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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411

서안에서 발굴된 신라질자묘(新羅質子墓) 글: 하배조(夏培朝), 위성(魏鋮)​2022년 6월, 섬서성 고고연구원은 서안시(西安市) 안탑구(雁塔區) 동강촌(東姜村)에서 당나라때 묘를 발굴했다. 출토된 묘지(墓誌)과 합쳐보면, 묘의 주인은 정원10년(794년)에 매장된 신라질자(新羅質子) 김영(金泳)이다. 당나라의 신라왕족 성원의 묘지와 와관련하여서는 이전에 대력9년(774년)의 김일성(金日晟) 묘지가 있으나, 출처가 불분명하다. 이번에 새로 출토된 김영의 묘지는 처음으로 고고발굴에서 나온 당나라때 신라인의 묘지이다. 배경정보다 명확하고, 묘지의 문장은 김영 본인 및 그의 선조에 관한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아래에서는 묘지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묘실(墓室)김영의 집안​묘지에 따르면 김.. 2025. 6. 22.
등소평 vs 화국봉: 20일간의 싸움... 글: 섭영열(葉永烈)​1978년 5월 11일​​​는 이렇게 평가한다: 1978년 5월 11일, 에 필명으로 발표된 글이 실린다. 제목은 이며, 이 문장은 등소평을 옹호하는 역량이 두번째로 내는 소리가 된다.​이 글의 작자인 호복명(胡福明)은 당시 남경대학 철학과 교수이고, 중공당원이다. 나중에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1977년 가을 그가 이 글을 발표할 때, '양개범시(兩個凡是)'에 반대한 것은 완전히 그가 스스로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만일 '양개범시'같은 교조적인 입장을 반대하지 않으면 등소평이 새로 권력을 장악할 희망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라는 글은 '양개범시'를 겨냥하여 썼다는 것이 명확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개범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때.. 2025. 6. 20.
부원지쟁(府院之爭): 단기서(段祺瑞) vs 여원홍(黎元洪) 글: 비정상역사연구실(非正常歷史硏究室)​1916년 6월 6일, 원세개(袁世凱)가 병사하고, 육군총장(陸軍總長), 단기서(段祺瑞)는 부총통(副總統) 여원홍(黎元洪)을 후임 대총통(大總統)에 추천했고, 여원홍은 그 보답으로, 단기서를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임명했다. ​여원홍은 무창의거(武昌義擧)의 원로이고, 남방혁명당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대총통에 오른 후, 즉시 국회(國會)와 을 회복시키고, "홍헌칭제(洪憲稱帝)"의 여파를 제거했다.​다른 한편, 단기서는 원세개의 후계자였고, 북양계(北洋係)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두 사람의 합작은 이 나라를 정상궤도로 되돌려놓은 것같았다. 그러나, 사실상 처음부터 여원홍과 단기서간에는 갈등이 심각했다. 갈등의 원인은 자연히 권력다툼이다.​남북의화(南北議和)이후, 원세개의 .. 2025. 6. 18.
중국고대왕조의 "해금정책(海禁政策)" 글: 역사장보각(歷史藏寶閣)​1292년, 원세조 쿠빌라이는 동남연해의 무역을 잠정적으로 정지시킨다. 이는 중국최초의 "해금정책"이다.​해금정책은 원(元), 명(明), 청(淸)의 3개 왕조에 걸쳐 700여년간 지속되었으며,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개관(開關)하면서 끝이 난다. "해금"은 관방이 민간이 개인적으로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을 가리키고, 외국인이 중국으로 와서 통상을 하는 것을 제한하는 일종의 폐관쇄국정책이다.​한(漢)나라이래, 중국은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진행했다. 당송(唐宋)시기의 대외무역은 특히 번성했고, 원나라에 이르러 처음으로 "해금"정책이 나타나고, 명, 청 양대에 걸쳐 승계된다. 이 기간동안 해금정책은 수시로 조정되었고, 어떤 때는 엄격했으며, 어떤 때는 느.. 2025. 6. 15.
한국전쟁때 중국을 선택한 21명 미군포로의 운명은...?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1953년말에서 1954년초의 겨울에 21명의 한국전쟁때 중국군대에 포로로 잡힌 미군전쟁포로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거주하기를 선택했다. 그들의 행위는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미국인들은 그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했으며, 그들의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반세기 이상 흘렀는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이들 전쟁포로는 대부분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윌슨은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집안에 아이가 8명이었고, 그가 장남이었다. 현지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혹은 현지의 제분공장에서 일했다.​그뿐 아니라, 이들 21명 중에서 대다수는 부모가 이혼한 결손가정 출신이다. 당시에는 이혼이 그다지 흔하지 않았는데, 이런 가정배경은 그들의 성격.. 2025. 6. 11.
중국역사 1,500년의 "공백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글: 배포여행하(背包旅行呀)​혹시 알고 있는가? 중국역사에 1,500년의 "공백기"가 있다는 것을. 아무런 역사기록도 없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중화오천년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중국인에 있어서,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지금까지 5천년의 중화문명은 골수에 새겨진 문화유전자이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근대이래 역사학을 연구하는 서방인들은 중국인들에게 하나의 관점을 전해주었으니, 바로 "신사시대(信史時代)"라는 것이다. 그 의미는 사료기재가 확실한 역사시대를 말한다. 사료기재가 없는 시대는 "전설시대(傳說時代)"이다. 만일 이런 견해대로라면, 중국역사에는 확실히 최소한 1,500년의 '공백기'가 있다.​중국에서 완전하고 정확한 연대기록이 있는 것은 기원전841년부터이다. 이해.. 2025.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