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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사(二十四史)>중 왜 뒤의 20사는 유명하지 않을까? 글: 하목역사군(夏目历史君) ​ 정사(正史)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마도 모두 공인된 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를 묻는다면 완벽하게 답안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언급하는 것은 개략 혹은 일 것이다. ​ 이 4사는 중에서 "전사사(前四史)"라고 불린다. 모두 개인적으로 편찬한 사서이다. 이런 상황은 기이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모든 시기의 역사는 다 중요한데, 왜 이후의 사서들은 이들 전사서에 비하여 명성이 높지 못한 것일까? ​ 와 의 큰 차이점 ​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얘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처음에 는 ""로 불렸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 , 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는 점차 유실되고, 는 로 .. 2024. 4. 18.
주은래(周恩来)의 세 명의 양녀 작자: 미상 ​ 주은래의 큰조카딸이자 전국정협위원을 역임한 주병덕(周秉德)이 쓴 의 157페이지를 보면 등영초(邓颖超)가 문혁기간 손유세(孙维世)가 박해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주병덕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병덕아, 너는 알고 있느냐? 우리의 양녀가 되면 모두 팔자가 사납구나. 사람들은 나와 백부가 양자가 몇명이고 양녀가 몇명이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일은 없다. 사실 우리가 진정 받아들인 것은 3명의 양녀뿐이다. 한명은 섭정(叶挺)장군의 큰딸 섭양미(叶扬眉)인데, 어린 나이에 부친과 비행기사고로 죽어버렸다. 하나는 연안에 있을 때 큰 비가 내려서 요동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서 깔려 죽어버렸다. 오직 손유세만이 우리와 오랜 시간을 같이 하면서 서로 감정이 깊었는데, 지금 다시 참혹하게 .. 2024. 4. 18.
동한(东汉)의 삼대집단(三大集团): 동한말기에 왜 보이지 않을까? 글: 심근배조(寻根拜祖) ​ 동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刘秀)의 뒤에 있는 삼대집단은 바로 하남집단(河南集团), 하북집단(河北集团), 하서집단(河西集团)이다. "하남집단"은 남양(南阳)과 영천(颍川)을 포함하고, "하북집단"은 기주(冀州)와 유주(幽州)를 포함하며, "하서집단"은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장액(张掖), 돈황(敦煌), 주천(酒泉), 무위(​武威), 금성(金城)의 5군을 포함한다. ​ 하남집단과 하북집단은 유수가 동한을 건립하는 기반이 되고, 하서집단은 동한의 통치를 유지하는 핵심역량이 된다. ​ ​ 동한제국은 명문사족집단이 건립한 정권이다. 그 기반은 바로 삼대집단이다. 그렇다면 이들 삼대집단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신조(新朝)말기, 왕망(王莽)의 개혁이 실패하고, 천재지변까지 더해지면서.. 2024. 4. 17.
중화민족: 통치자에 순화되고 있는 민족 글: 여홍래(吕洪来) ​ 어떤 사람들은 항상 중국인이 나약하고, 반항정신이 결핍되어 있다고 원망한다. 실사구시적으로 얘기하자면, 현재 일부 중국인들은 반항정신이 결핍되어 있고, 최소한의 정의감도 결핍되어 있고, 최소한의 도덕과 양식도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즉, 오늘날 일부 중국인들의 모습은 인류가 마땅히 가져야할 문명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의 책임을 공산당의 고압적인 정치와 잔혹한 통치에서 찾고, 민중의 폭정에 대한 공포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고압적인 정치때문에, 공포때문에, 중공의 일당독재통치에 침묵을 유지하고, 감히 반항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 다만, 사람으로서 마땅히 최소한의 정의감, 최소한의 도덕과 양심, 최소한의 시비관.. 2024. 4. 15.
유비(刘备)의 부인은 10명이 넘었을 것이다. 글: 역사대작회 ​ 유비에게는 감부인(甘夫人), 미부인(糜夫人), 손부인(孙夫人)과 오황후(吴皇后) 네명의 부인이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료의 기재를 보면, 유비의 부인은 이 네명만이 아니다. 칭제이후에 몇명의 비빈을 들였는지에 대하여는 정사에서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아 통계를 내기 어렵지만, 여기에서는 유비가 칭제이전에 몇명의 부인을 거느렸는지를 알아보자. 네 명은 훨씬 넘고,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열명은 넘을 것같다. 아래에서 차례로 살펴보겠다. ​ : "선주(先主, 유비를 가리킴)의 감황후. 패(沛)의 사람이다. 선주가 예주(豫州)에 있을 때, 소패(小沛)에 살았는데, 그때 첩으로 거두었다. 선주는 적실(嫡室)이 여러번 죽어서, 그녀가 항상 집안일을 관장했다(常摄内事)" ​ : "여포.. 2024. 4. 12.
