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73

한국전쟁 지원군 전쟁포로의 2/3가 타이완으로 가다....

글: 조대부(趙大夫)​통계에 따르면, 지원군전쟁포로중 6,673명이 대륙으로 돌아가고, 14,334명이 타이완으로 갔으며, 그외에 12명은 인도로 갔다.​이들 전쟁포로들이 대륙으로 돌아온 후 여러가지 불공정대우를 받다가 나중에 명예회복된 것과 관련한 자료는 비교적 많으니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타이완으로 간 이들 14,000여명은 어떻게 지냈을까?​1. 대만으로 가는 과정​ 1954년 1월 20일, 새벽 9시, 14,00여명의 전쟁포로는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휘날리며, "대만으로 돌아간다"는 구호를 외치며, 한국의 판문점부근의 유엔군전쟁포로수용소를 떠난다. 손중산, 장개석의 대형사진을 든 대만대표단이 이들을 맞이하러 왔고, 전쟁포로들을 열렬히 환영했다.적지 않은 전쟁포로들은 속속 ..

1966년 인민대회당 총격사건시말

글: 지식도학잡료 ​ 1966년, 인민대회당이 완공된지 7년만에, 총탄 한발이 중요한 국가활동을 진행하고 있던 인민대회당 2층의 유리를 깼다. 이는 인민대회당 완공이래 가장 기이하면서도 유일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 1966년 2월 2일 오전 10시, 인민대회당 2층의 접견실에서 중요한 국사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0시 10분, 이상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인민대회당 북쪽의 유리 한 장이 깨트려졌다. ​ 신고를 받고 달려온 북경시 공안국의 민경은 총탄이 2층의 유리에 맞아 2겹짜리 유리에 박혔으며, 총탄은 두 겹의 유리 사이에 끼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이는 인민대회당 완공이래 발생한 첫번째 총격사건이다. 그날, 공안부는 인민대회당에 정예인원으로 ..

왜 이전에는 장진호(長津湖)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작자: 운(雲) 한국대통령 윤석열이 4월 27일 미국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미국해병대가 1950년 장진호전투에서의 공헌을 찬양했다. 윤석열의 연설은 장진호전투를 다시 한번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도 장진호전투에 관해서 몇가지를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첫째, 왜 이전에는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10년전 대륙에서는 기본적으로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은 장진호전투를 몰랐다. 이건 무엇때문이었을까? 먼저 유백승(劉伯承) 원수가 장진호전투에 대하여 평가한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병단(兵團, 3개軍)이 한개 사단을 포위해서, 거대한 댓가를 치른 후에도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적을 궤멸시키지도 못했다. 적은 편제를 갖추어 전투에서 철수했고, 모든 장비와 부상병까지 데려갔다." 유백승 원수..

<유지단(劉志丹)>: 소설 한권으로 6만명이 연루되는 사건이 되다.

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중공중앙선전부는 공인출판사(工人出版社)에 '중공열사' 유지단에 관한 책을 출판할 것을 요청했고, 공인출판사는 유지단의 제수(弟嫂)인 이건동(李建彤, 리젠통)에게 집필을 부탁한다. 1962년 여름, 6차례나 원고를 수정한 소설 이 , , 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옛날 유지단과 충돌이 발생한 바 있는 윈난성위 제1서기 염홍언(閻紅彦, 얜홍얜)이 이의를 제기하여 연재가 중단된다. 염홍언은 반대의견을 중공중앙에 제출한다. 염홍언에 따르면, 소설 에 나오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인물은 고강(高崗, 가오강)을 모델로 한 것이며, 이 소설은 "고강"의 명예회복을 위해 쓴 것이라는 것이다. 고강은 섬북근거지의 창건자중 한명이다. 1940년대 연안정풍때 염홍언은 중공고위층에 고강의..

소련군은 중국동북에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약탈했는가?

글: 아승설역사(阿勝說歷史) 통계에 따르면, 일본군의 주력인 관동군은 24개사단외에 11개 여단 약 70만명의 군대였다. 그리고 만주국군대가 약 20만명이 있었다. 그외에 한국, 사할린섬남부, 쿠릴열도에 주둔하는 제17방면군, 제5방면군이 있었다. 극동지방의 일본군의 병력은 백만에 달했다. 제2차세계대전 후기, 장기간의 협상후,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마침내 출병하여, 동북으로 진입한다. 이는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어느 정도 진보적인 의미가 있다. 다만 사실상, 소련군이 동북에서 대거 재물을 약탈한 행위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중국의 동북지구는 일본이 여러해동안 경영하면서, 이미 일본의 해외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기지가 된다. 일본이 투..

