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67

승상(丞相)과 재상(宰相): 어떻게 다른가?

글: 두두역사미(兜兜歷史迷)​고대에 명칭이 아주 비슷한 관직이 있다. 하나는 승상(丞相)이고 다른 하나는 재상(宰相)이다.​사람들의 느낌으로 말하자면 이 두 개의 관직은 아주 유사하다. 이름이 비슷한 것뿐 아니라, 지위도 유사하고, 심지어 하는 일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승상과 재상은 하나의 직위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명칭인 것일까?​기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재상과 승상은 한 사람이 가질 수도 있다.​중국의 상기(象棋, 우리나라의 장기)에 있는 말중에 "상(相)"이 있다. 여기의 "상(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승상과 재상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그들중 누가 권력이 더 큰가?​오래전에 승상이라는 관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관직이 아..

"촉(蜀)": 중국역사상 사천(四川)이외의 지방에도 있었다.

글: 제사(諸史)​현대한어에서 "촉(蜀)"은 일반적으로 주(周)나라때의 파촉국(巴蜀國), 유비의 촉한(蜀漢)정권, 사천(四川)의 별칭으로 쓰인다. 이 셋은 모두 현재의 사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료에 분명히 기록된 것을 보면, 사천이외에도 대량의 "촉지(蜀地)"가 있었가. 그리고 상(商)나라때도 촉국(蜀國)이 있었다.​예를 들어, 에는 "신황벌촉(新荒伐蜀)"이 기록되어 있다: 목야(牧野)전투이후, 주무왕은 수하에게 명령하여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상왕조의 촉국을 공격하도록 한다. 거기에는 "경자벌촉(庚子伐蜀), 을사자촉지(乙巳自蜀地)"라고 쓰여 있다. '경자일'에서 '을사일'까지는 겨우 6일이다. 주무왕의 군대가 하북북부에서 사천까지 6일만에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무왕이 공격한 '촉국'은 분명..

고대전쟁에 사용된 진법(陣法)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글: 자귤(紫橘)​의 전쟁장면을 보면 정말 사람의 피가 끓는다. 극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제후간의 전쟁에서 모두 먼저 진(陣)을 펼치고 다시 돌진하는 것이다.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전군을 지휘하여 바로 공격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왜 고대의 전투에서 항상 먼저 진을 펼치고, 상대방의 화살이 하늘에서 비오듯이 쏟아지는데, 우리측 병사들은 그냥 서서 그것을 맞았을까? 이는 고대전쟁사상의 가장 재미있는 주제와 관련된다. 열진(列陣). 전투는 집단간의 싸움이다. 진법과 대형은 전쟁의 결과에 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최초의 대방진(大方陣)​합리적인 제도는 반드시 당시의 생산력수준과 과학기술수준에 적합해야 한다. 전투에는 반드시 진을 펼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런 관계를 보여준다. 석기시대에 모두 나뭇잎..

<청사(清史)>는 왜 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글: 운향객(云乡客)​역사는 하나의 학문으로 그 목적은 인류활동의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학문의 요구사항중 하나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사실을 쓰는 것(写实)"이다. 통치계급이 자신을 미화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격대수사(隔代修史)" 혹은 "역대수사(易代修史)"를 제창했다. 격대수사의 장점은 시간간격이 비교적 가깝고, 각종 참고비교할 자료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정이 감독하는 역사편찬은 마찬가지로 통치계급의 입김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절대로 단지 어느 왕조의 사서만 읽지 않고, 반드시 주변 다른 나라의 사서를 참조하여 비교한다.​​원나라의 원혜종(元惠宗) 지정3년(1343년) 삼월, 조..

<이십사사(二十四史)>중 왜 뒤의 20사는 유명하지 않을까?

글: 하목역사군(夏目历史君) ​ 정사(正史)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마도 모두 공인된 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를 묻는다면 완벽하게 답안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언급하는 것은 개략 혹은 일 것이다. ​ 이 4사는 중에서 "전사사(前四史)"라고 불린다. 모두 개인적으로 편찬한 사서이다. 이런 상황은 기이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모든 시기의 역사는 다 중요한데, 왜 이후의 사서들은 이들 전사서에 비하여 명성이 높지 못한 것일까? ​ 와 의 큰 차이점 ​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얘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처음에 는 ""로 불렸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 , 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는 점차 유실되고, 는 로 ..

