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109

삼성퇴문명(三星堆文明): 너무나 신비한......

글: 노장건강론(老張健康論)​서론​과거 20년간 중국의 고고발굴팀은 삼성퇴문화유적지에 대한 장기간의 개발을 진행했다.그러나, 현재 보면, 개발의 추진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같다.이는 주로 삼성퇴유적지를 발굴했을 때, 너무나 전문가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어떤 것들은 지금까지도 명확히 해석하기가 어렵다.어떤 사람은 중국사학계에서 삼성퇴문명에 대해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궤이한 것들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심지어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삼성퇴문명과 중원문명간에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판단하기 어렵다.그렇다면, 삼성퇴문명의 신비한 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삼성퇴문명은 아주 특이하다.역사학자에 있어서, 삼성퇴문명에 대하여 도대체 어..

비참했던 동주"(東周)": 삼주병존(三周幷存)에서 이주분치(二周分治)까지...

글: 조작적초광인(造作的楚狂人)​기원전770년, 주유왕(周幽王)이 신국(申國)과 견융(犬戎)의 협공하에, 여산(驪山)에서 사망한다. 제후들은 태자 의구(宜臼)를 주평왕(周平王)으로 세우고, 낙읍(洛邑)으로 천도한다.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평왕지시(平王之時), 주실쇠미(周室衰微), 제후강병약(諸侯强幷弱), 제(齊), 초(楚), 진(秦), 진시대(晋始大), 정유방백(政由方伯)"주평왕때, 주의 왕실이 쇠약해진다. 제후들은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고, 제, 초, 진, 진의 세력이 커지고, 정치권력은 이들이 차지한다.​이 때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동주(東周)"시대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周)"는 오직 하나이다. 동, 서의 구분은 없었다. 동주(東周), 서주(西周)는 단지 ..

대우전위(大禹傳位): 익(益)과 계(啓)의 왕위계승다툼

작자: 미상​대우(大禹)의 왕위승계에 대하여 기록에 따르면, 대우의 아들인 사계(姒啓)의 승계는 선양제(禪讓制)를 타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 과연 어떤 권력투쟁이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대우가 사계에게 왕위를 승계시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대우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일찌감치 죽어버린 고요(皋陶)외에 치수에 공이 있는 익(益)이 있었다. 사계와 익의 관계에 관하여는 3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익계읍양(益啓揖讓)"설.​ , 등 문헌이 대표적이다. 대우는 영명한 지도자라고 주장하면서, 계와 익은 모두 대현(大賢)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양제가 폐지된 것은 대세의 흐름이고 사람이 이를 되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선양이 요순(堯舜)때는 합리적..

이궐전투(伊闕之戰): 전국시대의 분수령, 전신(戰神) 백기(白起)의 등장.

글: 서북낭(西北狼)​기원전293년, 진(秦), 한(韓), 위(魏) 3국간에 분수령적 의미가 있는 전투가 발생한다. 바로 이궐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백기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24만의 한,위 연합군을 섬멸한다. 한, 위 양국은 이후 도마위에 놓은 고기처럼 진나라에 유린당한다. 이 전투를 복기해보기로 한다.​이궐전투전의 국제형세​기원전307년, 진무왕(秦武王)이 무거운 것을 들다가 죽은 후, 진나라 국왕의 자리는 그의 동부이모의 친동생 진소양왕(秦昭襄王) 영직(嬴稷)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진소양왕의 즉위초기, 진나라는 상앙변법이래 국운이 쇠락한 시기였다. 영직이 즉위한 초기, 국내의 여러 공자들은 그에게 불복했고, 3년에 걸친 계군(季君)의 난이 발생한다. ​반란을 평정한 ..

황하(黃河) vs 이수(伊水): 대우치수(大禹治水)는 어느 강일까?

글: 지도제(地道帝) 비록 이미 4천여년이 흘렀지만, 고대 중화대지의 대홍수는 지금까지도 후손들 사이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대대손손 구술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신화가 되었다. 황당무계한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공주(共主)"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비록 하(夏)왕조의 창시자가 우인지 계(啓)인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남아 있지만, 요순우(堯舜禹)가 번갈아가면서 우두머리가 되었던 선양제(禪讓制)에서 부사자계(父死子繼)의 방식으로 바뀐 것은 우와 계 부자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우의 권위는 치수에서 왔는데, 다만 그가 도대체 어느 강을 다스렸던가? 어떤 방식으로 다스렸던가? 이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우가 치..

