬탈하면서, 이씨의 당왕조정권은 붕괴하게 된다. 두 명의 당나라황제..

안록산(安祿山)은 반란후 1년만에 죽었는데, 안사의 난은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글: 압사룡(押沙龍)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주인공 중 하나로서, 안록산은 아주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야심도 있다. 그러나, 아주 집착적인 사명감같은 것은 없었다. 대사를 이루는 사람들은 왕왕 이런 사명감이 필요하다. 안록산은 투기꾼에 더 가까워보였다. 그는 낙양을 점령한 후 서둘르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한다. 그러나, 형세가 일단 악화되자 그는 신념을 잃어버린 듯했고, 이제 끝났다고 여기는 듯했으며, 곧 질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하가 그를 위로한다. "대사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만의 무리를 거두어 천하에 횡행하며 도척(盜跖)이 되더라도 오년 십년은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안록산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네가 내 마음을 풀어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