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1374

웅정필(㷱廷弼): 역사의 붕괴, 누구도 화를 피할 수 없다.

글: 일경지월(一景之月)​1​명나라말기의 역사를 읽다보면 한 사람을 절대로 피해갈 수가 없다. 그는 바로 명장(名將) 웅정필(熊廷弼)이다.​그는 아마도 척계광(戚繼光)처럼 빛나지도 않고, 이성량(李成梁)처럼 야심이 크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의 뒤를 이은 손승종(孫承宗)만도 못할지 모른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존재이다.​웅정필은 어렸을 때, 그다지 편안하게 보내지 못했다. 비록 공부는 잘했지만, 현실은 그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않았다. 웅씨집안은 돈이 없었고,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하면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별로 바뀌지 않았다.​스무살이 되던 해, 고향인 강하(江夏,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에는 연속 3년간 기근이 든다. 일가..

방통(龐統)의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의문....

글: 정월난양(淨月暖陽)​삼국연의 덕분에, "와룡, 봉추중 한명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방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성을 천추에 남긴 제갈량과 나란히 이름을 떨칠 정도인데, 일찌감치 죽어버려서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와룡, 봉추가 모두 있었더라면, 유비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을까?​소설에서 방통은 서천(西川)을 취하는 전투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곳은 "낙봉파(落鳳坡)"이다. 유비의 백마 "적로(的盧)"를 탔는데, 적로는 예로부터 "극주(克主)"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상황은 명장 방연(龐涓)과 극히 유사하다. 이렇게 많은 신기한 점들이 있으므로 방통의 죽음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天命注定)"이라..

유인궤(劉仁軌): 당나라때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항왜민족영웅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당고종(唐高宗)때 낙양(洛陽)에 순우씨(淳于氏)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죽인 죄로 대리시(大理寺)에 압송되어 수감되었다. 그녀의 죄명은 마땅히 사형감이다. 그런데 재상(宰相) 이의부(李義府)가 마침 대리시를 시찰왔다가 순우씨를 보고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린다.​그리하여, 이의부는 대리시승(大理寺丞) 필정의(畢正義)에게 자신이 순우씨를 첩으로 삼고 싶으니, 방법을 찾아서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한다.​필정의는 그저 담량이 적은 관리였다. 재상의 분부를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몰래 희생양을 찾아서 순우씨와 바꾸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대리시경(大理寺卿) 단보현(段寶玄)에게 발각되고, 그가 고발하여 경성을 뒤흔들게 된다.​사안이 중대하다보니 당고종이 직접..

양각애(羊角哀)와 좌백도(左伯桃): 결의형제(結義兄弟)이야기의 원조

글: 자귤(紫橘)​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를 배울지언정, 와강일주향(瓦崗一炷香)은 배우지 말라.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를 맺은 후,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는 형제가 된다. 그들이 결의를 맺은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칭송받고 있다. 이후 형제결배(結拜)이건 아니면 흑방결배이건 모두 도원결의의 여파라 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유관장의 도원결의 이야기는 명(明)나라때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명나라이전에 형제간의 결의를 맺을 때는 양각애와 좌백도를 따랐다. 이 두 사람 간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별로 유명하지 않은 형제정의​양각애, 좌백도의 이야기는 정사(正史)에 실려 있지 않다. 두 사람의 이야기의 출처는 서한시대 유향(劉向)의 이다. 아쉽게도 원문은 송나라때 이미 유실되었고, 오늘날 볼..

당덕종(唐德宗): 큰 일을 하려다, 큰 일을 당하다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나라는 이미 "부고모갈(府庫耗竭, 국고를 소모하여 고갈되다)", "금군미약(禁軍微弱)"의 곤경에 빠진다. 그러나, 제오기(第五琦), 유안(劉晏), 양염(楊炎)등 이재(理財)대가들의 노력을 거쳐, 당덕종 즉위초기인 건중원년(780년)의 국고세수는 이미 1305만관곡(貫斛)에 이른다. 정상적인 세입외에 매년 700만관곡에 이르는 염리(鹽利)세수도 있었다. ​그의 부친 당대종(唐代宗)의 즉위초기와 비교하면 국고수입은 몇배로 늘었다.​이런 자금은 당덕종의 허리를 튼튼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삭번(削藩)"전쟁을 시작한다.​그는 큰 일을 하고자 했다(大幹一場).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이를 피동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1​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