타이완군대의 "군기(軍妓)" 제도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49년 국민당군대가 대만으로 패퇴한 후, 십여만명을 금문(金門)의 각 섬에 배치한다. 섬에 주둔한 군대는 소수의 고위장교들이 가족을 데리고 있는 외에 절대다수의 관병들은 '홀몸'이었다. 하루종일 진지를 집으로 삼고, 총포와 함께 지낸다. 1998년 5월 23일 타이페이에서 출판된 의 글에 따르면, 군대측은 '관병생활을 조정하고, 그들의 심령을 달래기 위해" 1950년초부터 "군락원(軍樂園)"제도(즉 戰地妓院)의 설치를 기획한다. 그리고 '군락원'은 부대의 주둔필요에 따라, 영내 혹은 군영부근에 주둔부대를 따라 설립한다; 그리고 부대주둔지가 이전되면 함께 이전되거나 취소된다. 1952년, 타이완군대측은 정식으로

1949년이후 대륙과 대만의 연해도서쟁탈전

글: 김이(金二) 1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해녀 여민병(女民兵)을 주제로 한 영화 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전체인민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영화였다. 의 스토리원형은 동두(洞頭)의 여민병이다. 여민병이라고 하여 여자들이 그저 총을 들고 폼만 잡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여민병의 훈련강도는 남성정규군에 못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8개월의 여민병까지도 사격훈련에 참가했다. 당시 동두도(洞頭島)의 여민병은 토비 45명을 생포하고, 토비 10명을 죽였으며, 특무 12명을 체포하고 총기 28점을 노획했다. 1965년 2월 절강성의 민병경연대회에서 왕월하(王月霞)는 중기관총, 경기관총, 돌격총, 소총등 7개의 사격항목에서 100여발의 총탄을 모조리 적중시켜, 절강성인민정부, 성군구로부터 "신창..

1960년대 중국은 소련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가?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60년대초 중소관계가 악화되고, 기근이 나타난 후, 중국내에서는 일찌기 간부들의 강연과 군중들에게 구전되는 방식으로 "중국은 항미원조(한국전쟁)으로 빚을 많이 졌고, 소련이 빚독촉을 해서 굶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고, 여러 해동안 일부 문학예술작품이나 비당사자들의 글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일 중국정부의 공개된 문건이나 중소"논전"때의 글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빚독촉'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기실, 3년곤란기에 소련측은 먼저 중국측에 채무상환을 연기할 수 있다고 제안했었다. 중국은 당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빚을 소련에 지고 있었을까? 첫째, 항미원조때, 중국은 대량의 무기장비가 급하게 필요했다. 소련은 비록 제공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북한원조를 '공동부..

신중국 최초의 정치사기사건의 내막

글: 경홍사인간(驚鴻似人間) 적지 않은 사람들은 놀고먹으면서 매일매일 멋진 생활을 보내는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할 수 없이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서 살아가야 한다. 중국근대에 가장 전설적인 사기꾼은 출신입화의 사기술로, 중앙의 고관이 되었을 뿐아니라, 소련으로 해외시찰을 가기도 하고, 미녀통역을 처로 취하기도 했다. 실로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의 이런 천의무봉의 사기극은 결국 그 자신이 자랑으로 떠벌이다가 결국 들통났고,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만명(李萬銘). 그는 1927년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의 상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양식과 짝퉁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그가 사기꾼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많은..

1960년의 대상해(大上海): 기아(棄兒)가 넘쳐나던...

글: 세상연구소(世相硏究所) 1960년을 전후하여 진소영(陳素英)은 무석시복리원(無錫市福利院)의 직원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마치 하룻밤만에 복리원이 아이들로 넘쳐나게 된 것같았다. "복리원의 주위에는 매일 버려진 영아(嬰兒)들이 있었고, 파출소와 가도주민위원회에서도 계속 주운 아이들을 보내왔다...." 2005년 12월, 산동심친단(山東尋親團)이 무석에서 심친회(尋親會, 부모찾기모임)를 열었는데, 77세의 진소영노인은 반세기전의 그 일막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은 무석만이 아니었다. 신속히 늘어나는 기아는 장쑤,저장일대의 여러 도시의 복리원들에 인구팽창의 압력을 가했다. 이런 흐름은 결국 상해까지 번져간다. 상해의 복리원도 곧 아이들이 꽉 차버린다. 기아는 상해의 길거리에서 계속 발견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