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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372

청나라 궁정의 서양의사 글: 관설령(關雪玲)​청나라 황제의 의료집단은 다원화된 팀이 있었다. 중견역량인 태의원(太醫院)의 의관(醫官)외에 서양의사도 중요한 일원이었다. 청나라 중기 서양의사들이 청나라궁중에 재직하면서 의료활동을 진행했다. 먼저 황실에서 일하면서 황제의 신체건강을 책임졌다. 나중에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서양의사가 강희제의 병을 치료하다​​​서양인의사가 황제를 치료한 저명한 사례는 두 개가 있다. 각각 강희32년(1693년)과 강희47년(1708년) 강희제가 학질(虐疾)과 심계증(心悸症,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를 가리킴)을 치료한 것이다.​강희32년 강희제의 신체상황에 관하여 강희제 자신이 쓴 바를 보면, "짐은 정월 초팔일부터 한병(汗病, 땀이 나는 병)이 시작되고.. 2024. 12. 25.
아편전쟁: 군사상의 무능, 도덕상의 무치 글: 최애역사(最愛歷史)​한쪽은 강경한 태도의 청나라 흠차대신(欽差大臣)이고, 다른 한쪽은 절대로 타협이 없는 영국의 주중상무감독이다. 이들은 "교흉(交凶, 흉수를 내놓는 것)"과 "구결(具結, 책임을 인정하는 서면)"문제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는 1839년 중국-영국관계의 주요 내용이다.​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 1801-1875)의 고집을 임칙서(林則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광동순무(廣東巡撫)와 이 일에 대해 언급할 때, 임칙서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의혹을 얘기한다: "엘리엇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출로가 없는데, 왜 마음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임칙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영이(英夷)"두목은 왜 이 두 가지 '천경지의(天經地義)'한 일에 대하여 .. 2024. 12. 23.
오교병변(吳橋兵變): 닭 한 마리가 불러온 참사, 대명과 후금의 운명을 바꾸다. 글: 약진역사(躍進歷史)​역사는 이렇게 황당할 때가 있다. 정말 사소한 일이 천군만마의 국면을 가볍게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숭정4년(1631년), 산동(山東)의 오교(吳橋)에서 닭 한마리로 인해 일어난 충돌이, 전체 정예 화포부대의 반란을 불러온다. 대명이 거액을 들여 만든 "정예화기영"이 단시간내에 등주성(登州城)을 함락시키고, 후금에 투항하여, 후금이 대명을 공격하는 핵심부대가 된다. 오늘날의 이야기에 비유하자면,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연구개발한 첨단무기가 적군에 고스란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명나라말기 요동에서는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누르하치의 후금이 굴기한 후, 대명의 전통기병과 보병은 이미 계속 패퇴하는 추세였다. 특히 살이후전투(1619년)이후, 명군의 열세는 분명하게 드.. 2024. 12. 23.
구자탈적(九子奪嫡)에 대한 또 다른 시각: 상삼기(上三旗)와 하오기(下五旗)의 다툼 글: 송안지(宋安之)​역사는 비록 불변이지만, 서로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돌아볼 수는 있고, 그렇게 하면 왕왕 다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청나라때의 구자탈적(九子奪嫡)을 예로 들면, 중국역사상 저명한 탈적지쟁(황위계승전)의 배후에는 여러가지 다른 의미가 있고, 관련되는 범위가 너무 넓다. 그중 팔기(八旗) 내부의 투쟁을 보면, 이는 기실 상삼기와 하오기의 투쟁이었고, 결국은 양패구상(兩敗俱傷)하고, 옹정제가 '어부지리'을 얻은 것이다.​소위 상삼기는 상황기(鑲黃旗),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이고, 그 의미는 천자가 직접 지휘하는 기(旗)라는 것이다. 처음에 천자가 직접 지휘하는 기는 청태조 누르하치가 직접 지휘한 양황기(兩黃旗, 정황기와 상황기)이다.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가 즉위한 후.. 2024. 12. 22.
대당후기 재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만일 당나라 289년의 역사를 나눈다면 가장 적절한 구분법은 바로 안사의 난 이전과 안사의 난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전란은 전방위적으로 당나라를 바꿔버렸다. 당나라말기의 여러 정치, 경제, 군사 내지 사회문제의 근원은 모두 이 반란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첫째, 이 반란은 개원, 천보연간의 성세의 번영을 무너뜨리고, 북방의 경제를 심각하게 파괴하였다. 인구는 대규모로 이주하여 전란의 중심이었던 중원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강회(江淮)지역으로 갔다. 전쟁시기, "경사의 쌀값은 1두(斗)에 1천까지 올랐다." 동관(潼關)에서 정주(鄭州) 사이의 "5백리에 편호(編戶)가 천여호일 뿐이었다." 그저 "소조처참(蕭條凄慘), 수유귀곡(獸遊鬼哭)"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2024. 12. 20.
"삼가분진(三家分晋)"후 진(晋)의 국군(國君)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세월유흔(歲月有痕)​중국고대역서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진(晋)나라는 중요한 제후국이었다. 일찌기 춘추시기에 초(楚)나라와 쟁패해서 패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진나라는 '삼가분진'이라는 역사사건을 거치면서 한(韓), 위(魏), 조(趙)의 삼가열경(三家列卿)이 나누어갖고, 진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난다.그렇다면, "삼가분진"후 진나라의 국군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진(晋)의 휘황과 쇠락​진나라는 주(周)의 제후국중 하나이고, 최초의 국군인 당숙우(唐叔虞)는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의 아들이고,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의 동생으로, "희성진씨(姬姓晋氏)"이다. 춘추시기 진은 초와 천하를 두고 쟁패했고, 당시 역사의 메인스트림이 된다.​.. 2024.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