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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148

사무황제(四無皇帝) 함풍제(咸豊帝) 글: 천마행문(天馬行文) 함풍제의 본명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혁저(奕詝)로 청나라의 제9대 황제이다. 그는 20살에 등극했으며, 11년간 재위하다가 31살에 병사한다. 그는 중국역사상 마지막으로 실제 통치권을 가졌던 황제이고, 청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비밀입저(秘密立儲)로 황위를 승계한 황제이기도 하다. 많은 사학자들은 함풍제를 "사무"황제라고 부른다. 무원견(無遠見), 무담식(無膽識), 무재능(無才能), 무작위(無作爲) 1. 무원견 함풍제가 등극했을 때, 대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군대는 해이해져 있었으며, 정치는 부패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농민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서방열강은 더더욱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함풍제가 재위한 11년간, 청왕조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1851년부터 .. 2022. 8. 23.
중국은 왜 일본보다 자체 은행설립이 20년이나 늦어졌을까? 글: 건안(建顔) 1897년,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계자본은행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최초 일본계자본은행인 미쓰이은행(三井銀行)은 1876년에 일찌감치 설립되어 있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것이다. 중국최초의 중앙은행인 호부은행(戶部銀行)의 설립도 일본에 비하여 20년이 늦었다. 기실 일찌기 1885년에 이홍장(李鴻章)과 순친왕(醇親王)의 두 거물이 손을 잡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근대은행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기에 국가와 민족에 이로운 이 건의는 일군의 '애국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설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란 말인가? 1. 두 거물이 관영은행의 설립을 주장하다. 1860년대, 서방의 공업문명이 동아시아로 물밀듯이 밀려.. 2022. 8. 22.
1900년: 자금성(紫禁城)에서 도망치다. 글: 만두설(饅頭說) 1900년, 경자사변(庚子事變). 6월에 "선전포고"를 하여, 조정을 뒤흔들었다. 7월, 천진이 함락되고, 8월 북경이 포위된다. 팔국연합군은 성밖에서 보무당당했다. 8만의 청군은 성안에서 싸울지 말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당초 선전포고의 결정을 내렸던 그 여인(서태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서태후는 서쪽으로 도망친다. 1 1900년 8월 14일 정오, 최옥귀(崔玉貴)는 태후의 부름을 받았다. 최옥귀는 궁내의 태감중 2인자였다. 원래 그는 밖에서 서태후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입을 가시며 아편을 피우는 시간에 들어가서 "선패자(膳牌子)"를 청하는 일을 했다('선패자'는 태후 혹은 황제가 식사할 때, 접견을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패를 바쳐서 선택하도록.. 2022. 8. 16.
중국의 당금 정치형세는 서태후시절보다 못하다. 글: 원빈(袁斌) 중공20대가 가까워 오면서, 일련의 중국 지방고위관료들이 속속 시진핑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여, "충성붐"이 일어나고 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서 초보적으로 통계한 바에 따르면, 과거 2개월간 최소 9명의 중공성위서기가 당간행물에 글을 실어 시진핑에 대한 충성을 나타냈다. 6월 22일 허난성위서기 러우양셩(樓陽生)은 에 글을 실어, "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영수의 촉탁을 깊이 새기자", 시진핑사상을 학습, 관철하는 것은 "필수과목, 자습과목, 평생과목"이며, "양개유호(兩個維護)"를 실천하고, 시진핑의 지시를 정치관건으로 장악해야 한다고 했다. "충성이 절대적이지 않으면, 그건 바로 절대적인 불충이다(忠誠不絶對, 就是絶對不忠誠)"이라는 구호를 외쳤던 텐진시위서기 리홍중(李鴻.. 2022.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