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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의 대외군사원조 규모는...?

by 중은우시 2023. 1. 25.

글: 임휘(林輝)

 

외국신문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신임 외교부장 친강(秦剛)이 얼마전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방문하는 나라마다 채무를 하나씩 탕감해주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은 신종코로나로 고통을 겪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의약품부족에 시달리는 상황하에서 중국당국은 중국인의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뿌리면서 외국의 정계요인을 매수하고, '우방'과 우호적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겉모습을 만드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는 다시 한번 중국당국의 "생명지상, 인민지상"이 철두철미한 거짓말, 헛소리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실상 중국당국이 대외적으로 돈을 뿌리는 것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중국 외교부의 비밀해제문건과 중국외교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76년까지 모택동,주은래가 집권하고 있을 때, 특히 문혁기간동안, 중국경제는 발달하지 못했고, 인민들도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있는데도 중국은 북한, 베트남, 알바니아등 110여객가와 지구에 거액의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했고, 그 규모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북한에 대한 거액의 원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여러 중국인들도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중국의 베트남과 알바니아에 대한 대규모 원조를 중점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중국당국의 눈에 남유럽 발칸반도에 위치한 알바니아는 "수족같은 형제국가"이다. 그리하여 거국적으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1961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이 알바니아에 원조한 금액은 9,000억위안(현재의 환율로 계산한 것임. 당시의 금액으로는 백억위안이상)이다. 여기에는 식량, 일용품, 의약품이 포함되었을 뿐아니라, 각종 무기, 탄약, 비행기, 외국화폐등까지 포함되어 있다.

 

자료를 보면, 원조무기중 대포 장비 항목만 중국은 무상으로 알바니아에 1만여문을 제공했다. 이 숫자는 당시 미국과 소련의 현역포병장비도 가지지 못한 숫자이다. 그리고 1961년부터 1978년까지, 알바니아는 아무런 전쟁행동도 없었다. 자료를 보면, 부대의 일상적인 수요를 만족시키는 외에, 상당한 수량은 전쟁준비를 위해 지하무기고에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각종 무기를 원조하는 외에, 중국당국은 교원을 파견하여 원조무기의 사용방법도 알려주었다.

 

또 다른 데이타를 보면, 이 면적이 겨우 2.8만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가 300여만인 국가에 수십만개의 토치카가 설치되어, 세계에서 1인당 토치카가 가장 많은 국가라 할 수 있다. '토치카왕국'이라는 칭호도 얻었고, 토치카를 건설하기 위하여, 알바니아는 모두 1억여달러를 썼다. 이 돈은 자연히 중국의 원조에 기댄 것이다.

 

중국의 알바니아에 대한 경제방면의 원조는 주로 대출형식으로 알바니아에 물자를 제공하였다. 1961년봄, 소련이 알바니아에 대한 경제원조를 중단한다. 중국당국은 알바니아에 수십만톤의 식량을 제공하는 외에, 2.5억위안의 자금도 지원했고, 19건의 프로젝트를 맡아서 해준다. 당시에 이런 일도 있었다: 수천만의 중국인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으로 아사할 때, 원래 중국으로 가야할 식량운송선 1척이 알바니아에 대한 원조가 필요하여 방향을 바꾸어 알바니아로 갔다. 이게 무슨 짓인가?

 

그외에, 중국당국이 공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4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이 알바니아에 제공한 프로젝느는 모두 142건이다. 그중에 완공된 것이 91건, 기본적으로 건설을 마무리하거나 건설중인 것이 23건이다. 이미 설계를 진행하는 것이 17건이다. 중국은 알바니아에 철강공장, 화학비료공장, 제염, 제산, 유리, 구리가공, 제지, 비닐, 군사공업등 새로운 공업부서이고, 전력, 석탄, 석유, 기계, 경공업, 방직, 건설자재, 통신과 방송등 부문의 프로젝트도 있다. 이를 통해 알바니아의 공업화수준은 크게 제고된다.

