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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소기)

모택동(毛澤東)과 유소기(劉少奇)가 내부투쟁을 벌인 진정한 원인은...?

by 중은우시 2023. 10. 17.

글: 무덕산(武德山)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글에서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갈등에 관하여 대부분 "사청(四淸)"운동때의 "심각한 의견차이"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이데올로기 층면에서 고도로 일치했고, 모택동이 유소기를 비판한 관점과 방법은 기실 모두 모택동의 인가를 받아 대거 제창한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택동이 유소기와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때문이 아니라, 유소기에 대한 불만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택동은 유소기에 대한불만때문에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간의 갈등은 더욱 실질적인 원인이 있다....

 

모택동 71세생일때의 식사자리

 

12월 26일, 모택동의 71세 생일이었다. 그날 저녁 모택동은 인민대회당 노북경청(老北京廳)에서 일부 사람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 참석자 명단은 모택동이 직접 정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은 일부 중앙지도자, 각 지방의 주요책임자 그리고 소수의 부장(장관), 노동모범, 과학자였다. 모택동은 몇몇의 과학자와 노동모범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나머지 상위와 정치국위원들은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임표(林彪)는 원래 중앙공작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번 모택동의 생일연회에는 그도 초청을 받았다.

 

모택동은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은 공식행사도 아니고, 생일축하자리도 아니다. 내가 원고료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식사를 내는 것이다. '사동(四同, 同心同行同力同嬴)'을 실현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밥만 먹을 것이 아니라, 말도 하자! 어떤 사람은 하나를 찾아내면 바로 기고만장한다. 이건 좋지 않다. 어떤 걸 찾아내더라고 기고만장하지 말고, 두개 세개를 찾아내더라도 기고만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리고나서 전국노동모범 진영귀(陳永貴), 고향으로 돌아간 지식청년대표인 형연자(邢燕子), 동가근(董加勤)등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본다. 그후에 다시 말을 잇는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멍청해진다." 그후에 사회교육운동중의 일부 인식과 방식을 비판한다. "무슨 사청(四淸), 불사청(不四淸)이니 무슨 당내모순교차이니 이런 건 비사회주의적인 것이다." 모택동은 중앙의 어떤 기관은 "독립왕국"을 꾀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당내에 수정주의의 위험이 나타나고 있다고도 말한다.

 

연회에 참석했던 박일파(薄一波)는 이렇게 회고했다: "좌중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받아 발언하지 않았다. 오직 진백달(陳伯達)이 다음 날 "전국공작회의"에서 발언하며 모택동의 유소기에 대한 공격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모택동은 그날 밤 진백달을 자택으로 불러서 밀담을 나눈다. 유소기를 처리해야겠다고 말한다. 진백달이 가장 먼저 모택동의 의도를 알아낸 사람이다.

 

1964년 12월 27일 <임표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심상치가 않다. 나와 백달, 강생(康生)은 모택동 생일에 손님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파낭(婆娘, 남의 부인을 뜻하는 말로 임표가 강청을 지칭하는 말임)도 있었다. 모택동은 백사액(白沙液, 호남제일주)을 한병 마신 후, 이리저리 오가면서 물었다: "중앙에 누군가 권력을 빼앗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정주의를 하고자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다시 물었다: "군대는 수정주의를 따라가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중앙정치국, 국무원, 중앙서기처에 모두 나 모택동을 배척하는 자들이 있다. 나는 아직 당의 주석, 군위주석이다. 나를 핍박하여 반기를 들게 하면, 나로서는 천지를 뒤집어 엎을 수밖에 없다. 오늘 모택동이 전화를 걸어와 분부했다: "어제 내 생일에 마음이 편해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고, 한마디 내뱉은 것이니 신경쓰지 말라."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 내 생각에 모택동이 다음 단계로 북경시위부터, 계획위원회부터, 중앙판공실부터, 문화부부터 손을 댈 것같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너를 쓰러뜨릴 수 있다."

