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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105

황하(黃河) vs 이수(伊水): 대우치수(大禹治水)는 어느 강일까? 글: 지도제(地道帝) 비록 이미 4천여년이 흘렀지만, 고대 중화대지의 대홍수는 지금까지도 후손들 사이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대대손손 구술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신화가 되었다. 황당무계한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공주(共主)"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비록 하(夏)왕조의 창시자가 우인지 계(啓)인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남아 있지만, 요순우(堯舜禹)가 번갈아가면서 우두머리가 되었던 선양제(禪讓制)에서 부사자계(父死子繼)의 방식으로 바뀐 것은 우와 계 부자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우의 권위는 치수에서 왔는데, 다만 그가 도대체 어느 강을 다스렸던가? 어떤 방식으로 다스렸던가? 이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우가 치.. 2023. 5. 24.
열국(夨國): 서북에 존재했던 수수께끼의 국가 글: 소연부독서(召燕不讀書)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 솔토지빈(率土之濱), 막비왕신(莫非王臣)"(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 위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서주(西周)시대를 개괄한 말 중에서 가장 적절한 말이다. 그 의미는 주왕조의 통치범위내에 모든 사람은 주나라천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칭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치대로라면 일반적으로 다른 어느 사람도 '왕'이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그랬을까?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에는 서주의 도성에서 1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왕(夨王)"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동기(銅器)가 나왔다. 이는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럼 서주시기에 감히 '왕'을 칭할 담량을 .. 2023. 5. 22.
<조씨고아(趙氏孤兒)>이야기에 대한 고증과 역사복원 글: 사량소(史良昭) 는 경극(京劇)에서는 라고 부른다(고아를 찾아서 고아를 구한다는 의미임). 이 명칭은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보에 쌓인 사내아이가 아니라, 조씨와 아무런 현련관계도 없지만, 전력을 다해서 '고아를 구해준'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인생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려 올바른 일을 행하다)하고 한명은 인욕부중(忍辱負重, 치욕을 참고 견디다)했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나아갔고,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으며, 죽음을 전혀 겁내지 않았고, 고난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중에서 집착 이외의 모든 약점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결론을 내렸다.. 2023. 5. 14.
"대읍상(大邑商)": 은허(殷墟)도성역사의 비밀을 푼다. 글: 하육령(何毓靈) (광명일보 2023년 4월 9일자게재) 고고학은 고대 유적지의 구조와 배치를 연구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한다. 적게는 우물, 집터부터 크게는 묘지, 작방(作坊)등등 모두 유적지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들이다. 모든 고고학자들은 모든 요소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왕왕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현하기 어렵다. 만일 시간과 공간적인 요소까지 고려한다면, 유적지의 발굴과 연구는 더욱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많은 대형 도성유적지는 거의 몇대의 고고학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연구하여, 비로소 풍성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도 연이어 나타난다. 갑골문(甲骨文)의 고향, 상나라말기의 도성(都城)인 은허(殷墟)는 더욱 그러하다. 은허의 갑골문에는 ".. 2023. 4. 12.
상(商)나라는 왜 빈번하게 천도(遷都)하였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탕(湯)이 걸(桀)의 폭정을 없애고 팔방을 평정하고, 박읍(亳邑)을 수도로 삼아 상(商)을 세운다" 중국고대의 두번째 왕조로서 상나라는 중국역사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 당연히 상나라이전에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가 있다. 하나라는 중국최초의 세습제 왕조였다. 그러나, 기원전1600년 상탕(商湯)이 이끄는 상부락이 하왕조를 멸망시키고 상왕조를 건립하게 된다. 그러나, 하왕조가 이미 멸망하였는데도 상나라는 계속하여 빈번하게 도성을 옮겼다. 어떤 사람은 상나라가 이렇게 자주 도성을 옮긴 것은 홍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견해는 금방 무너졌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상왕조가 피하려 한 것은 홍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왕조는 도대체 왜 그렇게 .. 2023. 3. 24.
신비한 하(夏)나라: 공갑(孔甲)이 키웠다는 용(龍)은 어떤 동물일까? 글: 문사적의림(文史的意林) 공갑(孔甲)은 하왕조의 제14대 국군이다. 하나라역사에서 비교적 극적인 군주중 한명이다. 그런 극적인 장면은 그가 대통을 승계하는 것과 평생에서 모두 엿볼 수 있다. 원래 그의 부친 불강(不降)이 죽은 후 그가 왕위를 계승했어야 하나, 그의 부친은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경(扃)에게 넘겨준다. 즉 공갑의 숙부이다. 공갑의 숙부 경이 죽은 후, 경의 아들 근(厪)이 다시 왕위를 넘겨받는다. 정상적인 논리대로라면, 이 왕위는 공갑과 갈수록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다. 근이 즉위한지 몇년이 지나, 화하대지는 연이어 큰가뭄이 들고, 논밭은 말라간다. 백성들중 병사, 아사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천재지변에 대하여, 하나라의 신하들은 이것.. 2023. 1. 31.