 

<염황춘추>가 1994년 제9기에 중국주인도대사관 초대 무관을 지낸 주카이인(朱開印)의 회고글을 실은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혁기간, 중국의 대외원조규모를 크게 늘였다. 어떤 나라는 계속 추가로 요구했고, 뭐든지 요구했으며, 끝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고 결국 중국은 돈을 쓰고도 호감을 얻지 못했다.

 

주카이인은 알바니아를 예로 들었다. 그 군대는 전쟁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다지 힘들게 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대표단은 계속하여 오면서 계속하여 리스트를 내밀었다. 그리고 무조건 달라는 태도였다. 1972년 한해만 하더라도 중국이 알바니아에 제공한 각종 무상원조는 알바니아의 인구 1인당 5천위안에 이르렀다. 그때 중국인의 1인당 소득은 겨우 몇위안이나 되었던가?

 

그외에 당시 주알바니아대사를 지낸 겅뱌오(耿飊)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1954년이래, 우리가 알바니아에 경제, 군사원조를 제공한 것은 근 90억위안이다. 알바니아의 총인구는 200만이어서 평균 1인당 4천여위안에 달했다. 이건 적지 않은 숫자이다. 중국이 알바니아에 지원한 화학비료공장은 연산 20만톤으로 평균1헥타르당 400킬로그램이다. 이는 중국의 농촌경작지에서 사용하는 화학비료수량을 훨씬 넘어선다. 군사원조항목은 아주 많고, 수량도 크다. 알바니아국의 국방의 필요보다 크다. 호자는 일찌기 전혀 거리낌없이 말한 바 있다: '너희가 가진 것은 우리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동생이 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셰후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가 너에게 달라고 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달라고 하겠는가?' 이선념 부총리가 알바니아를 방문했을 때, 일찌기 셰후에게 이렇게 물은 바 있다: '너희는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가져갔는데, 언제 갚을 생각이냐' 그러자 셰후는 갚는 것은 전혀 고려한 바 없다고 말했다."

 

중국당국이 알바니아에 이렇게 많이 퍼준 것은 국민의 생사를 도외시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신중국이 건립된 후 국제적으로 구립되어 처음에는 소련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후 후르시쵸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중소간에 분쟁이 생겼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의 공산주의사고로 인하여 1958년 중공중앙문건에서는 '형제국가'에 대한 원조는 '국제주의의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중국당국은 차라리 외국에 줄지언정 인민에게는 주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알바니아공산당의 당수인 호자는 소련의 스탈린사후, 소련공산당이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스탈린을 비판한 것에 불만을 품고 중국공산당이 제기한 '소련을 우두머리로하는 동방국가는 마크르스주의원칙을 벗어났다'는 입장에 동의하고, 소련등국가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공격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쌍방은 '밀월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1956년 8월, 호자는 당대표단을 이끌고 중공8대에 참가하며, 모택동이 직접 접견한다. 다음 해,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팽진이 대표단을 이끌고 답방한다. 그후 쌍방은 고위층의 교류가 빈번했고, 알바니아대표단은 매번 중국지도자들을 접견했다.

 

1966년 11월, 알바니아노동당은 "5대"를 거행한다. 강생(康生)은 대회에 축하전보를 읽었다. 회의장에서는 오랫동안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택동, 호자"라는 구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때부터 "세계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한 마리는 유럽에 있고 한마리는 아시아에 있다. 호자,모택동 두 사람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노랫소리가 알바니아에서 널리 불려지게 된다. 당시 중국은 '문혁'을 진행하고 있었고, 알바니아노동당은 적극적이고 열광적으로 지지를 표시한다.

 

중국이 거국적으로 도와준 것에 당연히 보답도 있었다. 알바니아는 중국공산당이 중화민국 타이완을 대체하여 유엔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얻도록 암중으로 도와주었고, 결국 1971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국제정치무대의 중요한 무대에 복귀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유엔은 중국이 향후 세계의 혼란을 불러오도록 하는 화근을 심은 셈이다.

 

1970년대, 미국대통령특사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하고, 호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알바니아노동당은 모택동이 제기한 '3개세계론'을 반대한다. 이때부터 쌍방은 이견이 생기고, 고위층의 왕래도 줄어든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계는 기본적으로 정상을 유지했다.

