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논쟁 32

<명청시기폐관쇄국신탐>에 대한 몇 가지 의견

글: 호문휘(胡文輝) ◇ 발표된 시기로 보면, 이 글은 현재 대외정책에 영합하려는 혐의가 있다. 그 의도가 영사(映射, 현재를 역사에 비추어보는 것)에 있으니, 용심불량(用心不良)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논술과 견해를 보면, 내 생각에 이 글은 그리 큰 문제가 있지는 않다. 역사학과 그것이 일으키는 영사작용의 두 개는 반드시 등호를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근대이전의 "폐관쇄국"과 근대이래의 "폐관쇄국"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경제사회에 대한 영향도 완전히 다르다. ◇ 근대이전의 "폐관쇄국"은 확실히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아편전쟁이전에 청나의 대외정책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다. 청나라보다 더욱 전형적인 것은 일본의 도쿠가와막부이다. 그 봉쇄정도는 청나라보다 훨씬 심했다. 다..

역사연구원의 "폐관쇄국유리론"을 비판한다.

글: 욱풍(郁風) 최근 이라는 제목의 글이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다. 문장의 결론은 전통적인 "폐관쇄국으로 중국이 근대에 낙후되었다"는 관점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특정시기 유럽중심주의영향하의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정책은 반침략, 반식민, 반해외적대세력간섭, 반문화침투의 적극적인 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장의 원문은 이러하다: "우리는 명청시대의 중앙정부가 취한 것은 '자주한관'의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개방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개방할 것인지, 개방범위는 얼마나 넓힐 것인지는 국가주권범위에 속한다. 국내외의 일부학자들이 간단하게 그것을 '낙후'하다고 배척하고, '야만'스럽다고 질책하며 심지어 소위 '국제법'에 위반된다고 주..

역사연구원의 "폐관쇄국유리론"을 반박한다.

글: 양동욱(楊冬旭) 이라는 학술논문이 최근 중국여론을 뒤흔들고 있다. 지식계에서는 '폐관쇄국'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이 글의 작자는 '중국역사연구원과제조'라고 되어 있고, 6월 25일 정기간행물 에 처음 발표된다. 그리고 8월 24일 중국역사연구원의 위챗공개계정에 올린 후,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글은 근 16,000여자에 이르는 논문이고, 학술계의 '폐관쇄국'문제에 대한 연구, '폐관쇄국'의 개념연원, 명청시기 중국이 직면한 외부환경, 및 당시의 대외정책등등의 문제를 분석했다. 글에서는, 보수, 낙후, 봉쇄는 명청시기 중국사회의 주요내용이 아니고, 명청시기 대외교류의 전모도 아니라고 말하며 중국사회를 "폐관쇄국"이라는 표찰을 붙여서는 안되며, '자주한관'이라는 용어로 대체해야 한..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자주한관'정책의 한계성

6. '자주한관' 정책의 한계성 비록 명청정부의 '자주한관'정책은 외래침략을 방어하는 일면이 있고, 중외교류를 가로막지는 않았지만, 이 정책이 완전히 정확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그 한계성은 아주 분명하다.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한편으로, 소극적인 방어가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다. 16-19세기 서방식민침략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계속 중국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데, 명청통치자들은 이 역사적 대변국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나 과학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의 조공체계에 만족하면서, '천조상국(天朝上國)'으로 자처했고, 마음 속으로 대외왕래를 제한하거나 감소시키면 천하태평이 올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일구통상'이후 거대한 이익을 얻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해금을 실시한 ..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자주한관(自主限關)정책하의 대외교류