당나라이후 장안을 왕조의 수도로 삼지 않은 이유는? 글: 청수(清水) ​ 진, 한, 당의 휘황찬란한 역사는 모두 수도를 관중지구에 두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통일왕조는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어느 왕조도 관중을 수도로 삼거나, 관중을 기반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북송도 낙양으로 천도할 생각은 하였지만, 장안으로 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주원장도 관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의 관중지구는 이미 너무 파괴되어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관중지구의 쇠퇴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인 점도 있고, 정치적인 점도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중심의 이전이다. 특히 대운하가 개통되어 남북경제가 연결된 후, 관중의 경제적지위는 점차 저하된.. 2024. 4. 11.
문명퇴보의 7가지 징조 글: 북유독서(北游读书) ​ 광세의 거작 의 작가인 윌 듀란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문명전파과정이 1세기이상 중단된다면, 문명은 사망하고, 우리는 다시 야만인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 천리지제, 궤어의혈(千里之堤,溃于蚁穴), 천리나 되는 제방도 개미구멍때문에 무너지는 법이다. 역사는 항상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자주 역행하기도 한다. 역사상 많은 문명의 붕괴도 하룻밤만에 완성되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질 때는 반드시 여러가지 징조가 나타나는 법이다. ​ 징조 하나: 집단적인 과대망상과 열광 ​ 하늘이 그것을 멸망시키고자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것을 미쳐버리게 만든다. 역사상 너무나 많은 사례가 이를 증명해준다. 1차대전전의 제정러시아이건, 11개국에 선전포고를 날린 대청국이건, 아니면 2차대전.. 2024. 4. 11.
<상군서(商君书)>: 중국인 노예근성의 근원... 글: 산교룡 ​ 는 법가사상의 구성부분이다. 아쉽게도, 공손앙(상앙)이 진나라에서 변법을 진행할 때, 그가 한 것은 치국지도가 아니라 치국지술이었다. 역사는 중국인에게 웃음거리를 남겼다. 공손앙이 진나라로 갔을 때, 그는 법가지도로 진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 그러나 진효공은 거기에 흥미가 없었다. 두번 얘기를 나누고 나서, 공손앙은 더 이상 치국지도를 고집하다가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진효공이 원하는 것은 치국지술이었기 때문이다. ​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같다. 바로 주제인 로 들어가보자. 상군서는 중국인의 노예근성의 근원이고, 중국인의 유전자에 심어진 사악한 바이러스이다. ​ 의 핵심은 어민오술(驭民五术, 백성을 다루는 5가지 기술)이다: 우민(​愚民), 약민.. 2024. 4. 9.
시진핑의 "주체곤경(朱棣困局)" 글: 규양(葵阳) ​ 여러해전에 나진우(罗振宇)가 '독수독과'의 이슈를 얘기한 바 있다. 그가 인용한 것은 조카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주체(영락제)는 일생동안 집권합법성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후 폭력적이고 냉혈광포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 나진우가 얻어낸 결론은 이러하다. 나쁜 짓을 한 이후의 보응은 하늘의 천벌이나 다른 사람의 보복일 필요는 없고,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뒤틀어질 가능성이 많다. 이런 뒤틀어짐은 당사자로 하여금 더욱 많은 나쁜 짓을 하게 하고, 더더구나 계속하여 해결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면서, 스스로의 두려움과 괴로움을 감추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 명나라때 주체가 권력을 잡은 과정에 대하여는 이미 정설이 나와 있다. 그가 아무리 황실의 순수한 혈통이라 하더라.. 2024. 4. 9.
누가 원숭환을 죽였는가 -- 김용의 <원숭환평전>을 읽고.... 글: 고천활해(高天阔海) ​ 은 무협소설가 김용 선생의 글로, 1975년에 썼다. 내가 이전에 이 글을 읽게 된 것은 최근 을 보았기 때문이다. ​ 은 김용선생이 1956년에 발표한 무협소설이다(후기에서 그 자신이 자신의 두번째 소설이라고 밝혔다). 또한 내가 김용무협소설을 가장 먼저 접촉한 것이기도 하다. ​ 내가 당시 읽었던 김용의 무협소설은 을 제외하고,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 , , , , , , .등등. 비록 그의 15부 무협소설을 을 일망타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절반은 읽었다. ​ 당시 또한 고룡, 양우생등의 무협소설도 읽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한 것은 역시 김용의 작품이다. ​ 무협지외에 나는 언정소설등 통속문학도 읽었다. 개략 젊은이들은 통속문학에 비교.. 2024.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