 

12월 27일 오후, 모택동은 인민대회당 하북청(河北廳)에서 중앙공작전체회의를 주재하며, <농촌사회주의교육운동중 현재 제출된 몇가지 문제>에 관해서 토론한다. 진백달은 문건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덧붙인다. 진백달이 국민당에도 당내외모순이 교차했다는 말을 하자, 모택동이 끼어들어 말했다. 우리 당에도 최소한 두 개의 파가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파,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파. 동필무(董必武)가 발언한다. 문건에는 현이상 간부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보직전환해주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다. 그러자 모택동이 말한다. 현재 15년이 되었으니, 독립왕국이 되었다. 북경에 내가 얘기하는 건 북경시위가 아니다. 두 개의 독립왕국이 있다. 너희들이 추측해봐라. 내가 말하진 않겠다. 육정일(陸定一)이 발언하며, 문화혁명문제를 얘기한다. 그러자 모택동이 말한다: 문화부는 모조리 엉망진창이다. 전체 기관이 자산계급과 봉건계급의 연합독재이다. 그리고 부장과 몇몇 부부장의 이름을 직접 거명한다.

 

12월 28일 오후, 중앙공작회의가 계속 진행된다. 모택동은 회의를 주재하며 2권의 책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한권은 <당장(黨章)>이고, 다른 한권은 <헌법(憲法)>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농촌사회주의교육운동에서 현재 제출된 몇가지문제>의 첫번째 이슈인 '운동성격'을 토론했다. 이건 이번 회의에서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논쟁촛점이다. 참석자들은 의견을 발표했고, 마지막에 모택동이 말한다. 만일 여러분들에게 더 이상 다른 의견이 없으면 내가 몇마디 하겠다. "여러분들은 돌아가서 당장, 헌법 3장 제87조를 한번 살펴봐라." "나는 당원이고, 나는 공민이다. 당신들(그는 등소평과 유소기를 가리키며 말했다)중 한명은 나를 당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여, 당장에 위반했고, 다른 한명은 내가 발언하지 못하게 막아서 헌법을 위반했다." 이번에는 주로 모택동이 말했고, 유소기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말은 아주 날카로웠다. 비록 유소기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참석자들은 모두 그의 칼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소기는 모택동의 감정이 격앙된 틈을 타서, 그와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주석을 선거하는 일을 상의했다. 모택동은 미리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거절하기 곤란하여, 동의해주게 된다. 조금 지나서, 모택동의 깨닫고는 분노하여 소리친다: "지금 자리를 내놓으라고. 네가 주석을 하겠다고."

 

1965년 1월 3일, 유소기가 국가주석에 당선된다. 전국상하에서 경축활동을 벌이고, 행진인원들이 오색깃발을 휘날리고, 사자춤을 추고, 폭죽을 터트렸다. 그리고 모택동과 유소기의 화상을 나란히 들었다. 신문에도 크게 "모주석, 유주석은 모두 우리들이 가장 떠받드는 지도자들이다"라고 보도한다. 중앙고위층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암중으로 유소기가 기근을 막을 수 있도록 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칭찬하고, 모주석과 가까운 사람들도 유소기는 능력있고, 수완이 있다고 생각하며 유소기에 다가가고 모택동과 소원해졌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건의했다. 유소기가 당선될 때 천ㅇ안문성루에 유소기의 화상을 걸고 모택동의 화상을 끌어내리자고. 유소기는 바로 그 건의를 거부한다.

 

유소기가 당선되었을 때, 왕광미(王光美)는 인민대회당 "118"실로 불려간다. 모택동은 왕광미의 면전에서 유소기를 한바탕 욕하고,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이 말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유소기와 왕광미는 그 자리에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서, 모택동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중공고위층중에서 아무도 모택동을 따라 유소기를 비판하지 않았다. 실제로 유소기를 동정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중앙공작회의기간, 주덕(朱德), 하룡(賀龍)등은 유소기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에게 대국을 고려해서 조심하고 모택동을 존중하라고 말한다. 회의가 끝난 후, 유소기는 모택동을 찾아가서 '자아비판'을 한다.

 

1월 13일 오후 3시반, 유소기는 당내생활반을 소집한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중공정치국의 일부 상위, 정치국위원, 각 중앙국 제1서기, 주은래, 등소평등 17명이었다. 유소기는 그 자리에서 반성하는 말을 한다. 회의에 참석한 왕임중(王任重)은 그날의 일기에 "잊기 힘든 하루"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썼다: "이런 일은 전세계 공산당 역사에서 모두 보기 드문 일이다."

 

모택동은 유소기의 반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건 존중 부존중의 문제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문제이다. 스탈린이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새끼손가락만 까닥해도 세상에 트로츠키는 없어질 것이다. 모택동은 스탈린의 말투를 빌어 유소기에게 말했다: 네가 뭐 대단한게 있느냐. 내가 새끼손가락만 까닥해도 너는 쓰러뜨릴 수 있다."

