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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409

황후간통스캔들: 요(遼)나라를 멸망시키다. 글: 청수공류(淸水空流)​이 스캔들사건은 지금까지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사건은 확실히 요나라의 멸망에 상당한 정도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쨌든 황후가 외간남자와 간통했다는 것이니, 정사에 기록되기는 어려운 일이다.​1063년, 이 해는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의 청녕(淸寧)9년이고, 북송인종(北宋仁宗) 조정(趙禎)의 가우(嘉祐)8년이다.​이 해에 북송에서 발생한 최대의 정치사건은 송인종의 붕어이다. 송인종은 북송의 4번째 황제이며, 12살에 등극하여, 42년간 재위했고, 54세에 붕어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였다.이 해는 요나라에 있어서 동탕(動蕩)의 한 해였다. 요도종 야율홍기는 요나라의 여덟번째 황제인데, 이 해에 아주 심각한 종실내란이 발생한다. 그해.. 2025. 2. 18.
소관음(蕭觀音): 성야후족(成也后族), 패야후족(敗也后族) 글: 소립권주(小粒圈主)​소관음(蕭觀音)은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의 첫번째 부인이고, 거란에서 유명한 재녀황후(才女皇后)이다. 출신이 고귀하고, 글을 알고 이치에 밝았으며, 또한 황태자의 생모이다. 이렇게 재덕을 겸비한 나무랄데없는 황후가 야율을신(耶律乙辛)에 의해 사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무너지고, 자식과 며느리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만들었으니 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많은 사람들은 야율을신의 야심과 권력욕때문에 감히 황후, 황태자를 건드렸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실로 궁질랄(窮迭剌)의 아들인 야율을신은 너무 높이 띄워주는 것이다. 기실, 소관음의 죽음은 그저 그녀의 소씨 후족세력(后族勢力)의 내부다툼때문이었을 뿐이다.​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후족(后族)의 재녀(才女.. 2025. 2. 18.
야율을신(耶律乙辛): 요나라의 대간신 글: 무림지가(茂林之家)​야율을신(耶律乙辛)은 자(字)가 호도곤(胡睹衮)이고, 오원부(五院部,요태조때 질랄부(迭剌部)가 너무 강성하여 오원부와 육원부로 나눈다) 사람이다. 그는 하층 평민출신이고, 그의 부친은 부락사람들에 의해 "궁질랄(窮迭剌)"로 불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율을신의 모친은 야율을신을 회임했을 때, 꿈에서 자신이 영양(羚羊)을 붙잡아 힘껏 뿔을 뽑았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후 해몽하는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니, 그녀에게 이는 길몽이고 양(羊)에서 뿔을 뽑아내면 왕(王)자가 되니 그는 향후 분명히 왕(王)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야율을신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그지없었고, 기도가 비범했다. 부친은 아들이 신기하다고 여기고 나중에 분명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야율을신은.. 2025. 2. 18.
우겸(于謙): 그의 죽음은 명나라 최대의 비극이다.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정월 십칠일, 날이 밝아왔다. 대명황제 주기옥(朱祁鈺)은 신하들과의 약속에 따라, 이날은 조조(早朝)를 회복할 예정이었다.  신하들은 일찌감치 오문(午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과 북이 함께 울리는 소리를 듣고, 그들은 꼬치에 꿰인 물고기처럼 줄줄이 봉천문(奉天門)으로 들어갔다. 다만 눈앞의 황제를 보고 그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고, 그들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태제(景泰帝) 주기옥이 아니라, 6년여동안 연금되어 있던 태상황(太上皇) 주기진(朱祁鎭)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때, 서유정(徐有貞)이 큰 소리로 외친다: "상황(上皇)께서 복벽(復辟)하셨다!" 뒤를 이어 주기진이 신하들에게 말한다: "경태제는.. 2025. 2. 17.
포가원수(袍哥元帥) 하룡(賀龍)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하룡(賀龍)을 얘기하자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십대원수(十大元帥)는 밀리터리덕에게 오랫동안 인기있는 주제였다. 그러나, 밀리터리덕들 사이에서는 그가 전투에서 비교적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임총(林總, 임표), 속대장(粟大將, 속유)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밀리터리덕들은 어쨌든 여러 사람들 중에서 일부분이다. 전체 국민들 사이에서 임총과 속대장의 인기는 하노총(賀老總, 하룡)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1930년대의 북방은 홍군(紅軍)과 관련이 없었다. 절대다수의 백성들은 홍군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군(軍)"이 너무 많았고,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으며, 백성들은 수천리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 2025. 2. 16.
필원(畢沅): 입비광인(立碑狂人) 글: 마약학교수(魔藥學敎授)필원(1730-1797), 지금의 강소(江蘇) 태창(太倉)에서 태어났고, 청나라 건륭, 가경제때의 관리, 학자이다. 필원은 섬서순무(陝西巡撫)로 10년간 재직했는데, 문화고적들을 고찰하고, 고대제왕의 능묘를 보보하고, 비림(碑林)을 정비했다. 그는 이들 문화유적과 능침에 비문을 썼는데, 완전하지 않은 통계에 따르면, 섬서 경내에 남아 있는 필원의 비문은 65개에 달한다.​필원비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중간에 큰 글자로 능묘의 연대, 묘주인의 명칭과 신분을 썼고, 양측에는 "사진사급제병부시랑섬서순무겸도찰원우도어사필원서(賜進士及第兵部侍郞陝西巡撫兼都察院右副都御史畢沅書)"와 "대청건륭세차XX(大淸乾隆歲次XX)"등 작은 글자 및 비를 세우는 장소의 지방관리의 신분과 이름을 적었다.​주.. 2025.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