<죽서기년(竹書紀年)> vs <사기(史記)> : 어느 기록이 더 믿을만할까?

글: 독서문사(讀書文史) 중국역사상 이런 기서(奇書)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고, 그리하여 봉건정통완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이 책을 얘기하자면, 먼저 전설적인 사건부터 시작해야 한다. 1. 의 출토: 도굴꾼과 관련이 있다. 태강2년(281년) 하내군(河內郡) 급현(汲縣, 지금의 하남성 위휘시)에서 중국역사상 중요한 영향이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준(不準)이라는 도굴꾼이 교외지역의 한 고묘를 도굴했다. 아마도 그는 묘를 파헤친 후 새카만 묘실에서 가지고 온 횃불이 금방 다 타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묘실에는 대량의 죽간(竹簡)이 쌓여 ..

중국역사상의 사대천부(四大天府)

작자: 미상 중국역사상 모두 4개의 천부(天府)가 나타났다: 응천부(應天府), 순천부(順天府), 승천부(承天府), 봉천부(奉天府). "천"은 "천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부"는 제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이거나, 혹은 칭제이전에 출생하거나, 칭제이전의 봉지이거나 칭제이전에 발상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어느 군왕의 용흥지지(龍興之地)라는 뜻이다. 이 사대천부는 왕조에 따라 각각 설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대응하는 곳이 한 곳이 아니다. 응천부(상구/남경), 순천부(북경), 승천부(종상/대만/월남), 봉천부(무강/심양)이다. 왜 이렇게 같은 이름의 천부가 여러 곳에 나타났을까? 이는 그 도시와 관련있는 군왕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1. 응천부 송나라와 명나라때 응천부를 두었다. 송나라의 응천부는 하남..

중국 고대의 "은자(銀子)"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글: 장금(張嶔) 많은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고전명저'의 매매장면에는 '쇄은자(碎銀子)'를 사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예를 들어, 에서 주인공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돈은 왕왕 "몇 량(兩)의 산쇄은자(散碎銀子)이다. 나중에 '화괴(花魁)를 독점하는 매유랑(賣油郞)은 처음에 1년간 고생하며 청루(靑樓)의 '입문비(入門費)로 16량의 산쇄은자를 모았다. 의 왕의안(王義安)은 두 명의 수재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다가, '세냥칠전의 쇄은자를 주고' 비로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이 '쇄은자'는 일상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에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당승 사도도 '쇄은자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속됨을 면하지 못했다. 3명의 사제중 그래도 마음씀씀이가 가장 세심한 저팔계(猪八..

중국고대전쟁에서 전사병사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글: 뇌저(雷姐) 인류사회에 전쟁이 나타나면서, 잔혹한 전쟁터에서는 대량의 병사와 지휘관이 죽고 부상당했다. 부상당한 병사는 치료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전사하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옛날의 의료조건은 지금처럼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부상한 병사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냉병기 시대에 병사들의 상처를 적시에 치료하지 못하면, 감염되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에 전투가 벌어지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면, 고대군대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황야에 내버려두어, 짐승의 밥이 되게 한다. 고대 전쟁터에서 양군이 교전하면 패배한 측은 전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도망치게 된다. 그렇게 되..

"오성칠망(五姓七望)": 중국역사상의 명문집안

글: 천애간점역사(天涯看點歷史) 성씨(姓氏)는 우리들 모두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성씨도 적지 않게 탄생하고, 적지 않은 복성(複姓)은 단성(單姓)으로 바뀌었다. 지금 통계를 내보면, 단자성과 쌍자성을 합치면 수량이 1만개에 이른다. 현재의 성씨는 이미 고대의 계급제도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오성칠망'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들 성씨를 가진 사람은 고대의 명문망족이었다. 이는 상류사회의 명함을 하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나 같다. 고대의 황실조차도 '오성칠망'에 속하는 사람과 결혼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보면 정말 이들 일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그중 "오성(五姓)"은 이(李), 최(崔), 노(盧), 정(鄭), 왕(王)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