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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323

구야자(欧冶子)의 검제작과 관련한 어두운 생각...... 글: 산학(散鹤) ​ 구야자는 춘추시대 월(越)나라사람으로, 검을 주조하는데 뛰어나서, 후세인들은 그를 "검조( 剑祖)"로 칭한다. 월왕 구천(勾践)은 그에게 5자루의 검을 만들어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 검들의 명칭은 각각 담로(​湛庐), 순균(纯钧), 승사(胜邪), 어장(鱼肠), 거궐(巨阙)인데, 모두 쇠를 벨 수 있는 희세의 보검이었다. ​ 그러나, 그의 뛰어난 기술은 후세에 전승되지 못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구야자 주검(铸剑)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 "전설에 따르면, 고대의 병기대가 구야자는 나이가 들어서 곤륜현철(昆仑玄铁)을 한덩어리 얻는다. 원래 이미 노년에 접어든 그는 이런 특수한 재료를 사용하여 인생최후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임종때까지 .. 2024. 4. 19.
위가씨(魏佳氏): 그녀는 어떻게 일개 궁녀에서 황후에 올랐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 위가씨(魏佳氏), 만주 상황기(鑲黃旗) 사람이다(원래는 만주 정황기(正黃旗)의 포의(包衣)이다). 그녀는 건륭제(乾隆帝)의 셋째 황후이고, 가경제(嘉慶帝)의 생모이며, 내관영(內管領) 위청태(魏淸泰)의 딸이다. ​ 건륭10년(1745년), 그녀는 위귀인(魏貴人)에 봉해지며, 같은 해에 영빈(令嬪)으로 승진한다; 건륭13년(1748년), 에는 영비(令妃)로 승진하고, 건륭24년(1759년) 영귀비(令貴妃)로 승진한다; 건륭25년(1760년)에 황십오자(皇十五子) 영염(永琰, 즉 나중의 가경제)을 낳는다. 건륭30년(1765년), 황귀비(皇貴妃)로 승진하고, 건륭38년(1773년) 겨울, 황귀비의 아들인 황십오자 영염이 건륭황제에 의해 비밀입저(秘密立儲)된.. 2024. 2. 26.
조위(曹魏) 7명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 동한말기, 유주(幽州)는 자주 등장하는 지방이다. 처음에 유우(劉虞)라는 한나라 황실후예가 유주목(幽州牧)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부하인 공손찬(公孫贊)의 실력이 강화되면서, 결국 유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당연히 공손찬도 다시 원소(袁紹)에게 소멸된다. 207년, 조위는 원소집단을 철저히 소멸시키고, 유주는 결국 조위의 강역이 된다. 아래에서는 조위시대 7명의 유주자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 제1대: 최림(崔林) ​ 최림은 청하최씨(淸河崔氏)출신으로 양수(楊修),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등 조위대신들과 마찬가지로 대대로 이어내려오는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할 때, 최림이 기용되어, 기주별가(冀州別駕), 승상연속(丞相掾屬)이 된다. .. 2024. 2. 23.
석중귀(石重貴): 오대(五代) 후진(後晋)의 마지막황제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 북송 개보(開寶) 6년(973년) 삼월, 방주(房州)에서 정왕(鄭王) 시종훈(柴宗訓)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시종훈은 후주(後周)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는 비록 오대시기의 마지막 황제이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시기 황제는 아니었다. 요원한 북방에 일찌기 군림천하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974년에 병사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바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의 황제였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고, 20여년간이나 포로로 지내야 했을까? ​ 난세에 황제에 오르다. ​ 그는 바로 후진의 마지막 황제인 석중귀이다. 석중귀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숙부인 석경당(石敬瑭)에 의해 길러진다. 소년시기에 석중귀는 말이 적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며, 질박하고 순후했다. 그.. 2024. 2. 20.
한명제(漢明帝)의 다섯째 아들인 유달(劉炟)은 어떻게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을까? 글: 이대규(李大奎) ​ 동한(東漢)왕조에는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마황후, 등황후, 염황후, 양황후는 모두 자식을 두지 못했고, 책봉된 황태자는 많은 경우 폐출되었다. 예를 들어, 동해왕(東海王) 유강(劉疆), 청하왕(淸河王 劉慶), 제음왕(濟陰王) 유보(劉保)등. 그리하여, 번왕이나 그 후손들이 여러가지 기연이 합쳐지면서 황위를 계승하는 일도 벌어졌다. ​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과 가귀인(賈貴人) 사이에 태어난 다섯째 아들 유달(劉炟)도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는 어떻게 황위를 승계할 수 있었고, 역사에 위업을 남길 수 있었을까? ​ 유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황후가 맡아기르다. ​ 기원56년에 출생한 황자 유달은 적출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4명의 형이.. 2024. 1. 30.