"공화행정(共和行政)": 사마천의 <사기> 기록은 믿을 수 있을까?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기원전841년, 서주(西周) 공화원년(共和元年)은 중국에서 확실한 연호의 시작이다. 이 해를 전후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공화"라는 중요한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 전에, 주여왕(周厲王)은 포악한 행정으로 백성에 의해 축출되어 "체(彘)"로 도망친다. 주여왕이 도망친 후, 태자는 나이가 어렸고, 조정에는 14년에 걸쳐 국군이 없는 국면이 나타난다. 그동안 대신들이 공동으로 행정을 하며, 정치질서의 안정을 유지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공화행정"이다. 다만 이렇게 유명한 사건에 대하여 크게 충돌되는 사서의 기록이 있어, 의문점 투성이가 되었고, 천년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1. 공화행정의 3가지 버전 오늘날 우리가 "공화행정"을 알게 된 것은 주로 두 권의 대표적인 사서때문이다. .. 2023. 1. 19.
춘추양대기보(春秋兩大奇寶)중 하나인 수후지주(隨侯之珠)에 관한 문헌기록들...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춘추전국시대의 수(隨)나라에는 진귀한 보물이 하나 있었는데, "수후지주(隨侯之珠)"라 불렸다. 이것은 "화씨지벽(和氏之璧)과 더불어 춘추양대기보라 불렸다. 이 양대기보는 춘추전국시기에 여러번 언급된다. 예를 들어, '변화보박(卞和報璞)", "완벽귀조(完璧歸趙)"등의 고사이다. 그러나, 최초의 봉건왕조인 진나라가 멸망한 후, "수후지주"와 "화씨지벽"은 모두 사라진다. 이건 무슨 이유때문일까? 역사상 "수후지주"에 관한 문헌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수후지주를 가지고 천길 절벽에 있는 참새를 쏘는데 쓴다면 세상사람들은 반드시 비웃을 것이다. 왜 그런가? 중한 것을 써서 경한 것을 얻가 때문이다." 그 뜻은 중대한 것을 버려서 경미한.. 2022. 12. 29.
전국칠웅중 초(楚)나라가 대국(大國)이지만 강국(强國)은 아니었던 이유는? 글: 지식화화(知識火花) 고등학교때, 선생님은 우리에게 전국칠웅을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했다: 진나라가 가장 강하고, 제나라가 가장 부유하고, 초나라가 가장 크다. 만일 면적만으로 보자면, 초나라는 확실히 전국칠웅중 가장 큰 나라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초나라의 국토면적은 150평방킬로미터에 달하고, 인구는 500여만에 이르렀다. 진나라가 최전성기때의 면적은 340만평방킬로미터에, 인구 2천만이다. 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킬 때, 초나라의 영토면적은 진나라보다 작지 않았다. 전국시대 중기, 초나라의 면적은 진나라보다 훨씬 넓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초나라는 전국시대의 각국들 중에서 영토면적인 가장 넓은 제후국이었다. 초나라는 영토면적이 광대했을 뿐아니라, 인구도.. 2022. 9. 2.
중산국(中山國):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존재였을까? 글: 소중옥(笑中屋) 춘추전국시대에 전국칠웅외에 또 하나의 제후국이 특수한 역사를 남겼다: 중산국. 중산국은 존재기간이 길지는 않다. 존속기간동안 중산국은 화하문화에 융합하고자 노력했다. 비록 전국칠웅의 시대에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위(魏), 조(趙)등의 나라에 골치거리였고, 여러번 곤란을 겪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중산국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중산국은 기원전507년에 건립되며, 중산무공(中山武公)이 건립했으며, 최초로 중원문화를 대거 흡수한 융적제후국(戎狄)제후국이다. 그리고 중산국 내부에서는 계속 이런 인식이 있었다: 그들은 주왕실(周王室)의 한 갈래이다. 심지어 국성(國姓)도 주왕실과 같은 희(姬)성이었다. 영지도 중원에 위치하여, 조, 위, 제(齊)와 연결되어 있다. 당연히 또 다른 .. 2022.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