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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75

제환공(齊桓公): 살아서는 웅패천하(雄覇天下), 죽어서는 무인수시(無人收屍) 글: 중국국가역사(中國國家歷史)​1​주(周)가 상(商)을 멸한 후, 주무왕(周武王)은 강태공 강상(姜尙)을 영구(營丘)에 봉하니, 제(齊)나라이다.​강태공이 죽은 후, 14대를 내려오니 제양공(齊襄公)이다.​제양공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당형(堂兄)인 공손무지(公孫无知)와 왕위쟁탈전을 벌인다. 즉위후에는 보복조치로 공손무지의 봉록(俸祿)과 거마(車馬)의 등급을 낮추어버리고, 꼼짝 못하게 만든다.​제양공4년, 노환공(魯桓公)이 부인을 데리고 제나라를 방문한다. 노부인은 제양공의 누나이고, 일찌기 시집가기 전에 제양공과 사통한 바 있다.​모국에 돌아오니, 두 사람간의 옛날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노환공이 발견하고, 크게 화를 내며 노부인을 욕한다.​노부인은 울면서 동생 제양공에게 호소한.. 2025. 1. 17.
한착(寒浞): 16세에 상국이 되고, 20세에 왕위를 찬탈하고, 60년간 화하를 통치했으나, 역사에서 말소되다... 글: 소왕설역사(小王說歷史)​하(夏)나라의 역사에서 한착(寒浞)이라는 이름은 아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눈길을 끈다. 16살때, 한착은 상국으로 발탁된다; 겨우 4년이 지난 후에 그는 음모를 통해 왕위를 찬탈하여 화하를 통치하는 국왕이 된다. 그리고 정권을 60년간 장악한다. 그의 폭정, 음모, 도살은 역사서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결국 그는 주류의 제왕명단에서 말소된다. 한착은 어떻게 집에서 쫓겨난 소년에서 야심만만한 찬탈자가 되었을까? 그근 왜 그렇게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역사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을까? 이들 문제는 무수한 역사애호가들의 흥미를 끄는 이슈이고 깊이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한착의 어린 시절: 쫓겨난 소년​한착의 어린 시절은 동탕과 폭력으.. 2024. 11. 22.
양각애(羊角哀)와 좌백도(左伯桃): 결의형제(結義兄弟)이야기의 원조 글: 자귤(紫橘)​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를 배울지언정, 와강일주향(瓦崗一炷香)은 배우지 말라.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를 맺은 후,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는 형제가 된다. 그들이 결의를 맺은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칭송받고 있다. 이후 형제결배(結拜)이건 아니면 흑방결배이건 모두 도원결의의 여파라 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유관장의 도원결의 이야기는 명(明)나라때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명나라이전에 형제간의 결의를 맺을 때는 양각애와 좌백도를 따랐다. 이 두 사람 간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별로 유명하지 않은 형제정의​양각애, 좌백도의 이야기는 정사(正史)에 실려 있지 않다. 두 사람의 이야기의 출처는 서한시대 유향(劉向)의 이다. 아쉽게도 원문은 송나라때 이미 유실되었고, 오늘날 볼.. 2024. 11. 13.
상탕(商湯)은 기우제를 지낼 때 왜 분신해야 했을까? 글: 마라(摩羅)​고대의 중국에서 백성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 비를 내려달라고 하는 것은 무사(巫師)의 주요직책중 하나였다. 만일 그가 오랫동안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으면, 그는 반드시 직접 하늘로 올라가서 하느님과 교섭해야 했다. 즉, 그는 스스로를 기우제의식의 제물로 바쳐,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 제사지내는 것이다. 하상주(夏商周) 삼대 및 그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모두 조정 혹은 부락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무사(혹은 국왕)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 하늘로 올라갔다. 춘추이후에는 점점 제물로 바치는 자를 지위가 비교적 낮은 무사 혹은 장애인으로 바꾸게 된다.​상탕(商湯)의 집권초기, 중원지구에는 5년간 연속하여 큰 가뭄이 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상탕이 하(夏)족을 무너뜨리고 천하에 사람을.. 2024. 11. 1.
이윤(伊尹)의 수수께끼: 상왕태갑(商王太甲)을 쫓아낸 후 스스로 다시 권력을 돌려주었을까? 글: 자귤(紫橘)​고대 권신(權臣)의 찬위탈권(纂位奪權)을 얘기하면 모두 상(商)나라때의 이윤(伊尹), 한(漢)나라때의 곽광(霍光)을 떠올린다.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군왕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윤, 곽광은 군왕의 권력을 침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곽광의 사적은 비교적 구체적이나, 이윤의 사적은 비교적 모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윤이 현신(賢臣)이라 여기고, 탕(湯)을 보좌하여 천하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윤은 권신이다. 직접 상왕태갑을 쫓아냈다. 이런 권신의 최후가 좋을 수 있을까?​1 이씨부락(伊氏部落)​오늘 얘기할 상나라때의 저명한 대신 이윤은 사마천이 에서 "이윤의 이름은 아형(阿衡)이다"라고 하였다. 에서는 "이름이 지(摯)이다"라고 하였다. 한나라때의.. 2024. 9. 26.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군왕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신하가 임신한 소첩을 바치다. 글: 역사대미감(歷史大微鑒)​옛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 이를 보면, 옛사람들은 가족혈맥의 전승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백성도 마찬가지이니, 왕실은 더욱 신경썼다. 황제가 만일 생육능력이 없다면, 이는 단순히 효 불효의 문제가 아니라, 황위를 노리는 자들이 기회를 노릴 수 있어, 통치지위에 위기가 미치고, 국가가 동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종접대(傳宗接代)'는 황제의 가장 중요한 직책중 하나가 된다.​역사상 후사를 두지 못한 군주는 많다. 한소제 유불릉, 한애제 유흔, 명무종 주후조, 광서제 재첨, 선통제 부의가 모두 일국지군으로 후사를 두지 못한 경우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기에 한 초나라.. 2024.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