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1 5

홍수전(洪秀全)의 기독교로 보는 "중국특색"

글: 제과(齊戈)​소위 "중국특색"은 최근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이다. 중국특색의 시장경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중국특색의 사법제도등등. 여기에는 한가지 기본적인 규율이 있다: 무릇 무엇이라고 말하기 불명확하고, 폐단이 연이어 발생하여 계속 비난받고, 온 천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도나 주의에 대하여 '중국특색'이라는 네 글자를 붙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게 되고, 잘 모르게 되다보면 결국 흐지부지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를 보자. 모택동이 행한 것은 기실 스탈린주의이다. 심지어 스탈린보다 더욱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공산당20대이후, 스탈린의 폭정은 전세계에 폭로되었고, 악명을 떨치게 되고, 불명예스러운 것이 되어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끌지 못..

장태염(章太炎): 민국시기의 정치광인

글: 장명(張鳴)​장태염(章太炎)은 지금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유명하지만, 청말민초때 그는 혁명가, 정치가로 유명했다. 단지 그의 정치가로서의 인생은 옛날의 책무더기에서 억지로 기어나온 것이다보니, 제대로 할 때는 그럴 듯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제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은 학자인데, 학문을 얘기할 때는 졸다가도 정치를 얘기하면 바로 기운이 살아난다. 단지 그렇게 기운이 살아날 때 너무나 자기마음대로였기 때문에 어떤 때는 동지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고, 또 어떤 때는 상대방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든다.​장태염은 동맹회(同盟會)의 초기 핵심인원이었다. 도쿄에서 민보(民報)를 간행할 때 그가 크게 싸웠다. 만일 마구잡이로 욕해대는 글재주를 지닌 그가 없었더라면,..

상탕(商湯)은 기우제를 지낼 때 왜 분신해야 했을까?

글: 마라(摩羅)​고대의 중국에서 백성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 비를 내려달라고 하는 것은 무사(巫師)의 주요직책중 하나였다. 만일 그가 오랫동안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으면, 그는 반드시 직접 하늘로 올라가서 하느님과 교섭해야 했다. 즉, 그는 스스로를 기우제의식의 제물로 바쳐,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 제사지내는 것이다. 하상주(夏商周) 삼대 및 그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모두 조정 혹은 부락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무사(혹은 국왕)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 하늘로 올라갔다. 춘추이후에는 점점 제물로 바치는 자를 지위가 비교적 낮은 무사 혹은 장애인으로 바꾸게 된다.​상탕(商湯)의 집권초기, 중원지구에는 5년간 연속하여 큰 가뭄이 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상탕이 하(夏)족을 무너뜨리고 천하에 사람을..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 티벳(西藏)으로 귀양간 고려왕

글: 자귤(紫橘)​고대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오호난화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발생한다. 그후 중원왕조는 거의 조선반도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원(元)나라는 예외이다. 조선반도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정권이었지만, 원나라의 번속국으로 쌍방은 생구(甥舅, 조카와 외삼촌)관계를 건립한다. 다만, 원나라는 언제든지 조선반도의 일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원영종(元英宗)이 고려(高麗)의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을 티벳(西藏)으로 유배보냈던 일이다. 원영종이 왜 일국의 왕을 유배보냈을까?​최초의 몽골-고려혼혈왕​고려의 충선왕 왕장의 부친은 충렬왕(忠烈王) 왕거(王昛)이다. 모친은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 원성공주(元成公主) 쿠틀룩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이다. 왕장은 1274년에 태어났으..

문혁(文革)시기 북경홍위병의 "소혼단(小混蛋)"사건

글: 미학도(米鶴都)2014/08/27​(1968년 여름, 문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북경에서 "소혼단사건"이 벌어진다. 여러 해동안 왕삭(王朔)의 소설, TV드라마 등 문예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이 사건은 이미 강호의 전설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설이 돌고 있다. 제662기에 실린 미학도의 글은 이 사건의 내력을 파악하게 해준다)​"이 일의 앞뒤 사정, 특히 마지막 장면은 여기에 앉아 있는 당사자들만이 분명히 말해줄 수 있다. 나머지 여러 소문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다." 조도도(曹都都)가 필자에게 해준 말이다.​2008년부터 2013년까지 사이에, 필자는 여러번 사건의 핵심당사자 왕남생(王南生), 중요참여자 유호생(劉滬生), 강소로(江小路), 목격자 왕기예(王冀豫), 조도도등을 인터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