5. 자주한관정책하의 대외교류 "자주한관"정책은 국가주권을 보호하고, 서방식민세력의 침략을 방비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 형성이든 발전이든 모두 역사적인 합리성이 있다. 최신 연구를 보면, '자주한관'은 명청시기 중외경제무역왕래와 문화교류를 막지는 않았다. 명나리때 중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체였다. 명나라조정의 대외무역관리제도의 계속된 조정으로, 조공무역은 대체로 4가지 유형으로 발전한다. 첫째, 조공급사무역(朝貢給賜貿易). '정공(正貢)'과 '상사(賞賜)'는 실제로 중국과 외국간의 선물교환에 상당한다. 명태조는 조칙(詔勅)에서 여러번 말한다: "박래이정후즉가(薄來而情厚則可), 약기후래이정박(若其厚來而情薄), 시위불가(是爲不可)"(물건은 적지만 정이 두터우면 된다. 만일 물건이 두텁지만 정이..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4.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서방식민세력이 점점 압박해 들어오자, 명청 두 왕조의 통치자는 군사, 경제, 문화등 서로 다른 층면에서 일련의 정책을 취한다. 먼저, 군사적으로 서방국가에 대한 방비를 강화한다. "입중외지대방(立中外之大防)". 명나라 정덕연간, 포르투갈사신단이 베이징에서 쫓겨난 후, 중국과 포르투갈의 관계가 악화된다. 가정원년(1522년), 포르투갈선단이 중국연해로 들어갔다가 중국관병에 제지당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서초만지역(西草灣之役)"이 발발한다. 이 사건은 명나라통치자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외이(外夷)'에 대한 불신감을 증가시켰다. 그후 명나라는 연해지구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다. "혁도선(革渡船), 엄보갑(嚴保甲), 수포간민(搜捕奸民)" 해방의 관병을 정돈하고..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명청시기의 중국과 서방

3. 명청시기의 중국과 서방 명청시기의 중국대외정책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16-19세기 세계역사발전과정중에서 살펴보아야 하고, 중국과 서방을 비교하는 거시적인 시야 속에서 관찰해야 한다. 두 가지 기본사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비록 중국이 16세기부터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추세가 나타났고, 자본주의의 맹아가 조용히 싹을 키워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봉건전통의 뿌리는 여전히 강대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은 여전히 봉건국가였다. 다른 하나는 서방자본주의의 흥기 및 전세계에 걸친 식민지확장이다. 이 두 가지 기본사실은 16-19세기 중국과 서방간에 사회형태의 차이와 문화충돌의 일면이 존재하면서, 더더욱 침략과 반침략, 식민과 반식민의 일면도 존재한다. 서방식민세력을 ..

"명청시대폐관쇄국문제신탐":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2.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문헌에서 '폐관쇄국'에 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중국전통의 역사개념이 아니다. 17-19세기 서방인은 중국을 묘사할 때 '폐관쇄국'과 대응하는 말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서방의 주변에 있다는 지리적위치로 인하여 서방인들은 자주 중국이 일종의 세계와 '단절된(isolation)' '고립된(seclusion)' '외부영향을 받지 않는(hermetic)' 상태로 인식했다. 여기의 '단절'과 '고립'은 왕왕 '폐관자수(閉關自守)' 혹은 '폐관쇄국'으로 번역되었다. 확실히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 개념은 서방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폐관쇄국"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의 의미는 또 무..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학술계의 "폐관쇄국" 및 관련이슈에 대한 토론

글: 중국역사연구원과제조(중국역사연구원 2022년 제3기) 여하한 정책도 모두 시대의 산물이다. 명청시기, 세계는 자본주의상승기에 처해 있었고, 서방열강은 전세계에서 식민지확장의 과정을 가속화했다. 국제환경의 사상유례없는 거대한 변화,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방의 식민붐에 직면하여, 명청 두 왕조의 중앙정부는 이에 적응하는 대외정책을 채택한다. 민국시대이래, 명청의 중앙정부의 대외정책은 시종 국내회학계에서 토론하는 중요이슈였다. 학술계에서 주류를 점하는 견해는 명청 두 왕조의 중앙정부가 '폐관쇄국'정책을 취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전면적으로 나라의 문을 걸어닫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학술견해의 배후에 숨은 핵심문화개념은 봉쇄(封鎖)와 개방(開放), 야만과 문명의 이분론이다. 특정시기 유럽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