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1389 안록산(安祿山)은 반란후 1년만에 죽었는데, 안사의 난은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글: 압사룡(押沙龍)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주인공 중 하나로서, 안록산은 아주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야심도 있다. 그러나, 아주 집착적인 사명감같은 것은 없었다. 대사를 이루는 사람들은 왕왕 이런 사명감이 필요하다. 안록산은 투기꾼에 더 가까워보였다. 그는 낙양을 점령한 후 서둘르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한다. 그러나, 형세가 일단 악화되자 그는 신념을 잃어버린 듯했고, 이제 끝났다고 여기는 듯했으며, 곧 질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하가 그를 위로한다. "대사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만의 무리를 거두어 천하에 횡행하며 도척(盜跖)이 되더라도 오년 십년은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안록산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네가 내 마음을 풀어주는구나.. 2022. 1. 3. 충효군(忠孝軍): 금나라 최후의 최강전투부대 글: 암암설사(巖巖說史) 1233년, 450명의 '충효군'은 기습을 통해 3,500명의 몽골철기를 참살한다.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길사복화(撒吉思卜華)는 도망가다가 맞아죽는다. 이어서 '충효군'은 승기를 틈타 계속 진격하고 8천의 한군(漢軍)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친다; 대장 동준(董俊)은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사천택(史天澤)은 황급히 도망친다. 장유(張柔)는 포로로 잡히는 것이 겁나서 길가의 풀숲에 숨는다. 낭패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귀덕전투(歸德戰鬪)는 금나라가 이미 멸망에 가까웠을 때이다. 그렇지만 '충효군'은 여전히 몽골철기를 격파했다. 충효군은 금나라말기의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강력한 부대였다. 단병작전능력은 아주 강하여, 1대1의 전투라면 몽골군도 충효군을 이길 수 없었다. 이것은 사실이.. 2021. 12. 31. 선유전투(仙遊戰鬪): 복건왜구(福建倭寇)의 명조관군(明朝官軍)에 대한 최후의 항전 작자: 미상 1563년, 흥화전투(興化戰鬪)가 끝나면서, 복건연해의 국면은 이미 어느 정도 제압되었다. 그러나, 왜구의 핵심인 해상집단은 여전히 원래의 체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속히 정비하여 계속 보전(莆田)을 중심으로 한 해역에서 새롭게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날로 위축되는 활동공간은 왜구의 생존현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일으킨 선유전투에서 패배한 후 부득이 오랫동안 경영해온 복건해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왜구는 천연적으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전형적인 해안의 밀수집단으로서, 각지역의 왜구는 탄생때부터 아주 선명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구성원의 구조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대로 무역에 종사하거나, 어업에 종사하거나 소금을.. 2021. 12. 30. 문혁(文革)때 자살한 문화계 10명의 여성 중국의 10년 '문혁'에 참혹한 사건이 무수히 많다. 비정상사망한 수도 천만에 이른다. 그중 적지 않은 유명한 여성들도 문혁때 해를 입었다. 그녀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로움과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1. 주매복(朱梅馥) 대륙의 번역가 부뢰(傅雷)의 처이다. 1966년 9월 3일 새벽, 홍위병에 의해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3박4일간 무릎을 꿇고 비투를 받는 굴욕을 받은 후 부뢰와 함께 집안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2. 이취정(李翠貞) 상해 교외의 남회현 사람. 피아니스트. 상해음악학원 피아노학과 주임. '문혁'때 크게 모욕을 받는다. 홍위병은 그녀로 하여금 땅바닥에 엎드려서 땅위에서 의자위로 기어올라오도록 강요했으며, 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검게 칠하기도 했다. 그녀는 굴욕을 견디지.. 2021. 12. 29. 민국시대의 12개 직할시 글: 역사망(歷史網) "직할(直轄)"을 고대에는 "직예(直隸)"라고 불렀다. 직예제도는 송나라때부터 시작된다. 북송은 "로(路)"를 설치하여 현재의 성급행정구역으로 삼는다. 23로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부(府)가 있었다. 예를 들어 북송의 경사소재지인 개봉부(開封府)이다. 1946년 민국정부에서 통과된 '헌법'에는 여러번 '직할시'가 언급되어 있다. 다만 제11장 '지방제도'에는 단지 '성(省)', '현(縣)'만 규정되어 있고, 직할시나 지방(서장)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그리고 이후의 공문에서도 여전히 "원할시(院轄市)"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직할시"라는 명칭이 직접 시행되지는 못했다. 국민정부에는 일찌기 12개의 직할시가 있었다. 1921년 북경정부가 반포한 에는 경도시(京都市)를 내무부가 직.. 2021. 12. 24. 중국공산당 건당(建黨)의 내막 글: 방주자(方舟子)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제1차전국대표대회("1대")를 개최한 것을 중국공산당 성립의 표지로 본다. "1대"는 7월 1일에 개최된 것이 아니다. 이 날짜가 공산당건립기념일로 정해진 것은 모택동이 임의로 지정한 것이다. 공산당이 성립된 초기에는 도망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매년 건당을 경축하지도 못했다. 1938년 공산당이 섬서북부에 근거지를 마련 하고, 안정되고난 후에 비로소 모택동은 매년 건당을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만, 모택동이 비록 1대 대표이고, 기록을 책임진 대표이기는 하지만, 자신도 "1대"를 도대체 언제 개최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연안에는 또 한명의 "1대"대표인 동필무가 있었다. 모택동은 동필무를 찾아가서 물어본다. 동필무도 구체적으로 어느 날에 개최했는지.. 2021. 12. 23. 이전 1 ··· 30 31 32 33 34 35 36 ··· 2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