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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389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온 적이 없다. 글: 살사(薩沙) 대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도대체 중국에 왔던 것일까? 1298년 9월 7일 마르코폴로는 감옥에 갇히고, 루스티첼로와 합작으로 를 쓴다.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온 적이 있을까? 쿠빌라이를 만난 적이 있을까? 지금 보면, 마르코폴로가 중국에 와서 쿠빌라이를 만났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는 없다.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나라때의 모든 역사기록에서 마르코폴로를 찾아볼 수 없다. 몽골인들이 원나라를 건립한 후에는 더 이상 유목민족이 아니고, 계통적으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마르코폴로여행기에는 그가 여러번 원나라의 대칸 쿠빌라이를 배알했다고 적었다. 1275년 여름, 23살의 마르코폴로는 처음 쿠빌라이를 만났고, 동행한 사람은 그의 부친과 숙부였다. 마르코폴로의 기술에 따르면, 대칸은 젊고 .. 2021. 10. 8.
청일전쟁중 평양전투에서의 패배는 "탄진양절(彈盡糧絶)"때문일까? 글: 염극비(廉克飛) 좌보귀(左寶貴)는 평양에서 전사하여 역사에 영명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평양전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전사한 후, 섭지초(葉志超)는 부대를 이끌고 5백리를 미친 듯이 도망쳐 중국내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섭지초는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 백년동안 여론의 비판은 주로 그를 향했고, 섭지초가 담량이 적고 멍청하여 평양전투에서 대패하게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 필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 사건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쓰는 것은 무슨 예술적인 문학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인이라면 좌보귀와 섭지초를 대비하여 평가하면서 하나는 흑, 하나는 백, 하나는 용사, 하나는 겁쟁이로 그릴 것이다. 무대에 올리는 희극이나 소설이라면 그렇게 .. 2021. 7. 21.
계주병변(薊州兵變): 명나라최강의 척가군(戚家軍)은 어떻게 우군에 참살당했는가? 글: 남북양조(南北兩謿) 만력23년(1595년)의 계주병변은 하나의 비극이며 지금도 차마 다 읽을 수가 없다. 이 사변은 사료에 기록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에 몇 마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당시는 아직 삼대정(三大征)중 하나인 항왜원조(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가리킴)시기였으므로, 조선의 사료에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만력이십삼년 십월, 기미(己未)일, 방해병(防海兵, 해안방어병)이 군량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鼓噪). 계진의 독(督), 무(撫), 도신(道臣)이 난리를 일으킨 자를 붙잡아 처형하고, 나머지 일당은 남쪽으로 되돌려 보냈다. 병부에 보고하였고, 병부에서 허가했다." 명신종(만력제)때 병변이 여러번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만력10년의 항주병변(杭州兵變), 1.. 2021. 5. 1.
명나라시기 오이라트(瓦剌)는 언제 멸망하였는가?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오이라트(瓦剌)의 '가장 휘황했던 시기'이다. 그들은 가볍게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을 포로로 잡았을 뿐아니라, 명나라의 병방요지까지 맹렬하게 진격해 들어갔었다. 만일 우겸(于謙)이 없었더라면 명나라는 그때 멸망했을 것이다. 다만 오이라트의 운은 좋지 못했다. 명나라에 패배하면서 크게 타격을 입었을 뿐아니라, 내부에서 모순이 폭발하여, 스스로 무너진다. 이는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이라트의 역사는 당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민족은 아주 사납다. 하루종일 주변부락과 당나라의 변경을 돌아다녔다. 당나라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오이라트는 죽어도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할 수 없이 그들과 싸워야 했고, 백여년.. 2021. 5. 1.
몽금십년전쟁(蒙金十年戰爭): 초원제국과 삼림제국의 결전 글: 문재봉(文裁縫) 1209년, 몽골제국은 건립된지 이미 3년이 지났다. 징기스칸은 정예병을 양성해서 군사력이 강성해진다. 그는 초원의 백성들을 모조리 자신의 휘하로 거두어 들였다. 점점 세력이 커진 징기스칸은 다음 확장목표로 금나라를 겨냥한다. 이전까지 몽골은 금나라의 속국이었다. 다만 현재 몽골은 이미 옛날의 몽골이 아니다. 징기스칸은 이제 몽골은 그 어느 나라와도 일전을 벌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금나라가 이전에 목려(木驢)의 혹형으로 안바하이칸을 처형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이 해에 금장종(金章宗)이 붕어하고, 완안영제(完顔永濟)가 황위를 승계한다. 그는 문약한 서생이고, 징기스칸은 이전에 그를 만나본 적이 있는데, 그를 무시했다. 다음 해, 완안영제는 사신을 몽골로 파견해서,.. 2021. 4. 21.
타이타닉호의 중국인생존자 6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종의(鍾毅), 오상울(吳尙蔚) 1912년 4월 14일, 23:40경 당시 호화 여객선 '영원히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던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에서 빙산에 부딛쳤다. 1,514명의 승객은 차가운 대서양 깊은 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생존한 700여명의 승객은 바다 위에서 4,5시간동안 사투를 벌였으며 마침내 구원온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사고의 여파는 여러 해동안 지속되었다. 1998년 제임스 카메론감독의 는 더욱 개인적인 각도에서 이 사건을 재현했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경전으로 남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타이타닉호의 생존자 중에는 6명의 중국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타이타닉호가 출항한 1912년은 신구교체의 시기였다. 1차대전이 곧 발발할 .. 2021. 4. 18.