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지쟁(府院之爭): 단기서(段祺瑞) vs 여원홍(黎元洪)
글: 비정상역사연구실(非正常歷史硏究室)1916년 6월 6일, 원세개(袁世凱)가 병사하고, 육군총장(陸軍總長), 단기서(段祺瑞)는 부총통(副總統) 여원홍(黎元洪)을 후임 대총통(大總統)에 추천했고, 여원홍은 그 보답으로, 단기서를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임명했다. 여원홍은 무창의거(武昌義擧)의 원로이고, 남방혁명당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대총통에 오른 후, 즉시 국회(國會)와 을 회복시키고, "홍헌칭제(洪憲稱帝)"의 여파를 제거했다.다른 한편, 단기서는 원세개의 후계자였고, 북양계(北洋係)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두 사람의 합작은 이 나라를 정상궤도로 되돌려놓은 것같았다. 그러나, 사실상 처음부터 여원홍과 단기서간에는 갈등이 심각했다. 갈등의 원인은 자연히 권력다툼이다.남북의화(南北議和)이후, 원세개의 ..
2025. 6. 18.
중국고대왕조의 "해금정책(海禁政策)"
글: 역사장보각(歷史藏寶閣)1292년, 원세조 쿠빌라이는 동남연해의 무역을 잠정적으로 정지시킨다. 이는 중국최초의 "해금정책"이다.해금정책은 원(元), 명(明), 청(淸)의 3개 왕조에 걸쳐 700여년간 지속되었으며,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개관(開關)하면서 끝이 난다. "해금"은 관방이 민간이 개인적으로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을 가리키고, 외국인이 중국으로 와서 통상을 하는 것을 제한하는 일종의 폐관쇄국정책이다.한(漢)나라이래, 중국은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진행했다. 당송(唐宋)시기의 대외무역은 특히 번성했고, 원나라에 이르러 처음으로 "해금"정책이 나타나고, 명, 청 양대에 걸쳐 승계된다. 이 기간동안 해금정책은 수시로 조정되었고, 어떤 때는 엄격했으며, 어떤 때는 느..
2025. 6. 15.
중국역사 1,500년의 "공백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글: 배포여행하(背包旅行呀)혹시 알고 있는가? 중국역사에 1,500년의 "공백기"가 있다는 것을. 아무런 역사기록도 없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중화오천년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중국인에 있어서,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지금까지 5천년의 중화문명은 골수에 새겨진 문화유전자이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근대이래 역사학을 연구하는 서방인들은 중국인들에게 하나의 관점을 전해주었으니, 바로 "신사시대(信史時代)"라는 것이다. 그 의미는 사료기재가 확실한 역사시대를 말한다. 사료기재가 없는 시대는 "전설시대(傳說時代)"이다. 만일 이런 견해대로라면, 중국역사에는 확실히 최소한 1,500년의 '공백기'가 있다.중국에서 완전하고 정확한 연대기록이 있는 것은 기원전841년부터이다. 이해..
2025.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