의화단(義和團) 고위층의 최후

글: 오일주(吳一舟)​1901년초, 청정부는 서방열강의 조건을 받아든다. 그중에는 강력하게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12명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재의(載漪), 재란(載瀾), 재훈(載勳), 영년(英年), 조서교(趙舒翹), 육현(毓賢), 계수(啓秀), 서승욱(徐承煜), 서동(徐桐), 강의(剛毅), 이병형(李秉衡), 동복상(董福祥)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각각 달랐다. 어떤 사람은 처형당하고, 어떤 사람은 유배를 가고, 어떤 사람은 단지 파직당했으며, 어떤 사람은 전사했다.​서태후는 서안으로 도망치는 도중에 군대에 의화단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의화단은 소탕되었는데, 그 의화단의 고위층들(서태후에 의해 의화단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사람, 혹은 조정에서 의화단을 적극 지지한 대신)은 어떻게 할 것..

상탕(商湯)은 기우제를 지낼 때 왜 분신해야 했을까?

글: 마라(摩羅)​고대의 중국에서 백성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 비를 내려달라고 하는 것은 무사(巫師)의 주요직책중 하나였다. 만일 그가 오랫동안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으면, 그는 반드시 직접 하늘로 올라가서 하느님과 교섭해야 했다. 즉, 그는 스스로를 기우제의식의 제물로 바쳐,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 제사지내는 것이다. 하상주(夏商周) 삼대 및 그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모두 조정 혹은 부락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무사(혹은 국왕)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 하늘로 올라갔다. 춘추이후에는 점점 제물로 바치는 자를 지위가 비교적 낮은 무사 혹은 장애인으로 바꾸게 된다.​상탕(商湯)의 집권초기, 중원지구에는 5년간 연속하여 큰 가뭄이 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상탕이 하(夏)족을 무너뜨리고 천하에 사람을..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 티벳(西藏)으로 귀양간 고려왕

글: 자귤(紫橘)​고대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오호난화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발생한다. 그후 중원왕조는 거의 조선반도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원(元)나라는 예외이다. 조선반도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정권이었지만, 원나라의 번속국으로 쌍방은 생구(甥舅, 조카와 외삼촌)관계를 건립한다. 다만, 원나라는 언제든지 조선반도의 일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원영종(元英宗)이 고려(高麗)의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을 티벳(西藏)으로 유배보냈던 일이다. 원영종이 왜 일국의 왕을 유배보냈을까?​최초의 몽골-고려혼혈왕​고려의 충선왕 왕장의 부친은 충렬왕(忠烈王) 왕거(王昛)이다. 모친은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 원성공주(元成公主) 쿠틀룩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이다. 왕장은 1274년에 태어났으..

심유경(沈惟敬): 정사(正史)이지만 야사(野史)도 그렇게 쓰기 힘들 것이다.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만력20년(1592년) 팔월 이십구일, 평양성(平壤城) 밖의 건복산(乾伏山)은 검날이 눈처럴 하얗게 빛나고, 칼과 창이 도열해 있었다. 한 백발장염(白髮長髥)의 노인이 가솔 몇명을 데리고 진영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조그만치의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이해 사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을 침략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육월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칠월, 명군은 조선에 원군을 보내나, 평양전투에서 참패한다. 조선국왕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명나라에서 한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이 왔다. 그의 이름은 심유경이다. 비록 무직(武職)이긴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몇명이 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도 들고 체력도 약해보였지만, 말솜씨는 뛰어났고, 담량도..

역사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 치신천재(治臣天才), 치국용재(治國庸才)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정덕15년(1520년) 구월, 남하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를 붙잡은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병이 든다.​반란을 평정하고 귀환하는 도중 명무종은 혼자서 청강포(淸江浦)에서 배를 몰아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던 중 부주의하여 물에 빠진다. 어려서부터 북경 자금성에서 생활했던 황제가 수영을 배웠을 리 없다. 물에 빠진 그는 병석에 눕는다.​이치대로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이런 저런 사고를 모두 겪었고, 물에 한번 빠져보아야 한 이틀 정도 기침을 하고, 태의들이 지어준 영단묘약을 먹고, 침대에 이틀 정도 누워 있으면 대체로 회복되곤 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부대가 북경으로 귀환한 후에도 명무종의 병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다음 해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