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151

최후의 귀족: 강동벽(康同璧) 모녀의 인상 (2)

글: 장이화(章詒和) 강동벽의 집에 기거하는 동안 나는 3명의 교수를 알게 되었다. 한명은 장장강(張長江)이다. 그는 강유위의 제자인 장백정(張伯楨)의 손자이고, 북경사전문가인 장차계(張次溪)의 아들이다. 대외경무학원(지금의 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했으면 서예도 뛰어났다. 십일이나 반달에 한번씩 강동벽의 집을 찾아왔고, 강동벽의 문자류업무를 처리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몰래 이렇게 말해주었다: "네가 천극단에 있을 때, 강씨모녀가 너에게 보낸 회신은 대부분 내가 대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너를 알았다. 다만 만날 연분이 없었을 뿐이지." 장선생은 집으로 들어오면 서두르지 않고 탁자로 가서 앉아서 글쓰는 일로 바빴다. 그는 노인과 한담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나 길거리소식..

광서제(光緖帝)는 왜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사진은 그 사람의 일생을 남기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1843년 사진기가 발명된 이래, 서양의 상류층인사들은 자주 이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사진기가 청나라에 전래된 후, 서태후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지금도 우리는 서태후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서제의 경우는 몰래 찍은 사진 한장만 남아 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광서제는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제이다. 그의 일생은 전설적이면서도 비참하다. 1874년,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 서태후는 조정대신들과 긴급회의를 열었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아들 재첨(載湉)이 황위에 오르도록 결정한다. 그 말을 듣자 혁현은 땅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

순친왕부(醇親王府):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한 청나라 최고의 왕부

글: 소태양(小太陽) 청나라의 순친왕부에서는 일찌기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했으니, 청말 수십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왕부라 할 수 있다. 그 기세와 씀씀이는 다른 왕부를 훨씬 넘어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친왕부의 씀씀이를 통해서 우리는 개략 청말제일왕부가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 순친왕부의 출현 만청입관(滿淸入關,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에 자리잡다)후, 더 이상 명나라의 제도와 같이 왕실을 전국각지에 분봉(分封)하지 않았지만, 황실내에 여러 왕야(王爺)를 분봉한다. 그들이 획정한 엄격한 등급제도를 보면, 여러 작위들 중에서 오직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의 부저(府邸, 집)만을 "왕부"라 부를 수 있었다. 그보다 아래 등급인 패륵(貝勒), 패자(貝子)..

사무황제(四無皇帝) 함풍제(咸豊帝)

글: 천마행문(天馬行文) 함풍제의 본명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혁저(奕詝)로 청나라의 제9대 황제이다. 그는 20살에 등극했으며, 11년간 재위하다가 31살에 병사한다. 그는 중국역사상 마지막으로 실제 통치권을 가졌던 황제이고, 청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비밀입저(秘密立儲)로 황위를 승계한 황제이기도 하다. 많은 사학자들은 함풍제를 "사무"황제라고 부른다. 무원견(無遠見), 무담식(無膽識), 무재능(無才能), 무작위(無作爲) 1. 무원견 함풍제가 등극했을 때, 대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군대는 해이해져 있었으며, 정치는 부패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농민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서방열강은 더더욱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함풍제가 재위한 11년간, 청왕조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1851년부터 ..

중국은 왜 일본보다 자체 은행설립이 20년이나 늦어졌을까?

글: 건안(建顔) 1897년,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계자본은행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최초 일본계자본은행인 미쓰이은행(三井銀行)은 1876년에 일찌감치 설립되어 있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것이다. 중국최초의 중앙은행인 호부은행(戶部銀行)의 설립도 일본에 비하여 20년이 늦었다. 기실 일찌기 1885년에 이홍장(李鴻章)과 순친왕(醇親王)의 두 거물이 손을 잡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근대은행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기에 국가와 민족에 이로운 이 건의는 일군의 '애국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설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란 말인가? 1. 두 거물이 관영은행의 설립을 주장하다. 1860년대, 서방의 공업문명이 동아시아로 물밀듯이 밀려..

1900년: 자금성(紫禁城)에서 도망치다.