 

1970년, 알바니아는 중국이 자신의 5차5개년계획(1971-1975)기간동안 32억위안의 경제원조를 요청한다. 중국은 최종적으로 장기무이자로 19.5억위안을 제공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5년기간의 장기무역협정을 체결한다. 1974년, 알바니아는 다시 한번 중국에 50억위안의 원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중국은 도와줄 능력이 없어 제공하는 원조금액이 알바니아가 원하는 금액에 훨씬 못미치게 되고, 알바니아는 불만을 표시하며, 대출금액을 늘여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1976년에서 1980년에 상활한 대출금의 기한을 연기해줄 것도 요구한다. 중국은 상환연기에 동의해주는 외에 다른 것에는 동의해주지 않았다.

 

그후, 국내의 심각한 경제위기로, 중국은 점차 알바니아에 대한 원조를 줄인다. 이는 알바니아의 불만을 샀다. 1976년이후, 중국과 알바니아의 불화는 공개화된다. 알바니아는 국내의 일부 중국인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가하고, 수천명의 중국을 지지하는 간부를 체포한다. 심지어 중국의 고위관료 허세우(許世友)와 관계가 밀접했던 국방장관 바루크를 처형하기까지 한다.

 

1978년 호자는 그의 저작 <제국주의와 혁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택동의 사상은 절대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알바니아의 관계는 악화된다. 이후 집권한 등소평은 철저하게 알바니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이어서 알바니아도 중국과의 일체의 무역, 문화교육, 과학기술관계를 중단한다. 남은 것은 대사급외교관계뿐이었다. 1956년부터 쌍방간에 형성된 친밀한 관계는 이렇게 완전히 결렬되고, 1983년에 이르러 다시 교류가 회복되게 된다.

 

1991년 소련해체로 알바니아도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된다. 2009년에 NATO에 가입한 후, 알바니아는 독립적인 공군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원조해준 구형비행기를 매각하는 것이 의사일정에 올라온다.

 

알바니아외에, 중국이 거액의 원조를 제공한 또 다른 국가는 이웃나라인 베트남이다. 대륙에서 출판된 <중남해를 넘어서>라는 책에 따르면, 베트남전쟁때, 모택동의 원칙은 "무조건적으로 베트남동지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56년, 중국은 막 생산되기 시작한 반자동소총과 기관단총을 중국군대에도 아직 배치하지 않았는데, 우선적으로 베트남에 5만정을 제공했다. 1969년, 중형부교를 생산하는데, 역시 베트남에 우선적으로 제공했다.

 

1953년부터 1963년까지, 중국은 베트남에 6개의 고사포대대, 1개의 공병여단, 1개의 부교여단, 1개의 탱크여단과 1개의 폭격기여단을 만들어주고, 경무기, 자동차와 통신, 공정 및 관측기기등 무기장비를 제공해준다. 베트남이 남방에서 유격전을 펼칠 수 있도록 중국은 베트남에 9만정의 소총, 기관총을 제공한다. 그리고, 1965년 10월부터 1970년까지, 중국은 방공, 공정, 철도, 군수등 부대 합계 30만명을 베트남에 파견하여 후방에서 도와주도록 하며, 수천명이 베트남에서 사망한다.

 

