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李自成)의 개봉공성전(開封圍城戰)
글: 양문찬(楊文燦)숭정14년(1641년) 정월, 이자성은 하남 낙양(洛陽)을 점령한 후, 개봉(開封)의 명나라 수비군의 방어가 비교적 약하다는 것을 알고, 즉시 행동에 들어간다. 그는 이것이 명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조정을 무너뜨릴 중요한 기회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이월, 이자성은 3만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밤을 새워 행군하여, 3일만에 개봉성에 도착한다. 하루빨리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그는 부하들로 하여금 쟁기(犁), 호미(鋤), 도끼(斧)등의 도구를 가지고 성벽을 둘러싸고 터널을 파도록 지휘하여, 이를 통해 공격과 침투를 진행하고자 한다.개봉의 수비군지휘관은 명나라의 순무인 고명형(高名衡)이었다. 그는 틈군(闖軍, 이자성군)이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대를 지휘하여 수비를 강화하..
2025. 3. 30.
원세개(袁世凱)의 연군(練軍): 대청멸망원인...
글: 최애역사(最愛歷史)1901년 11월 7일, 서태후는 "서수(西狩)"를 마치고 북경으로 회궁하는 도중에 이홍장(李鴻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같은 날, 그는 의지(懿旨)를 반포하여, 원세개를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한다. 자신의 권세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열강에 잘보이기 위하여, 그녀는 외교수완과 군사실력을 겸비한 인물에게 직예총독을 맡겨야했다.당시, 외국세력이 지지하는 개명한 독무(督撫, 총독/순무)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원세개와 장지동(張之洞). 장지동의 군대는 호북(湖北)에 있고, 만명이 되지 않았다; 원세개의 군대는 산동(山東)에 있으며 근 2만의 군대를 보유했다. 북경에도 가깝고, 장비도 우수하며, 건제도 완비되었다.그리하여, 대청제일강신(大淸第一..
2025.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