글: 만두설(饅頭說) 1900년, 경자사변(庚子事變). 6월에 "선전포고"를 하여, 조정을 뒤흔들었다. 7월, 천진이 함락되고, 8월 북경이 포위된다. 팔국연합군은 성밖에서 보무당당했다. 8만의 청군은 성안에서 싸울지 말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당초 선전포고의 결정을 내렸던 그 여인(서태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서태후는 서쪽으로 도망친다. 1 1900년 8월 14일 정오, 최옥귀(崔玉貴)는 태후의 부름을 받았다. 최옥귀는 궁내의 태감중 2인자였다. 원래 그는 밖에서 서태후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입을 가시며 아편을 피우는 시간에 들어가서 "선패자(膳牌子)"를 청하는 일을 했다('선패자'는 태후 혹은 황제가 식사할 때, 접견을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패를 바쳐서 선택하도록..

중국의 당금 정치형세는 서태후시절보다 못하다.

글: 원빈(袁斌) 중공20대가 가까워 오면서, 일련의 중국 지방고위관료들이 속속 시진핑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여, "충성붐"이 일어나고 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서 초보적으로 통계한 바에 따르면, 과거 2개월간 최소 9명의 중공성위서기가 당간행물에 글을 실어 시진핑에 대한 충성을 나타냈다. 6월 22일 허난성위서기 러우양셩(樓陽生)은 에 글을 실어, "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영수의 촉탁을 깊이 새기자", 시진핑사상을 학습, 관철하는 것은 "필수과목, 자습과목, 평생과목"이며, "양개유호(兩個維護)"를 실천하고, 시진핑의 지시를 정치관건으로 장악해야 한다고 했다. "충성이 절대적이지 않으면, 그건 바로 절대적인 불충이다(忠誠不絶對, 就是絶對不忠誠)"이라는 구호를 외쳤던 텐진시위서기 리홍중(李鴻..

하나의 민족에게 최대의 비애는 무지(無知)가 아니라, 무지를 자랑이라 여기는 것이다.

글: 뇌이(雷頤) 역사는 사악한 선생이다. 단지 자유인에게만 진상을 말해주어서, 오직 자유인만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자격과 능력이 있다. 서방을 배우는 학습과정에서, 근대 중국인들은 시종 진정한 문제를 찾지 못했다. 소위 남원북철(南轅北轍)이다. 방향이 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헛일인 것이었다. 이하지방(夷夏之防) 아편전쟁때, 임칙서(林則徐)는 광동으로 가서 방어를 했다. 다만 그는 영국인을 전혀 몰랐고, 적의 상황에 대하여도 전혀 몰랐다. 당시 서양인은 무릎을 굽힐 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누가 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임칙서도 믿었다. 일찌기 외국사신이 건륭제를 만날 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은 그들이 무릎을 꿇기 원치 않는 것이..

조복전(曹福田): 의화단(義和團)의 2인자

글: 여소뢰(余少鐳) 오랫동안 의화단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ㅇ니상은 '봉양필반(逢洋必反)' '봉양필멸(逢洋必滅)' 즉 외국 것은 모두 반대하고 없앤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소위 '양'자가 붙은 물건은 국가를 따지지 않고, 브랜드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서양인이 중국을 해치기 위해 가져온 것이니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화단이 한양멸양(恨洋滅洋)한 사료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그저 뒤져보기만 하면 나온다. 예를 들면, 청말민초의 광동 순덕 사람 나돈융(羅敦曧)이 쓴 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의화단은 철로, 전선은 모두 서양인들이 중국을 해하지 위한 것이니 철로는 불태우고 전선은 철거한다. 무릇 집안에 서양책, 서양지도를 보관하고 있으면 모두 '이모자(二毛子)'이니, 잡아서 반드시 ..

동치제(同治帝)의 사인은 매독인가 천연두인가?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동치13년말, 대청은 다시 한번 황제가 바뀌게 된다. 조정은 대행황제(사망한 전임황제를 가리킴)의 유조(遺詔)를 반포한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짐은 몸이 원래 강건했으나, 금년 십일월에 천화(천연두)에 걸렸다. 조심해서 조리했으나, 날이 갈수록 원기가 약해지고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전에 우리는 얘기했었다. 청나라황제의 유조에 사인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동치제는 명확하게 유조에서 자신이 천연두로 사망한다고 적었다. 에도 편자는 다시 한번 동치제가 천연두고 사망했다고 적는다: "천연두에 걸려 성체가 나빠지고 결국 신민을 떠나게 되었다." 청나라황제중에서 동치제는 수명이 가장 짧은 황제이다. 그전까지 이 기록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