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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궁정의 서양의사 글: 관설령(關雪玲)​청나라 황제의 의료집단은 다원화된 팀이 있었다. 중견역량인 태의원(太醫院)의 의관(醫官)외에 서양의사도 중요한 일원이었다. 청나라 중기 서양의사들이 청나라궁중에 재직하면서 의료활동을 진행했다. 먼저 황실에서 일하면서 황제의 신체건강을 책임졌다. 나중에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서양의사가 강희제의 병을 치료하다​​​서양인의사가 황제를 치료한 저명한 사례는 두 개가 있다. 각각 강희32년(1693년)과 강희47년(1708년) 강희제가 학질(虐疾)과 심계증(心悸症,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를 가리킴)을 치료한 것이다.​강희32년 강희제의 신체상황에 관하여 강희제 자신이 쓴 바를 보면, "짐은 정월 초팔일부터 한병(汗病, 땀이 나는 병)이 시작되고.. 2024. 12. 25.
남당후주(南唐後主) 이욱(李煜): 문화상의 천재, 정치상의 바보 글: 최애역사(最愛歷史)​975년 초겨울, 서현(徐鉉)은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당(南唐) 사신의 신분으로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의 앞에 섰다.이때는 남당의 도성 금릉(金陵)이 송군에 포위된지 10개월째였다.서현은 말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처음에 조광윤은 이욱이 봉조입조(奉詔入朝)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남당을 정벌할 때, 서현이 한번 온 적이 있다. 이 중원웅주의 앞에서도 서현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논리를 펼쳤다:"이욱(李煜)은 죄가 없습니다. 폐하의 전쟁은 명분이 없습니다. 이욱은 땅과 같고, 폐하는 하늘과 같습니다. 이욱은 아들과 같고 폐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늘은 땅을 덮을 수 있고, 아버지도 아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그러자 조광윤이 웃으면서 한 마디 했.. 2024. 12. 24.
예찬(倪瓚): 결벽증을 가진 원(元)나라때의 화가 글: 조림운(趙林雲)​원나라때 예찬이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가 있었다.그의 그림은 자연스럽고 간결했으며, 평생에 걸쳐 지순지정(至純至淨)을 추구한 예술가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벽증이 있었다.그의 그림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 위에도 배가 없고, 산간에도 집이 없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이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존재이다. 설사 그 자신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그의 정원에는 오동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는 매일 원정(園丁, 정원관리인)에게 나뭇잎을 깨끗이 닦도록 시켰다. 조그만치의 먼지도 묻어있지 않도록.원정들은 좋은 보수를 받다보니, 혼신의 재주를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잎 하나하나를 닦아서 이끼나 먼지가 묻지 않도록 했다.어느 날, 예찬의 친구가 방문했고,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 2024. 12. 23.
아편전쟁: 군사상의 무능, 도덕상의 무치 글: 최애역사(最愛歷史)​한쪽은 강경한 태도의 청나라 흠차대신(欽差大臣)이고, 다른 한쪽은 절대로 타협이 없는 영국의 주중상무감독이다. 이들은 "교흉(交凶, 흉수를 내놓는 것)"과 "구결(具結, 책임을 인정하는 서면)"문제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는 1839년 중국-영국관계의 주요 내용이다.​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 1801-1875)의 고집을 임칙서(林則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광동순무(廣東巡撫)와 이 일에 대해 언급할 때, 임칙서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의혹을 얘기한다: "엘리엇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출로가 없는데, 왜 마음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임칙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영이(英夷)"두목은 왜 이 두 가지 '천경지의(天經地義)'한 일에 대하여 .. 2024. 12. 23.
오교병변(吳橋兵變): 닭 한 마리가 불러온 참사, 대명과 후금의 운명을 바꾸다. 글: 약진역사(躍進歷史)​역사는 이렇게 황당할 때가 있다. 정말 사소한 일이 천군만마의 국면을 가볍게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숭정4년(1631년), 산동(山東)의 오교(吳橋)에서 닭 한마리로 인해 일어난 충돌이, 전체 정예 화포부대의 반란을 불러온다. 대명이 거액을 들여 만든 "정예화기영"이 단시간내에 등주성(登州城)을 함락시키고, 후금에 투항하여, 후금이 대명을 공격하는 핵심부대가 된다. 오늘날의 이야기에 비유하자면,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연구개발한 첨단무기가 적군에 고스란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명나라말기 요동에서는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누르하치의 후금이 굴기한 후, 대명의 전통기병과 보병은 이미 계속 패퇴하는 추세였다. 특히 살이후전투(1619년)이후, 명군의 열세는 분명하게 드.. 2024. 12. 23.
구자탈적(九子奪嫡)에 대한 또 다른 시각: 상삼기(上三旗)와 하오기(下五旗)의 다툼 글: 송안지(宋安之)​역사는 비록 불변이지만, 서로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돌아볼 수는 있고, 그렇게 하면 왕왕 다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청나라때의 구자탈적(九子奪嫡)을 예로 들면, 중국역사상 저명한 탈적지쟁(황위계승전)의 배후에는 여러가지 다른 의미가 있고, 관련되는 범위가 너무 넓다. 그중 팔기(八旗) 내부의 투쟁을 보면, 이는 기실 상삼기와 하오기의 투쟁이었고, 결국은 양패구상(兩敗俱傷)하고, 옹정제가 '어부지리'을 얻은 것이다.​소위 상삼기는 상황기(鑲黃旗),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이고, 그 의미는 천자가 직접 지휘하는 기(旗)라는 것이다. 처음에 천자가 직접 지휘하는 기는 청태조 누르하치가 직접 지휘한 양황기(兩黃旗, 정황기와 상황기)이다.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가 즉위한 후.. 2024.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