 

몇몇 연장자들도 나서서 유소기를 비호해주지 못하고, 그저 나서서 말릴 뿐이었다. 유소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표면적으로 모주석을 공경하는 말을 했다.

 

"중앙에 두 개의 독립왕국이 있다."

 

농촌교육운동을 전개할 때, 국민경제분야에서 모택동은 유소기에 대한 권력탈취투쟁을 벌인다. 1964년 6월, 중앙공작회의를 소집하여, 모택동은 이부춘(李富春)이 주임으로 있는 국가계위가 제출한 "대거 농업을 발전시키고, 기본적으로 인민들의 먹고, 입고, 쓰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3차5개년계획"을 반대한다. "이건 소련을 따라하는 것이고, 중국실제상황에 부합하지 않아서 통하지 않는다." 그는 소련이 병력을 중국몽골국경에 배치하고, 전략미사일을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3차5개년계획"은 마땅히 국방공업발전을 중점으로 해야 하며, 반지화(攀枝花) 3선건설을 대거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진백달을 국가계위에 보내어 조사하게 하며, 소계획위윈회를 만들고, 여추리(余秋里)를 소계획위원회의 주임, 당조서기를 맡게 하여, 이부춘을 대체했다.

 

모택동은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단지 모택동에 반대하는 것이지, 중공에 반대하지는 않고, 중국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출병하여 중국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부춘이 제출한 '3차5개년계획'에 반대한 것은 유소기를 겨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3차5개년계획"은 유소기가 지지하고 비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지화3선건설로 "먹고, 입고, 쓰는" '3차5개년계획'을 대체하도록 하는 것도 유소기를 겨냥한 것이다. 나중에 이 프로젝트는 돈을 많이 써서, 적지 않은 사회의 비난을 받게 된다. 문화대혁명이 개시된 후, 유소기는 '주변으로 밀려난다.' 반지화3선건설도 흐지부지되고 만다.

 

모택동은 중앙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앙에는 두 개의 독립왕국이 있다." 중앙서기처와 국가계위이다. 그가 말한 독립왕국은 그가 지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소기가 지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군중들에게 그를 타도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명확히 지시한다: 이후 계획위원회 업무는 당신이 직접 지도하고, 당중앙의 나에게 보고하라. 이렇게 하여, 국민경제분야의 지도권을 유소기의 수중에서 빼앗아 오게 된다.

 

모택동은 임표로 하여금 군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하고, 유소기가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1964년 여름부터, 이데올로기분야에서 철학, 경제학, 역사학의 여러 방면에서 중공은 문화전선의 대규모의 비판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철학은 양헌진(楊獻珍)의 "합이위일(合二爲一)"을 대표로 하고, 경제학은 손치방(孫治方)의 "생산가격론(生産價格論)", "기업이윤론(企業利潤論)"을 대표로 하고, 역사학은 전백찬(翦伯贊)의 "역사주의"와 "진보정책론" 사학관을 대표로 한다. 그들의 학술견해를 정치투쟁과 연결시켜, 수정주의라는 모자를 씌운다. <광명일보>, <홍기>잡지등 신문간행물에 연속으로 비판글을 발표하며 정치적 토벌을 시작한다. 순식간에 문화분야에서 큰 파란이 일어나게 된다.

 

1965년 2월말, 모택동은 북경을 떠난다. 4월에 무한에 도착한다. 4월 22일, 모택동은 임표를 불러 단독으로 밀담을 진행하낟. 그는 유소기의 기반을 타도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는 임표에게 군대를 확실히 장악하여, 유소기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1962년이후, 특히 1964년에서 1965년까지, 임표는 군대내에서 "모택동사상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모택동을 대거 선전한다. 그리고 <모택동어록>을 출간하고, "모택동사상을 배우고 활용하는 적극분자대회"를 개최하며 모택동을 신단으로 끌어올린다.

 

결론

 

중공당내에서 "모택동사상"을 제출하고 "모택동사상"을 극력 선전한 사람은 바로 유소기이다. 그가 모택동을 "신단"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중공고위층핵심들은 모택동의 오른팔 왼팔로 된다. 유소기와 모택동의 갈등은 표면적인 "무산계급혁명노선"과 "자산계급반동노선"의 대립이 아니다. 그 실질은 바로 모택동이 이전에 자신의 믿을만한 조수라고 생각했던 유소기가 자신의 권위에 크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