촉한(蜀汉) 후기에 인재가 없게 된 근본 이유는...? 글: 역사대작회(历史大炸烩) 촉중무대장(蜀中无大将) 요화충선봉(廖化充先锋) 촉은 왜 후기에 인재가 결핍되었을까? 촉은 삼국정립시기 비교적 특수한 정권이었다. 유비는 당시 18로제후들 중에서 명성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고, 어떻게 보더라도 조역이었으며, 언제든지 원소나 황건적에게 소멸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똑똑해지고, 살아남은 자가 왕이 되는 법이다. 손권, 조조등 세력이 강력한 자들을 모두 제거한 후, 귀퉁이에서 발전하고 있던 유비도 마침내 세력을 이루게 된다. 촉한의 굴기는 유비가 남의 것을 훔쳐서 이룬 것이다. 동시에 유비는 스스로 유황숙으로 칭하면서,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유일한 정통혈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인재들이 그에게 의탁하게 되었.. 2024. 1. 2.
장춘교(張春橋): 무장정변을 계획했었다. 글: 임휘(林輝) ​ 모택동 사후 1개월만에, 화국봉, 섭검영등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모주석을 위해 일하던 “사인방” 즉,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왕홍문을 체포했다. 이와 동시에 “사인방”의 추종자들에 대한 숙청도 전개했다. ​ 1980년, 중국 최고인민법원에 성립된 특별법정은 “사인방”에 대하여 보여주기식의 공개재판을 진행하여, 그들 모두를 “임표강청반혁명집단”의 구성원으로 규정하고, 문혁의 죄책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며, 상응하는 형벌을 내렸다. ​ 나중에 공개된 재판기록에 따르면, 북경군사정변이후에 상해에서 미수에 그친 정변이 한건 있었다. ​ 1980년 12월 12일, 왕홍문, 장춘교는 법정에 나와 심문을 받는다. 재판장 강화(江華), 부재판장 증한주(曾漢周)등 재판관은 합계15명이었고, 재판에.. 2023. 12. 20.
만력제(萬曆帝):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가? 글: 역사기실유취(歷史其實有趣) 만력14년, 서력1586년. 만력제 명신종(明神宗) 주익균(朱翊鈞)의 후계자분제가 정식으로 의사일정에 올라왔다. 황제의 나이가 적지 않고, 황제에게 아들도 있으니, 국본(國本)을 안정시키고 국조(國祚)를 이어가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루빨리 후계자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사자인 만력제는 후계자인 황태자의 후보와 관련하여, 일찌감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은 황삼자(皇三子) 주상순(朱常洵)이었다. 당연히 그가 이 아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애옥급오(愛屋及烏)의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주상순의 모친은 바로 만력제가 가장 좋아한 비인 정귀비(鄭貴妃)였기 때문이다. 먼저, 만력제는 일찌기 정귀비에 대하여 "유가옥질(柔嘉玉質), 완닉란의(婉嬺蘭.. 2023. 11. 7.
서위(徐渭): 팔고부중(八考不中), 구사불사(九死不死)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명나라때의 대문인(大文人)을 얘기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해진(解縉), 당백호(唐伯虎)를 알고 있고; 능문능무(能文能武)의 인물을 말하면, 왕양명(王陽明)을 얘기한다. 그들의 경력은 모두 전설적이다. 다만 이들보다 더욱 전설적인 인물이 있으니 바로 가정(嘉靖), 융경(隆慶), 만력(萬歷)연간에 활약한 서위(徐渭)이다. 서위는 일생동안 8번 과거에 실패했으며, 그후 호종헌(胡宗憲)이 지휘하는 동남항왜전쟁(東南抗倭戰爭)에 참가한다. 서위의 책략하에 명나라는 대해도(大海盜) 서해(徐海), 왕직(汪直)을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종헌의 죽음으로, 서위는 의기소침해져서 9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지만 죽지 않았다. 결국 빈곤하게 여생을 살아갔으며 죽을 때는 곁에 개 한마리만 그를 지켰다. 서.. 2023. 8. 16.
유백온(劉伯溫): 장량, 제갈량에 비견되는 그는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글: 흑색군(黑色君) 민간전통이야기에서 유백온은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과 나란히 이름을 떨치는 지자(智者)이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창립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 그후 공성신퇴(功成身退)하여 귀은전원(歸隱田園)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시기를 받아 주원장 혹은 호유용(胡惟庸)에게 독살당한다. 역사상 유백온은 정말 그렇게 신기하였을까? 왜 귀은한 후에 선종하기 힘들었을까? 유백온은 주원장의 눈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유백온은 언제 관직에 나왔을까? 주원장의 부모가 아직 건재하고, 주원장 본인이 아직 지주를 위해 소를 키우고 있을 때, 유백온은 이미 지방관리를 지낸지 오래되었다. 그 자리에서 4,5년간 있은 후, 현(縣)에서는 더 이상 승진할 기회가 없다고 보고, 또한 동료들과의 관계도.. 2023.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