1963년, 베트남공산당과 호치민이 모택동의 소련공산당에 대한 공개회신 <국제공산주의운동총노선에 관한 견의>에 호응하도록 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등소평으로 하여금 원고를 가지고 하노이로 가도록 하여, 베트남에 200억위안을 제공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준다. 이 200억위안은 당시 중국에서 어느 정도 금액일까? 이건 1963년 중국 GDP의 1/5에 해당하고, 그해 재정수입의 60%에 해당한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에 밉보이길 원치않은 호치민은 모택동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965년, 베트남공산당의 지도자 레주언(黎筍)과 호치민이 각각 중국으로 와서 원조를 요청한다. 모택동은 호치민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달라면 사람을 주고 ,물건을 달라면 물건을 주겠다." 특히 언급해야할 점은 베트남이 부상병의 치료에 필요한 혈장이 부족하다고 했을 때, 모택동은 이렇게 지시한다: "인명은 하늘에 달렸다. 200만밀리미터를 원조하라." 중국은 즉시 베트남에 200만밀리미터의 혈장을 제공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 혈장은 대기근이후의 생존자들에게서 뽑아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외에 호치민은 중국에 도로공사도 요청한다. 모택동은 여전히 모두 응락한다. 베트남북방의 12개의 주요 도로중 중국이 원조하여 건설한 것이 7개이고, 중국의 8만명의 공병이 기계와 기름, 재료를 모두 가지고 가서 3년간 공사했다. 중국의 밥을 먹으면서 베트남의 일을 해준 것이니, 순수하게 무상원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시 주카이인의 회고록에서도 명확히 말한다. 중국이 베트남의 배후에서 지지해주지 않았더라면, 호치민은 미국인을 쫓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당연히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철수한 것은 국내등의 원인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는 또한 중국이 전후로 베트남에 엄청난 각종원조를 해주었고, 각종 기관총, 대포, 차량만 하더라도 베트남인구 총수만큼 된다. 거의 전체 베트남국토에 깔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여러번 베트남을 갔고, 직접 보았다. 모든 베트남군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중국에서 공급한 것이었다. 입은 옷, 먹는 양식, 쓰는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먹는 약, 피우는 담배까지도 중국 것이었다. 당시의 베트남군인들은 나를 보면 모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보응우엔잡(武元甲, 전 베트남국방부장)은 여러번 얘기했다. 중국이 없었다면, 전쟁을 하루도 치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나중에, 베트남의 산과 들판에 널린 동굴, 창고에는 모두 중국의 원조물자가 가득 차 있었다. 대포, 총기, 탄약, 자동차, 의복, 의약품...뭐든지 다 있었다. 많은 것들은 녹이 슬고,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베트남인들이 나중에 중국국토에 쏜 포탄, 중국군인에게 쏜 포탄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중국제조였을까?"

 

주카이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도 하나 폭로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 이들 국가를 도와주기 위하여 외국에서 선진적인 무기, 기술, 기자재를 구매해서 주었는데, 나중에 중국인들이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중국이 큰 돈을 들여서 구매해서 '무상원조'해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가격은 중국이 사들인 가격의 절반 혹은 그 이하로. 예를 들어, 알바니아는 중국이 원조한 정밀기기의 제조에 쓰이는 특수강을 문과 창문의 걸이로 만들어 판매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많았다. 중국은 쓴 입맛만 다셔야 했다.

 

한 가지 사건은 주카이인에게 아주 인상깊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은 베트남에 식량을 운송하는 차량이 쓰촨 경내에서 굶주린 인민들에게 가로막힌다. 그들은 차로 기어올라 식량포대를 찢고 생쌀을 그대로 먹었다. 그런데 굶주린 인민들 중에서 식량포대에 '베트남원조물품'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이 쌀은 먹어서는 안된다. 베트남에 보낼 것이라고 했더니, 모두 약탈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주카이인등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일을 이르킨 원흉이 누구인지? 그들이 충성을 다하는 중공이 아니던가. 이렇게 중국인을 대하는 중공에 대하여 그들은 충성을 다할 가치가 있었을까?

 

모택동과 주은래는 이렇게 고심고심하며 베트남을 회유하려 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69년 호치민이 사망한 후, 레주언은 즉시 소련쪽으로 돌아선다. 그후에 중국-베트남전쟁이 벌어지고.

 

중국은 본국인민의 생활은 돌보지 않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력과 맞지 않는 대외원조를 했다. 그리고 알바니아, 베트남, 북한뿐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적지 않은 국가들도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나 중국인민, 특히 하층백성들이 얻은 것은 생활의 빈곤과 경제의 낙후이다. 그리고 병이 나도 치료를 받을 수 없고, 집을 살 수도 없고,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물어보자. 세계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본국의 경제가 낙후된 상황하에서 본국인민의 생사는 돌보지 않고 온나라의 힘을 들여서 다른 나라를 원조해주는지. 만일 이런 원조를 자신의 인민생활개선에 사용했다면 굶어죽은 수천만명의 본국인민들을 구했더라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이런 정부가 사악한 정권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