열국(夨國): 서북에 존재했던 수수께끼의 국가

글: 소연부독서(召燕不讀書)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 솔토지빈(率土之濱), 막비왕신(莫非王臣)"(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 위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서주(西周)시대를 개괄한 말 중에서 가장 적절한 말이다. 그 의미는 주왕조의 통치범위내에 모든 사람은 주나라천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칭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치대로라면 일반적으로 다른 어느 사람도 '왕'이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그랬을까?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에는 서주의 도성에서 1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왕(夨王)"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동기(銅器)가 나왔다. 이는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럼 서주시기에 감히 '왕'을 칭할 담량을 ..

<조씨고아(趙氏孤兒)>이야기에 대한 고증과 역사복원

글: 사량소(史良昭) 는 경극(京劇)에서는 라고 부른다(고아를 찾아서 고아를 구한다는 의미임). 이 명칭은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보에 쌓인 사내아이가 아니라, 조씨와 아무런 현련관계도 없지만, 전력을 다해서 '고아를 구해준'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인생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려 올바른 일을 행하다)하고 한명은 인욕부중(忍辱負重, 치욕을 참고 견디다)했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나아갔고,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으며, 죽음을 전혀 겁내지 않았고, 고난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중에서 집착 이외의 모든 약점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결론을 내렸다..

"대읍상(大邑商)": 은허(殷墟)도성역사의 비밀을 푼다.

글: 하육령(何毓靈) (광명일보 2023년 4월 9일자게재) 고고학은 고대 유적지의 구조와 배치를 연구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한다. 적게는 우물, 집터부터 크게는 묘지, 작방(作坊)등등 모두 유적지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들이다. 모든 고고학자들은 모든 요소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왕왕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현하기 어렵다. 만일 시간과 공간적인 요소까지 고려한다면, 유적지의 발굴과 연구는 더욱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많은 대형 도성유적지는 거의 몇대의 고고학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연구하여, 비로소 풍성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도 연이어 나타난다. 갑골문(甲骨文)의 고향, 상나라말기의 도성(都城)인 은허(殷墟)는 더욱 그러하다. 은허의 갑골문에는 "..

상(商)나라는 왜 빈번하게 천도(遷都)하였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탕(湯)이 걸(桀)의 폭정을 없애고 팔방을 평정하고, 박읍(亳邑)을 수도로 삼아 상(商)을 세운다" 중국고대의 두번째 왕조로서 상나라는 중국역사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 당연히 상나라이전에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가 있다. 하나라는 중국최초의 세습제 왕조였다. 그러나, 기원전1600년 상탕(商湯)이 이끄는 상부락이 하왕조를 멸망시키고 상왕조를 건립하게 된다. 그러나, 하왕조가 이미 멸망하였는데도 상나라는 계속하여 빈번하게 도성을 옮겼다. 어떤 사람은 상나라가 이렇게 자주 도성을 옮긴 것은 홍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견해는 금방 무너졌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상왕조가 피하려 한 것은 홍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왕조는 도대체 왜 그렇게 ..

신비한 하(夏)나라: 공갑(孔甲)이 키웠다는 용(龍)은 어떤 동물일까?

글: 문사적의림(文史的意林) 공갑(孔甲)은 하왕조의 제14대 국군이다. 하나라역사에서 비교적 극적인 군주중 한명이다. 그런 극적인 장면은 그가 대통을 승계하는 것과 평생에서 모두 엿볼 수 있다. 원래 그의 부친 불강(不降)이 죽은 후 그가 왕위를 계승했어야 하나, 그의 부친은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경(扃)에게 넘겨준다. 즉 공갑의 숙부이다. 공갑의 숙부 경이 죽은 후, 경의 아들 근(厪)이 다시 왕위를 넘겨받는다. 정상적인 논리대로라면, 이 왕위는 공갑과 갈수록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다. 근이 즉위한지 몇년이 지나, 화하대지는 연이어 큰가뭄이 들고, 논밭은 말라간다. 백성들중 병사, 아사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천재지변에 대하여, 하나라의 신하들은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